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동부교회 설교/설교듣기

2011년 매일성경 설교 25. 아합이 죽은 후에


본문 : 열왕기하 1장 1-12절


서론 : 아합시대 역설의 의미

이스라엘이 남쪽 유다와 북쪽 이스라엘로 분열된 후, 두 나라에는 수많은 왕들이 세워졌다 넘어지고 나타났다 사라져 갔습니다. 그 왕들 중에는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왕들도 있었고 악한 왕들도 있었습니다. 북쪽 이스라엘의 왕들은 대개가 악한 왕들 쪽에 속했습니다. 처음에 한 번 잘못 세워진 전통을 끊어버리기가 그렇게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그 모든 왕들 중에서도 아합은 어찌 보면 하나님 보시기에 둘도 없는 악한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의 시대만큼 북쪽 이스라엘이 태평성대를 구가한 시대 또한 없었습니다. 물론 나봇의 포도원을 사악한 방법으로 빼앗은 후에 엘리야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보인 회개의 태도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그의 시대 동안에는 재앙을 내리지 않고 그의 아들 때에 그렇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그러시기도 했겠지만, 따지고 보면 그렇다고 해서 그의 시대가 최고의 번영의 시대가 되도록 내버려 둘 필요는 없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아합의 시대를 가장 번영한 강대한 나라가 되게 해 주셨습니다. 우리 생각에는 하나님은 그러시면 안될 것 같습니다. 잘못된 길을 가고 있으면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고 가르쳐 주시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잘 되던 일 잘 안되게 하시고, 병도 주시고 고통도 주셔서 억지로라도 그 길에서 돌이키도록 하셔야 합니다. 그런데, 아합의 시대는 계속해서 잘 되게 하셨습니다. 가장 악한 왕의 시대가 가장 번성하도록 내버려 두셨습니다.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혼란스러워하고 당황하기까지 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틀을 벗어나버리기 때문입니다. 물론 큰 틀에서 보면 하나님은 예측 가능하게 행동하시는 분이십니다. 싫고 좋은 것이 하나님만큼 분명한 분이 없어서 그 분을 기쁘하게 해 드리고 복을 받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좋은지, 또 어떻게 하면 그 분의 징계를 받게 되는지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우리가 하나님을 생각할 때 항상 생각해야 할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 틀 안에 갇혀계신 분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 부분이 우리를 당황하게 하고 혼란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혹은 우리의 삶을 통해서 이런 일을 만날 때, 그러한 당황과 혼란스러움 때문에 하나님을 향한 신뢰에 손해를 보아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그럴 때마다 두 가지 면에서 영적인 유익을 챙겨야 합니다.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의 선하시고 의로우심을 믿어야 합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선하시고 의로우신 분이시지만 그 분의 기준에서 그런 것이지 우리 기준에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가진 선함과 의로움에 대한 기준은 불완전합니다. 그리고 협소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 분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은 완전하시고 그래서 변함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 분은 이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얕은 지혜로 행하시지 않습니다. 불완전하고 죄가 관영한 이 세상에서 사탄의 계략을 완전히 부수시는 방법으로 일해가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당장 눈 앞의 목적을 위해서 움직여 가시지 않으십니다. 그 분은 항상 끝을 보고 일하십니다. 그러다 보니 당장 눈 앞의 것만 볼 수 있는 사람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결정을 내리시기도 하십니다. 때로는 악을 내버려 두십니다. 죄를 범하도록 허용하시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나중에 보면 오히려 그런 것들을 사용하셔서 오히려 더 완전하신 의와 선하심을 이루십니다. 우리는 때로는 우리가 보기에 불의한 상황, 그리고 앞뒤가 맞지 않는 그런 상황 속에서도 그래서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는 연습을 해 나가야 합니다. 

두번째로 우리는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왜 하나님이 하나님이냐라고 물으면 저는 하나님이 내 머리 속에 다 들어오시지 않으시니까 하나님이라고 대답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이해할 수가 없어서 하나님을 믿지 못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그런 이야기만큼 어리석은 이야기가 없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있는 분이 라면 그 분은 어떤 분이실까요? 아무리 크게 생각해도 내 머리보다 작은 분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가 왜 그런 하나님을 믿어야 하겠습니까? 그런 하나님이라면 믿을만한 가치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예측에 빗나가게 일하시는 그 부분이야 말로 오히려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가장 강하게 드러내는 부분이고 그래서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가장 겸손하게 만드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합의 시대는 참 이상한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아합시대의 그 이상함은 우리에게 아주 커다란 교훈 하나를 던져 줍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눈에 보이는 것을 모두 믿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잘 나간다고, 일이 잘 되어간다고 모두가 다 하나님이 기뻐하시셔 주시는 복은 아닙니다. 아합시대는 우리 눈에 보이는 것과는 다르게 정반대의 경우도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하나님과 가장 거리가 먼 시대인데도 겉으로는 그 시대가 가장 화려하고 번영한 시대가 되게 하실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이는 모습으로 판단하는 버릇을 가지고 있지만 실제로 단순히 겉으로 보여지는 사실들은 본질과는 별로 상관이 없을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겉모습으로 미루어서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거나 일이 잘 되고 성공하고 있다고 해서 그것을 섣불리 하나님이 상이라고 바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아합의 시대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일이 잘되어 간다고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고 생각할 때, 그 때 오히려 자신을 더 엄밀하고 냉정하게 볼 수 있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혹시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있는데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향과 반대로 가고 있는데도 외형적으로 성공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보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또 그 성공 의 겉모습 때문에 내가 가진 허물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성공 속에서 이런 것들을 생각하고 돌아볼 수 있다면, 성공은 우리에게 진정으로 유익하게 될 것입니다. 성공이 우리를 망치지도 않을 것이고, 또 성공 때문에 우리 자신의 참된 모습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며, 오히려 정말 있어야 할 제 자리로 돌아갈 가장 좋은 기회가 되어줄 것입니다. 

본문의 배경

아뭏든 이렇게 역설적인 아합시대가 지나고 아합의 뒤를 이어서 왕이 된 사람은 바로 아하시야였습니다. 열왕기하는 이 아하시야가 왕이 된 이야기로부터 시작하고 있는데, 그 첫 구절을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아합이 죽은 후에 모압이 이스라엘을 배반하였더라” 사실 모압이 이스라엘을 배반한 것은 아하시야 때가 아니라 그 다음 왕이 요람 때였습니다. 그런데도 열왕기하는 아하시야 왕부터 시작되는 뒷 이야기를 그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모압이 이스라엘을 배반한 것. 이것은 정치적으로 보면 다른 나라의 속국이 되어 있던 한 나라가 자신이 섬기던 나라가 혼란한 틈을 타서 독립선언을 한 것에 불과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입장에서 볼 때, 모압의 배반은 단지 정치적인 의미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영적인 의미가 더 큰 사건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모압을 꺾고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였습니다. 그러니까 그 모압이 이스라엘을 배반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그런 특별한 은혜가 이스라엘을 떠났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리고 모압의 배반은 단순히 하나의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앞으로 일어날 연쇄반응의 출발점이었습니다. 마치 도미노의 첫 번째 조각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첫번째 조각을 건드리셨습니다. 이제 도미노 전체가 무너지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 동안 아무리 공을 들여 쌓아놓고 화려하게 만들어 놓았다고 하더라도 마지막 조각까지 땅에 쓰러지는 것은 정말 시간문제였던 것입니다. 

사실 열왕기하 1장에 기록되어 있는 아하시야 왕의 죽음과 관련된 이야기는 모압이 이스라엘을 배반하기 전에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열왕기하가 아하시야의 이야기를 전해주면서 그의 통치기간에 그가 한 일이나 업적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고 그저 그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만을 아주 상세하게 늘어놓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한 왕국의 역사를 기록하면서, 그 왕국의 몰락의 시작을 이야기하면서 그 첫 왕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하는 것에는 깊은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정점에서 밑바닥으로

아하시야는 왕이 된지 채 2년이 지나기도 전에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왕궁의 높은 난간에서 떨어져 중병을 얻었고, 결국 회복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이야기의 앞쪽 절반정도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어쩌다 그렇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아하시야는 왕궁의 높은 건물에서 추락하여 중병을 얻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들의 이름이 다 마찬가지이지만 아하시야의 이름에도 특별한 뜻이 있습니다. 아하시야는 “여호와께서 붙드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붙드셨던 사람이 궁전의 높은 곳에서 떨어져 내립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되었을까요? 하나님께서 그 붙드셨던 손을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왕궁의 가장 높은 곳에서 떨어졌습니다. 그 동안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붙잡아 주셨습니다. 아뭏든 이스라엘을 붙들어서 가장 높은 정점에 이르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스라엘은 그 정점에서 추락하기 시작합니다. 모압을 제압하고 조공을 받을 정도로 막강한 힘을 자랑했지만 그런 화려한 역사는 계속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붙드셨던 그 손을 놓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천하의 북이스라엘 왕이 그 영광의 상징인 자기 왕궁의 가장 높은 곳에서 떨어져 내려 병상에 누워 생사를 가늠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듯이, 이스라엘 또한 자기 역사의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에 떨어져 내려 중상을 입어 생사를 가늠할 수 없는 신세가 될 것입니다. 물론 현실적으로 아직은 그런 상태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 추락은 이제 곳 시작될 것입니다. 모압이 반역은 그 추락을 알리는 그 신호탄이 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아하시야는 그 동안 자신을 붙잡아 왔고, 또 이스라엘을 붙잡아 주었던 것이 무엇인지를 몰랐습니다. 이스라엘은 자신을 가장 높은 곳에 올려주고 거기서 떨어지지 않게 붙들어 주었던 존재가 누구인지를 까맣게 잊고 말았습니다. ‘여호와께서 붙드셨다’는 은혜로운 이름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하나님과 다투었다’는 영광스러운 이름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말입니다. 이름은 있으되 그 이름의 내용은 모두 상실해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런 것을 일컬어 영적인 기억상실증이라고 합니다. 형식적으로는 동일합니다. 여전히 아하시야고 여전히 이스라엘입니다. 여전히 크리스챤이라고 불리고 여전히 성도라고 불립니다. 이름에는 변한 것이 없습니다. 나 자신도 남들도 다 그 이름으로 나를 부릅니다. 그러나, 그 말이 의미하는 바를 전혀 모릅니다. 자기 이름이 무슨 뜻인지를 모릅니다. 그 그릇 안의 내용을 모두 쏟아버리고 만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났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져 주셔야만 이스라엘은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붙들어 주셔야만 아하시야는 서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그들이 하나님을 잃어버렸으니 그들에게 남은 일은 너무나도 분명합니다. 이제는 떨어져 내리는 것 밖에, 그리고 생사를 가늠할 수 없는 심각한 상태에 빠지는 것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미 그렇게 하나님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살겠느냐고, 어떻게 하면 그 병에서 고침을 받고 다시 건강해질 수 있느냐고 하나님께 묻지 않습니다. 그 대신 바알세붑에게 달려갑니다. 바알세붑에게 살지 죽을지를 묻습니다. 바알 세붑은 파리 신입니다. 파리 하나님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파리는 더럽습니다. 불결합니다. 그래서 질병을 옮깁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이 파리를 질병을 관할하는 신으로 여기게 되고 그것을 형상화 해서 바알 중의 하나로 섬기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리니 모든 것이 하나님이 됩니다. 심지어는 파리도 하나님이 됩니다. 만유의 주이신 하나님, 세상 모든 만물과 생명, 그리고 온 세상을 만드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떠나게 되니 파리에게 하나님의 자리를 내어주고, 그 파리를 의지해서 자신의 운명과 안전을 보장받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났다면, 적어도 하나님 만큼은 되는 신을 그 자리에 세워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비슷하기는 커녕 하나님의 피조물 중에서 가장 보잘 것 없고 더러운 파리를 그 자리에 앉히고 그 파리를 의지해서 살려고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보이는 어리석고 역설적인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떠나고 하나님을 버린 인간이 그렇게 해서 겨우 섬기고 의지하게 되는 것은 뭐 별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떠나는 인간에게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줄 수 있다고 생각되는 것은 그 무엇이든 하나님이 될 수 있습니다. 돈이 힘이 있다고 생각하면 돈을 하나님으로 섬깁니다. 건강이 최고라고 생각하면 건강을 우상으로 만듭니다. 지식이 최고라고 생각하면 지식을 목적으로 삼습니다. 파리가 건강을 준다고 생각하면 파리까지 섬기게 됩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정말 우습기 짝이 없는 것들인데도 그것을 받들어 섬기기에 여념이 없어집니다. 

이것은 인간 스스로의 입장에서도 참 비참한 일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하게 하나님을 닮은 형상인 인간이 자신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낮은 ‘이용하고 다스려야 할 것들’을 신으로 섬기며 그것을 두려워하며 거기 의지하고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일은 우리들에게 비참한 일인 것 이상으로 하나님께는 더 큰 불명예가 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만드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의 주인이시며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그 모든 것들이 목적으로 삼아야만 하는 그런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런 분이 돈 보다 지식보다 명성보다 건강보다 심지어는 파리보다도 못한 존재로 취급을 받습니다. 하나님께 이것보다 더 자존심 상하는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것보다 하나님께 악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래서 무언가를 하나님 위에 놓고 하나님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며 또 섬기는 일은 하나님께 그 어떤 일보다도 큰 모독이 되며 그래서 가장 큰 죄악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형선고와 그 의미

하나님께서 잡은 손을 놓으셔서 만신창이가 된 아하시야는 자신의 운명을 점치게 하려고 부하들을 바알세붑에게 보냅니다. 하나님께서 잡았던 손을 놓으시면 어떻게 되는 지를 보여주려고, 그래서 그걸 보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높은 데서 떨어뜨리셨더니 오히려 파리 신에게 부하들을 보낸 것입니다. 하나님은 극도로 화가 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하나님의 ‘심복’을 보냅니다. 디셉 사람 엘리야입니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통해서 아하시야에게 사망선고를 내리게 하십니다.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너희가 에그론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러 가느냐 그러므로 네가 올라간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할지라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이 이야기를 전해들었지만 아하시야는 전혀 변하지 않습니다. 그제라도 “아, 그렇구나. 이스라엘에게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계시지.”라고 생각하며 돌이키고 태도를 바꾸었다면 이 이야기는 해피앤딩으로 끝났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추락은 또 한 번 연기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하시야는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자신에게 그러한 하나님의 뜻을 전한 사람이 디셉 사람 엘리야라는 것을 알았으면서도 태도를 바꾸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하기에는 너무 멀리 와 버린 것입니다. 이제는 그 정도의 영적인 감각조차 남아있지 못했던 것입니다. 사실 아합은 무지 무지 악했고, 하나님 앞에서 악행이란 악행은 다 저질렀지만 단 한 번 보인 진실한 회개의 모습 때문에 하나님의 긍휼 가운데 거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하시야는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엘리야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엘리야가 아버지 아합과 대결할 때, 그 모든 상황을 똑똑히 지켜보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겉모습에 대한 작은 정보만 듣고도 그가 엘리야라는 것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엘리야를 알건 모르건, 그리고 엘리야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건 모르건 그에게 달라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비록 엘리야가 자신에게 하나님의 사형선고를 전했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미 그에게는 하나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파리만도 못하게 여기는 그였고, 그래서 하나님을 완전히 떠난 그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그 하나님의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하는 것은 이미 전혀 중요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잘못을 저지를 수도 있습니다. 일시적으로는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무언가 자신의 삶과 주변에 문제가 생겼을 때는, 특히 어떤 방식으로든 하나님의 경고의 메시지가 들려올 때는 그것만큼은 놓치지 않을 수 있는 영적인 감각이 살아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돌이킬 수 있고 기회를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항상 기억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너무 멀리가면 다시는 돌이킬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죄에는 관성과 타성이 있기 때문에 너무 멀리가면 지나치게 나가면 나중에는 돌이킬 마음이 있어도 마음대로 되질 않습니다. 그게 죄의 무서움이고 하나님을 떠나는 일의 위험성입니다. 떠날 때는 마음대로라도 돌아올 때는 마음대로가 아니라는 것 말입니다. 

사실 아하시야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사형선고는 그의 마지막을 이야기하는 것이기도 했지만 그래도 한 번 더 허락하신 마지막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죽을 것이다’라는 선고를 들었어도 하나님께로 온전히 돌이키기만 한다면 오히려 그는 치료를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를 떨어지도록 내버려 두신 것도 그리고 중병에 걸리도록 하신 것이 하나님이시듯이 그를 낫게 하실 분은 하나님 밖에 없고, 또 하나님은 돌아오는 사람을 마다하지 않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나님 앞에 늦는다는 것은 없습니다. 아무리 사형선고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그 자리에서 진심으로 돌이키면 용서해 주십니다. 기회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얻은 기회를 잘 사용하면 다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평안한 자리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하시야의 반응, 이스라엘의 반응

아하시야는 무릎을 꿇고 회개하는 대신에 부하를 시켜서 엘리야를 데리고 오라고 합니다. 그런 선고를 내린 것이 기분 나쁘고 화가 났던 것입니다. 회원 여러분, 우상과 하나님의 가장 큰 차이가 무엇일까요? 우상은 내가 원하는 소리를 해 주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가장 큰 차이 중의 하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쓴 소리도 들을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단 소리보다는 쓴 소리를 더 많이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이러한 쓴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혼내는 소리이고, 잘못을 지적하는 소리이니 그럴 수 밖에 없을 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 더 그런 싫은 소리도 들을 수 있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정당한 쓴 소리라면 귀를 기울여 들을 수 있는 그런 연습 말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결정적인 메시지, 하나님의 마지막 메시지도 놓치게 될 지도 모릅니다. 

아하시야는 자신의 부하를 50명씩이나 보냈습니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말입니다. 아마도 위압감을 주려고 그랬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두 번의 시도는 모두 엄청난 비극으로 끝나버리고 말았습니다. 두 번 다 하늘에서 불이 떨어져서 그들을 모두 살라 죽여버렸던 것입니다. 그렇게 죽은 사람들의 태도는 모두 같았습니다. 입으로는 엘리야를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부르면서도 엘리야를 존중하거나 혹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종 앞에서 사람의 종, 그것도 자신의 운명도 알지 못하는 병든 사람의 종들이 거드름을 피운 것입니다. 

엘리야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만일 하나님의 사람이면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너와 너의 오십 인을 사를 지로다” 만약 엘리야의 말대로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 사람들을 태워버린다면 그것을 통해 적어도 세 가지가 증명되는 셈입니다. 하나는 엘리야가 분명한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께서 그 엘리야와 함께 계시며 그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신지가 증명되는 셈입니다. 엘리야의 말대로 하늘에서 불이 내려왔고 그래서 첫번째 오십 명을 살라버렸습니다. 이 쯤되면 아하시야도 알아들어야 합니다.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하며, 그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에그론의 바알세붑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다시 한 번 50명을 더 보냅니다. 아하시야도 달라진 것이 없었지만 이 사람들 또한 지난 번의 50명의 비극을 듣고도 전혀 겸손해 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들의 운명 또한 첫번째 50명과 같아졌다고 말했습니다. 아하시야나 그의 부하들이나 꼭같은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이제 이스라엘에는 엘리야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이 증명되어도, 그래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분명히 보여 주어도 그런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 지고 돌아올 사람이 거의 남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은 의인 열 명이 없어 멸망했던 소돔과 고모라와 같아져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이스라엘에는 그 누구도 이스라엘이 떨어지고 병들과 병상에서 죽어가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사람들이 없어져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론 : 내 경험을 유보상태로 바라보자. 

우리가 하나님의 뜻과 일하시는 방식을 다 알 수 없다고 해도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있는 하나님께 대한 변하지 않은 진실이 있습니다. 그 분은 언제나 그 분의 백성들이 제 자리로 돌아와서 하나님의 진노가 아닌 긍휼히 여기심 속에서 살아가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끊임없이 기회를 주시고 또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잡은 손을 거두어 들이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그 일만큼은 행하지 않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시면서 이런 저런 모양으로 우리를 경고하시곤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정죄하심은 심판하시기 위한 정죄하심이 아니며, 우리에게 쓴 소리를 하시는 것은 그저 화가 나서 그러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 또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더 늦기 전에 너무 멀리 가기 전에 돌아오라는 부르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경고, 그리고 하나님의 쓴 소리를 잘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모든 어려움과 고통이 다 하나님의 경고나 벌주심이 아니지,만 그런 일들을 통해서 자신을 살피는 일은 여전히 유익하며, 그래서 우리는 그 감각을 잃어버려서는 안됩니다. 우리 영혼이 거기까지 가도록 방치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려면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에 속아서는 안됩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 생길 때, 하나님이 나를 버리시고 벌 주신다고 지레 짐작할 필요도 없고, 잘 되고 잘 나간다고 해서 그것을 섣불리 내 신앙과 삶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증거라고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땅에서 우리가 경험하며 사는 모든 일들은 사실 우리가 그 의미를 완전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모든 일들을 유보상태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무슨 일이든 그것을 더 하나님을 사랑하고 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기회라고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긴장을 유지한다는 것이 절대로 쉬운 것이 아니지만 그래도 영적으로 굉장히 유익한 것입니다. 적어도 우리가 하나님의 손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을 막아주고, 영적으로 중병에 걸리는 일을 막아주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겸손하게 하며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이제 눈에 보이는 것이 다라고 믿지 마시기 바랍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 보면 쉽게 안심하거나 쉽게 낙망할 수 있습니다. 무슨 일이든 그 일을 통해서 나 자신을 살피는 연습을 하시고, 하나님을 더 온전히 사랑하는 기회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내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그리고 어디에 있는지를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절대로 그 정도로 무감각해져서는 안됩니다. 항상 모든 일들 속에서 소중한 메시지를 보내오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놓치지 않아서 언제나 하나님 곁에 머물며,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거하시는 은혜를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약속 : 우리가 눈에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집중할 때, 하나님은 항상 나를 받아주시고 회복시켜 주신다. 


  1. 나의 성공이나 실패, 길흉에 너무 좌우되지 말게 해 달라고. 항상 보이는 것 속에서 보이지 않는 더 소중한 것을 찾아낼 수 있게 해 달라고.
  2. 나를 향한 쓴 소리를 달게 여기는 열리고 부드러운 마음을 잃어버리지 않게 해 달라고.
  3. 적어도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 그리고 어디에 있는지는 볼 수 있는 감각을 잃어버리지 않게 해 달라고. 그래서, 하나님으로 부터 멀리 가지 않게 해 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