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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교회 설교/설교듣기

2011년 매일성경 설교 23.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기 위하여



본문 : 데살로니가 후서 2장 12절 - 3장 5절


서론 : 하늘나라를 기다리는 것에 대하여...

원래 진짜가 가치있는 것일수록 가짜가 많게 마련입니다. 진품이 가치가 없다면 가짜나 카피제품이 생기지 않지만 진품이 지니는 가치가 클수록 가짜가 더 많습니다. 그런 면에서 기독교는 태생적으로 항상 가짜들의 괴롭힘을 당할 수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초대교회 시대부터 지금까지 기독교에는 비슷비슷한 가짜들이 많이 생겨났고 또 존재해 왔습니다. 이런 것들을 일컬어서 이단이라고 부릅니다. 언젠가도 말씀드렸지만 우리가 이단을 분별해 내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적어도 사이비가 아니라 이단이라고 불릴 정도라면 처음에는 그 정체를 잘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진짜와 많이 닮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특히 평신도의 수준에서는 이단인지 아닌지 잘 알지 못합니다. 실제로 이단에 들어가 보면 놀랍게도 기존 교회의 목사와 장로들의 상당수가 거기 속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이것은 아주 확실한 교리적인 기준이 없이는 이단을 분별해 내기가 까다롭고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단들 중에서도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고 또 인기가 있는 이단이 종말론과 관련된 이단들인데 이와 관련된 이단들이 그렇게 많고 또 그렇게 쉽게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종말론, 그러니까 예수님의 재림과 관련된 내용만큼 성경이 어찌보면 모호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주님의 재림과 관련된 내용을 살펴보면 내용도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시간이나 장소가 정확한 것도 아니구요. 그러니 아무 사람이나 이 이야기 저 이야기를 늘어놓아도 사람들이 그렇게 쉽게 속아넘어가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재림을 이야기할 때, 성경이 항상 일관적으로 이야기하는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재림을 기다리는 태도에 관한 것인데, 성경은 예수님의 재림을 이야기할 때, 성도들에게 항상 굉장히 차분하고 확신있게 기다리라고 말합니다. 얼핏 생각하면 마지막 날 구원받는 일이 절대적으로 중요하기 때문에 논 팔고 집 팔아서 산에 들어가서 하늘만 바라보라고 할 것 같지만 실제로는 정반대입니다. 오히려 성경이 종말을 이야기하고 주님의 재림을 이야기할 때 가장 강조하는 것이 바로 ‘일상성’입니다. 주님은 그 때와 장소는 우리에게 알려질 수가 없으니 그런 것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말고 확실한 소망가운데 지금의 현실 속에서 성도로서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언제 주님이 다시 오시든지 걱정없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하고도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이것만 기억하면 적어도 종말과 관련된 이단에는 빠질래야 빠질 수가 없습니다. 종말론과 관련된 이단치고 시끌벅쩍 광신적이지 않은 것들이 없고 또 시간과 장소를 말하지 않는 이단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결국 주님 오시는 날 주님과 함께 하늘나라에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에 대해서 아무리 고상한 목적을 가져다 붙인다고 하더라도 이것보다 더 중요한 목적은 없습니다. 예수를 믿고 아무리 훌륭한 삶을 살고, 아무리 복된 삶을 살더라도 그것이 없다면 결국 예수믿는 일은 영원한 멸망으로 끝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하면 확실하고 안전하게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지를 아는 것은 우리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에 들어온 잘못된 가르침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 굉장히 짧은 시간에 신앙의 성장을 이루었지만, 그래서 사탄도 가만히 놓아두지 않았습니다. 예수믿은 시간으로만 본다면 아직은 어린 아이에 불과한 갈라디아 교회와 성도들을 핍박으로 괴롭히기 시작한 것입니다. 다행히도 이들은 자신의 믿음을 아주 잘 지켜냈습니다. 사도 바울이 놀랄 정도로, 감사하며 극찬할 정도로 아주 잘 지켜냈습니다. 그러나, 그 때 슬며시 교회로 들어온 것이 바로 주님의 재림에 대한 이단이었습니다. 그들은 말했습니다. “주님이 금방 오실 것이니 이제 하늘만 바라보자, 모여서 기도만 하자, 모든 걸 내려놓고 산으로 들어가자”고 말입니다. 사는게 별로 고생스럽지 않을 때는  이런 주장이 그렇게 큰 설득력을 지니지 못합니다. 하지만, 믿는 일 때문에 굉장히 힘들 때에는 이런 주장만큼 성도들에게 매력적인 것이 또 없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고통 중에 있을 때는 현실보다는 하늘나라 쪽으로 마음이 기울기 쉽고 또 그래서 그 나라를 더 사모하게 되기 마련인데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손쉬운 길을 가르쳐 주니 그리로 마음이 끌리기가 훨씬 더 쉬워지는 것입니다. 하늘나라를 사모하자는 가장 영적인 메시지를 던지면서 동시에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아주 쉬운 방법을 가르쳐 주니 확실한 기준이 없는 경우라면 그리로 기울가 아주 쉬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것이야 말로 가장 위험한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만약 그런 주장에 끌려서 정말 그런 식으로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게 된다면 그 동안의 모든 믿음과 인내가 다 물거품이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의 성도들에게 절대로 그래서는 안된다고 말하면서 그들이 미혹되지 않도록 이끌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구원과 주님의 재림 때에 우리가 누리게 될 영광을 연관시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믿는 목적을 구원얻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 구원을 가장 넓은 의미로 생각한다면 구원에 대한 이런 이해는 정확한 이해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보면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고, 복음으로 부르시고 믿음을 주시는 최종적이고 가장 중요한 목적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13절과 14절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주의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 이를 위하여 우리 복음으로 너희를 부르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심이니라” 14절은 믿음의 목적을 구원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15절에서는 그 구원의 목적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그저 우리를 영원한 죽음에서 건져 주시고, 하늘나라의 백성이 되게 하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복음을 주시고 믿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진짜 목적은 더 크고 놀랍습니다. 우리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눠주어서 우리를 예수님처럼 영광스럽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에서 그 영광을 영원히 누리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고 우리를 구원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우리 신앙의 최종적이고 가장 중요한 목적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 신앙의 목적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주신 목적과 같아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아니면 신앙은 동상이몽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그저 구원받고 천국만 가면 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기를 바랬습니다. 하나님의 더 크고 놀라우며 한없이 은혜로운 목적을 그들 자신의 신앙의 목적으로 삼기를 바랬습니다. 고난을 인내하는 일도 그 안에서 믿음을 지켜내는 일도 다 그것 때문에 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랬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재림에 대한 잘못된 주장은 그 목적을 방해하는 것이었습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만약 그들의 꼬임에 넘어갔다가는 그 영광을 놓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늘나라는 그렇게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하늘만 바라보고 다 포기하고 내려놓고 기도만 한다고 영광스러워지는 나라가 아니다. 만약 지금 너희의 믿음, 그리고 너희의 인내가 영광스러운 열매를 맺게 하려면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 그 나라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으려면 ‘굳게 서서 우리가 말로나 편지로 가르쳐준 교훈들을 지켜야 한다.’”고 말입니다.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는가?

바울은 주님의 재림이 아무리 임박했다고 하더라도 주님의 다시오심을 준비하는 일은 살아가면서, 비록 고난 중에 있더라도 그 안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아름답고 향기로운 삶을 살아가는 일로 해야만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만이 성도들을 영원히 영광스럽게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준비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바로 그것이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예수님 자신의 가장 명확한 가르침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렇게 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냥 다 포기하고 다 내려놓고 기도만 하면서 주님을 기다리는 것이 훨씬 쉽습니다. 바울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믿음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성도들을 향해 그래도 그 속에서 거룩한 삶을 살아가야 한다고 가르치는 일은 바울에게도 쉬지만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영광스러운 하늘나라를 맞이하는 유일한 방법이니 달리 가르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위해서 축복하며 기도합니다. 그들 혼자의 힘으로는 고난 가운데서 믿음을 지키고 또 거룩하고 선한 삶을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데 필요한 은혜를 공급해 달라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의 기도를 통해서 우리가 이 땅에서 믿음을 지키며 이런 저런 수고와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거룩한 삶에 실패하지 않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서 기도해야 할 기도의 제목이기도 합니다. 

바울의 기도 내용은 따지고 보면 간단합니다. “예수님과 하나님께서 너희 마음을 위로하셔서 모든 선한 일과 말에 견고하게 하시기를 기도드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기도를 드리면서 사도 바울은 그 예수님과 하나님에 대해서 긴 설명을 덧붙여 놓습니다. 우리 믿음의 대상이신 두 분이 어떤 분인지를 알고  신뢰하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 지식과 믿음이 확고하면 확고할수록 우리의 신앙은 더 견고해질 수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에 대해서는 “우리 주”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세상도 너희들의 주인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너희 왕인 로마의 황제도 너희 주인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지금 너희를 괴롭히고 있는 사람들도 너희의 주인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니 그런 것들이 결코 너희의 주인이 되지 못하게 하라고 말합니다. 현실적인 어려움 속에 처하게 되면 그 어려움을 주는 현실에 빠져버리게 되기가 쉽습니다. 그 안에서 허우적 거리며 그게 다 인줄 알게 됩니다. 그러면 그  상황이, 그 어려움이, 그리고 그 어려움을 주는 사람이 내 주인이 되게 됩니다. 바울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성도의 주인은 결코 사람들이나 처해진 상황이 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너희의 유일한 주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 

또 하나님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 바울이 하나님에 대해 가장 먼저 이야기하는 것은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성도가 믿음 때문에 고통을 당하면 가장 먼저 의심하기 쉬운 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욕심을 부리는 것도 아닌데, 그저 믿음을 지키려고 하는 것 뿐인데 왜 이렇게 어렵냐는 불평이 생겨나며, 이런 어려움 가운데 나를 내버려 두시는 하나님이 정말로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 맞느냐는 의심이 찾아옵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합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너희들을 사랑하신다. 변함없이 사랑하시고 영원히 사랑하신다. 무한히 사랑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기 시작하면 모든 것이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모든 것이 무의미해집니다. 내가 참고 견디는 모든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으로 여겨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무기력해지고 무너져 버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 사랑이 얼마나 견고하고 변함없는지를 알고 또 붙들게 되면 그 사람은 다시 힘을 얻습니다. 다시 견고해 집니다. 그 어려움을 헤쳐나가고 승리할 힘을 얻게 됩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강력한 능력입니다. 바울이 알려주고 싶었던 것, 아니 다시 붙들게 해 주고 싶었던 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그는 언제나 하나님의 사랑의 강권하심 속에서 살았던 사람이고 그래서 그것이 얼마나 강하고 놀라운 능력이 되는지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이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두번째 내용은 바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위로를 주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사람의 위로를 받아보신 적이 있으시죠? 어떠셨나요? 위로가 되셨죠? 네. 어려울 때 마음을 나누고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위로가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위로는 단순히 위로일 뿐입니다. 단지 나의 어려움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는 정도의 위로 말입니다. 우리가 사람이기 때문에 이런 위로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런 위로에는 그리 큰 능력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위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 능력은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직접 주시는 위로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러한 성령님의 중보하심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고 바꾸기에 충분합니다. 게다가 그 위로는 한시적이지 않습니다. 기억과 함께, 감정과 함께 효과가 사라져 버리는 그런 위로가 아닙니다. 그 위로는 영원한 위로입니다. 우리가 땅에 사는 동안 언제나 우리를 다시 일으키시고 다시 새롭게 하기에 충분할만큼 영원하고 능력있는 위로입니다. 

바울은 세번째로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좋은 소망도 주신다고 말합니다. 좋은 소망... 세상에 나쁜 소망도 있습니까? 사람이 나쁜 것을 바라는 경우는 없기 때문에 나쁜 소망은 없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소망이 나빠질 수는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인간적으로 갖는 소망은 기껏해야 긍정적인 기대에 불과합니다. 때로는 막연하게 아무런 근거도 없이 “다 잘 될꺼야”라고 생각합니다. 또 때로는 이런 저런 것을 근거로 해 볼 때 “다 잘 될꺼야”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이런 것들을 소망이라고 부릅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소망도 필요합니다. 그런 생각만으로도 무언가를 다시 시작하고 또 기다릴 수 있는 마음이 회복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어떻습니까? 이런 소망은 항상 불안합니다. 보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엄밀하게 말하면 이런 소망은 ‘좋은’ 소망이 될 수 없습니다. 언제든지 우리를 더 좌절시키고 또 실망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참 소망, 그래서 진짜 좋은 소망이 되려면 소망은 소망이되 보장된 소망이어야 합니다. 단순한 기대나 긍정적인 추측이 아니라 틀림이 없는 분명한 것이어야 합니다. 현실 속에서는 눈앞의 현실보다 더 확실한 것이 없습니다. 현실적인 정보들을 통해서 내려진 현실적인 판단이 현실 속에서는 가장 정확한 판단입니다. 그렇지만 문제가 있습니다. 비록 현실이 가장 확실하다고는 하지만 우리에게는 애석하게도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의 것들, 현실 뒤에 숨겨진 진짜 중요한 현실을 볼 수 있는 눈이 없다는 것입니다. 또 그나마 그렇게 눈에 보여진 것들을 제대로 평가할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현실이나 현실이 주는 데이타를 통해서 얻어진 소망이라면 그 소망들은 불확실함을 벗어날 수 밖에 없습니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해 드릴까요? 역사를 살펴보면 몇 차례의 전세계적인 공황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주 역설적인 것은 그 공황들이 일어난 것은 언제나 경제학자들 이구동성으로 최고의 활황을 예측했을 때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양심적인 경제학자들은 예측은 하지만 그 예측이 맞을 것이라고 장담하지는 못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참된 소망은 이 세상에 속한, 현실에 속한 것이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만들어낸 소망이어서도 안됩니다. 그런 것들은 항상 불안하고 불확실할 수 밖에 없습니다. 참된 소망은 절대로 실패할 수 없는 것이어야만 합니다. 결코 좌절될 수 없는 것이어야만 합니다. 그래야, 그 소망을 품은 사람들이 실망하지 않고 좌절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소망을 품고 있는 동안에도 불안해 하거나 근심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런 소망이 현실과 나 자신으로 부터 나올 수 없다면, 그리고 우리 자신이 만들어 낼 수도 없는 것이라면 그런 소망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일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십니다.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으십니다. 또 변함없이 신실하시고 또 온전히 선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소망만이 진짜로 좋은 소망,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거나 좌절시키지 않는, 우리가 완전히 믿고 의지해도 좋은 소망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이런 소망을 주십니다. 땅에서 믿음을 지키고 거룩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자들에게 하늘의 영원한 영광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며 이 것을 소망하라고 하십니다. 회원 여러분, 성도에게 이 소망만큼 확실한 것은 없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으니 어떻게 아느냐구요? 어떻게 확신하느냐구요? 하나님 때문에 알 수 있습니다. 그 소망의 약속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충분히 확신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수 있다면 그 분이 주시는 소망도 얼마든지 마음대로 믿어도 좋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런 소망을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그런 소망을 붙들고 살아갈 수 있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회원 여러분, 우리는 실패할래야 실패할 수 없고, 좌절될래야 좌절될 수 없는 소망을 선물로 받은 사람들입니다. 지금 우리 안에는 이 소망이 있습니다. 영원히 변함없고 견고한, 하나님을 닮은 소망이 있습니다. 이런 소망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 저와 여러분들이라면 이 세상에 우리만큼 견고한 사람들이 또 있을까요? 우리만큼 든든하고 안전한 사람들이 또 있을까요? 우리 자신만 놓고 볼 때, 우리는 결코 환란을 당하고 고통을 당할 때, 나 중심이 되고 이기적이 되는 일을 막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선한 일을 하고 선한 말을 하기란 정말 어렵습니다. 고통은 자기만을 생각하게 하고 자신을 보호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우리의 주인되시는, 이 세상의 주인되시는, 그리고 모든 현실의 주인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십니다. 

또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영원히 무한히, 그리고 변함없이, 충분히 사랑하십니다. 단 하나 밖에 없는 자신이신 아들을 내어주실 정도로 사랑하셨으니 우리는 그 사랑을 의심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위로를 주십니다. 우리 속에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시는 성령님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에게 능력있는 위로, 변함없는 위로를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좋은 소망을 주십니다. 결코 실패하지 않을, 결코 취소되거나 좌절되지 않을 하늘영광에 대한 가장 좋은 약속과 소망을 주십니다. 

게다가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께서는 다름 아닌 나의 아버지이십니다. 그 분은 단순히 하나님으로서가 아니라 우리의 아버지로서 자녀들에게 이런 모든 선한 은혜들을 아낌없이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나만 생각하면 견고할 수 없습니다. 고난과 환란 중에서도 변함없이 선한 일을 하고 선한 말을 하는 일에 실패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예수님, 그리고 이런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로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힘들고 어려운 중에서도 충분히 흔들림 없이 선으로 악을 이기는 사람들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결론 :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회원 여러분,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 사람 모두가 다 예수를 믿는 것도 아니고, 또 믿는다고 해도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그들 사이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참된 믿음의 사람들은 그 삶의 자리가 어디이든 항상 어느 정도는 손해와 고통을 달고 다닐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현실입니다. 이 현실을 피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빨리 나의 현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렇지만 너무 비장해 지거나 엄숙해 질 필요는 없습니다. 이런 현실은 결코 우리에게 비관적인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아주 소중하고 흥분되는 기회가 됩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이유는 나중에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시려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가르친 선한 교훈을 잘 지켜야 하며, 하나님의 은혜의 힘으로 선한 말과 선한 일을 계속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믿음 때문에 당하는 어려움과 손해 속에서도 성부 성자 두 분이 주시는 강력한 은혜 속에서 흔들리지 않고 선으로 악을 이겨나간다면 그 일만큼 우리가 하늘에서 누릴 영광을 크게 해 줄 수 있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것만큼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을 가장 영광스럽게 해 드리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는 하늘의 상급을 쌓을 수 있는 너무 너무 좋은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오늘날처럼 보이는 것이 전부가 되어버린 세상에서 보이지 않는 하늘나라를 바라보고 소망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은 쉽지만은 않은 일입니다. 특히 그 나라에서 누리게 될 예수님의 영광에 대한 감각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더더욱 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모든 성도들을 향해 하늘나라를 침략을 하거나 전 재산을 다 팔아서라도, 심지어는 한 손과 눈을 포기하더라도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그 나라가 그만큼 엄청난 영광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 나라가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 차 있는 나라이며, 그 나라에 들어가야 우리도 그 분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데 있어서 그것을 받아 영원히 누리게 되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그 복, 그 영원한 그리스도의 영광을 놓치게 될까봐 말 그대로 안달이 났었습니다. 저는 여러분도 그렇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땅의 복이 아니라 그 나라의 영광을 놓치게 될까봐, 내 몫의 영광이 줄어들게 될까봐 안달하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한 안타까움과 욕심을 회복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욕심을, 그 안타까움을, 그 안달을 거룩한 삶을 위해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아름다운 삶의 열매를 맺는 밑거름으로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물론 거룩하게 살아가는 일, 선하고 아름답게 살아가는 일은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사도 바울의 기도로 기도하며, 두 분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힘입어 한 걸음 한 걸음 애쓰며 걸어간다면, 하나님께서는 거기에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실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해 주시고, 더 확실하고 좋은 하늘 소망으로 영원한 위로를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 능력으로 영원한 하늘영광,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을 준비를 하며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한 사람도 남김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거룩하게 살아서 그리스도의 영광으로 영원히 영광스러운 영생을 얻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약속 :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으로 거룩한 삶을 살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영광을 상으로 주신다. 


기도

  1. 내 안에 거룩한 삶에 대한 열정이 다시 회복되도록
  2. 내 안에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으려는 안타까운 마음과 욕심이 되살아나도록
  3. 눈에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눈에 보이는 것들보다 더 확실히 볼 수 있는 믿음을 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