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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교회 설교/설교듣기

2011년 매일성경 설교 35.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

날짜 : 2011-10-02

본문 : 사도행전 18장 24절 - 19장 7절


서론 : 복음을 완전하게 하시는 하나님

우리는 성경의 인물들과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긍정적인 사건들을 읽을 때면, 자꾸 그 사람이 불완전한 현실 속에서 살아갔던 불완전한 사람이었다는 사실과 그 사건들 또한 그런 불완전한 현실 속에서 일어났던 일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게 되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그런 기록들이 성경책 속에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 속에 완전한 것이 없듯이 성경의 인물들과 사건들 또한 현실에 속해있었다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성경 속의 사람이나 사건이 완전할 수는 없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초대교회 당시 복음이 전해지는 것도 그랬습니다. 처음 복음이 전해질 때, 완전한 복음이 그 어떤 오류나 한계도 없이 일시에 확 퍼져나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복음은 하나였고 그 복음자체는 완전한 것이었지만 그 복음을 전한 사람은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럿이었고, 그 모든 사람들이 복음에 대해서 알고 믿고 또 전하는 수준이 다 달랐습니다. 게다가 그 복음은 그 동안 살아왔던 경험과 지적인 능력이 다 다른 각각의 사람들에게 전해진 것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그것에 대해서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것은 더더욱 다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복음이 항상 사람들을 구원하지 못할 정도로 불완전하게 전해지는 것은 아니었고 혹시 그렇게 전해진 경우라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 그 복음이 더 온전하게 들려지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다른 지식과 학문과는 다른 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이 복음을 부족하고 불완전하게 전하면 다른 사람을 통해서라도 그 복음이 제대로 전해질 수 있는 기회를 만드십니다. 그래서 그 복음을 더 완전하게 전해지게 하십니다. 

저는 이것이 바로 복음을 전하는 성도들, 그리고 저처럼 가르치고 설교하는 목회자들이 꼭 믿고 신뢰해야할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우리가 이해하고 또 전하는 것이 항상 불완전하고 한계가 있게 마련이고 우리는 그 불완전함을 채워가려고 노력해야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불완전한 것이라고 해서 사용하시지 못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불완전함도 그 수준에서 사용하십니다. 우리에게 하나님과 그 분의 영광을 위하는 진심, 영혼을 생각하는 진심만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불완전함도 귀하게 사용하실 수 있고 또 사용하십니다. 그런 우리들까지도 더 온전하게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두 개의 이야기들도 바로 그런 이야기들입니다. 

에피소드 1. 아볼로 이야기

그 첫번째 이야기는 아볼로의 이야기입니다. 24절을 보면 성경은 아볼로에 대해서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한 자라” 아볼로는 알렉산드리아 출신이었습니다. 당시 알렉산드리아라고 하면 학문의 중심지였습니다. 거기서 나고 자란 아볼로는 그러한 지적인 환경 속에서 당시 최고의 학문이었던 철학을 많이 공부했고, 거기다가 유대인으로서 구약성경에도 아주 정통한 사람이었습니다. 비유하자면 바울과 매우 비슷한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아볼로가 어떤 경로를 통해 복음을 전해듣게 되었고, 복음이야 말로 구약에 나오는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라는 것을 믿게 됩니다. 당연히 아볼로는 그 복음을 전하는 일에 헌신했고 그것을 위해서 이 도시 저 도시를 돌아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도착한 곳이 바로 에베소였고 오늘 본문은 거기서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철학과 성경에 능통하며 언변도 탁월한 아볼로는 당시의 이방 세계에 복음을 전하기 위한 최고의 무기를 모두 갖춘 셈이었고, 이것은 실제로 복음 전파를 위해 아주 귀하게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에베소에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머물고 있었는데, 당연히 아볼로가 전하는 복음을 듣게 되었습니다. 물론 아볼로의 메시지는 아주 훌륭했고 또 영향력도 컸지만 적어도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두 사람에게는 그가 전하는 복음이 아주 중요한 점에서 미흡한 것이었습니다. 

25절은 ‘그가 일찍 주의 도를 배워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볼로는 복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복음에 대한 열정도 있었습니다. 그 복음에 대해서 구약을 근거로 해서 자세하게 설명할 수 있을만큼의 충분한 지식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요한의 세례”밖에 모른다는 치명적인 한계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가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몰랐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가 “예수의 이름으로받는 세례”를 가르치지 않았다는 것은 그는 여전히 진짜로 그리스도에게 속하는 것과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인 성령을 알지 못했고 그것을 가르칠 수 없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아볼로가 전한 메시지가 아볼로 자신의 수준에서는 흠잡을 것 없을 정도로 완벽했을지 몰라도 그 복음 전체를 더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들이 듣기에는 부족하게 여겨질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아볼로를 따로 불러서 자신이 알고 있는 더 온전한 복음을 자세하고 정확하게 알려 주었습니다. 그리고 아볼로는 그렇게 더 온전한 복음을 듣고 배워서 불완전하게 알고 있는 복음을 더 온전하게 만들 수 있었습니다. 이 일은 복음 전도자인 아볼로에게는 날개를 단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렇게 더 온전한 복음을 배운 아볼로는 에베소를 떠나 아가야 지역으로 갔습니다. 

아가야에 도착한 아볼로는 근본적으로 보면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였지만 아가야의 성도들에게 아주 큰 유익을 주었습니다. 그가 끼친 유익은 “성경으로써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거하여 공중 앞에서 유력하게 유대인의 말을 이긴 것”이었습니다. 당시 아가야 지역의 성도들은 유대인들의 공격에 수세에 몰려 있었고 신앙적인 어려움에 처해 있었습니다. 복음에 대한 유대인들의 공격에 대해서 복음의 확실함을 증명해 줄 실력있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때 그들 앞에 나타난 아볼로는 더운 여름날에 얼음냉수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곧바로 유대인들과 논쟁을 벌이기 시작했고, 압승을 거두었습니다. 그가 익히 알고 있던 구약성경지식과 에베소에서 배운 정확한 복음, 그리고 깊은 학문에서 오는 논리정연함... 이 모든 것들이 강력한 무기가 되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메시야로 증명해 보여서 공격자들을 납작하게 만든 것입니다. 

에피소드 2. 어떤 제자들 이야기

두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은, 성경이 ‘어떤 제자들’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입니다. 아볼로가 에베소를 떠나 고린도로 갔을 때, 바울은 에베소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그 때 에베소에는 ‘어떤 제자들’이 와 있었습니다. 이들은 자기들도 세례를 받은 신자이며 제자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의 주장 속에서 뭔가 부족함을 발견한 바울은 그들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너희가 계속 믿는다고 주장하는데, 너희들은 그 믿음으로 충분하다고 주장하는데, 그렇다면 너희가 믿는다고 주장하는 그것을 믿을 때 성령님을 선물로 받았느냐?” 이 질문은 그 ‘어떤 제자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 이 말은 물론 아얘 성령자체를 모른다는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이 말은 ‘믿으면 성령을 주신다는 이야기를 전혀 듣지 못했다’는 뜻으로 한 이야기였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또 묻습니다. “그렇다면 너희는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그러자 그들은 ‘요한의 세례’라고 대답합니다. 분명히 이들은 듣고 믿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들은 것은 복음이 아니라 세례 요한의 회개의 메세지였고, 그들이 세례를 받은 것은 요한으로부터 였으며, 그들은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었던 것입니다. 요한은 회개하고 하나님을 신뢰하라고만 했으니 그들이 예수님과 성령님을 모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바울은 그런 그들에게 세례 요한이 자신의 뒤에 오실 이를 믿으라고 하지 않았느냐고 하면서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그 복음을 믿고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할 때, 그들에게도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성령님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이 사람들은 약 열 두 명쯤 되었는데 이렇게 해서 이들도 참되고 온전한 복음을 듣고 참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었습니다. 

두 이야기의 교훈

앞서 말씀드린 대로 두 이야기는 불완전한 복음이 더 완전하게 전해지고, 불완전한 믿음이 더 완전해져 가는 것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복음은 완전합니다. 하나님의 진리도 완전합니다. 그 안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불완전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가지는 복음에 대한 지식도 불완전하고 그 복음을 믿는 믿음도 불완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진리를 알고 그 진리를 믿는 데에는 ‘다 되었다’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거기에는 결코 ‘이만하면 충분하다’는 말을 적용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볼로는 학문에도 능통하고 구약성경에 대해서도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복음을 들었습니다. 이내 그의 마음은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열정으로 불타올랐고 그래서 여기 저기 다니며 자신이 아는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는 분명히 자신이 아는 것으로, 그리고 자신이 믿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렇게 열정적으로 확신있게 복음을 전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아볼로가 ‘복음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저 열정에 북받쳐서 “예수 믿으세요. 예수 믿고 천국가세요.”라고만 외치고 다닌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전한 복음은 아주 상세했습니다. 그만큼 자신이 알고 믿고 또 전하는 복음에 문제가 있다고 여기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제대로 그리고 더 정확하게 아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의 복음이 자세하기는 했지만 정확하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26절에 보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아볼로에게 하나님의 도를 더 자세히 풀어 일렀다고 하는데, 여기서 ‘자세히’라는 말은 원래 ‘정확히’라고 번역해야 하는 단어입니다. 

자세하다고 다 정확한 것은 아닙니다. 일정한 틀 안에서는 다 말이 되고 앞뒤가 맞아서 문제가 없는 것 같지만 진짜 전문가가 보면 틀리는 것, 정확하지 않은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예를 든다면 감자와 고구마에 대한 우리의 지식 같은 것입니다. 저는 예전에 감자가 고구마보다 달지는 않지만 열량이 높아서 다이어트에는 감자보다 고구마가 더 좋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왜 고구마가 더 단데 감자가 열량이 높은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하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이야기하길래 그런 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어떤 집사님께서 그게 아니라고 아주 강하게 주장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사실은 거꾸로이고 그래서 다이어트에는 감자가 더 좋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아얘 제가 직접 찾아보았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감자가 고구마 보다 훨씬 당분이 적습니다. 당연히 열량도 훨씬 낫구요. 그렇지만 이상하게도 다이어트에는 고구마가 훨씬 더 유리합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감자는 100그램당 14그램의 당질을 포함하고 있고 66킬로칼로리의 열량을 가지고 있습니다. 반면 고구마는 100그램당 30.3그램의 당질이 포함되어 있고 128킬로칼로리입니다. 이렇게만 보면 고구마가 감자보다 거의 두 배가 넘는 열량을 포함하고 있어서 훨씬 더 살이 찌게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까지만 가서는 이 지식이 완전하지 않습니다. 이 지식이 완전해 지려면 여기에 ‘당지수’라는 개념이 포함되어야 합니다. 당지수는 어떤 음식이 얼마나 빠르게 포도당으로 바뀌어서 다시 지방이 되는가를 나타내는 기준인데, 감자는 이 당지수가 85이고 고구마는 55이고, 감자는 대부분이 탄수화물로 되어 있지만 고구마에는 무기질과 비타민 그리고 섬유질이 많이 포함되어 있어서 다이어트에는 고구마가 훨씬 유리하다고 합니다. 이야기는 처음 알고 있었던 이야기가 맞지만 맞다고 정확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세상에는 맞지만 틀리는 것도 있고, 또 맞지만 불완전하고 정확하지 않은 것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그저 내 한계 안에서만 정확한 나만의 진리인 것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아볼로는 어찌보면 스스로도 전문가라고 확신하기에 충분한 사람이었습니다. 일반학문, 구약성경 할 것 없이 두루 정통해 있었고, 자기가 아는 것을 조리있게 전할 수 있는 능력까지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알게 된 복음은 그가 전해들은 것이 유일했으니 그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복음의 전부라고 여길 수 밖에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에게 배웠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아주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직업이 천막을 만들고 고쳐주는 일이었으니 분명히 특별할 것 없는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구약을 아는 지식도, 일반 학문도 아볼로보다는 많이 떨어지는 사람들일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보면 전문가인 아볼로, 훨씬 더 탁월한 아볼로가 비전문가인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인정하며 그들에게 복음에 대해 배웠던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아볼로는 어느날 갑자기 아볼로가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볼로가 우리가 아는 아볼로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런 과정을 통해서 였고, 그가 더 능력있는 복음전도자와 목회자가 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런 과정을 통해서 였습니다. 만약 이 과정이 없었다면 그는 다른 사람을 구원하고 양육하기는 커녕 자기 자신도 온전치 못한 복음을 믿는데서 끝나고 말았을 것입니다. 

바울이 만났던 어떤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이 스스로를 제자라고 소개하면서 이 도시 저 도시를 돌아다녔다는 것은 이들 또한 자기가 알고 또 믿는 바가 전부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들에게는 세례 요한의 가르침이 아주 획기적이라고 여겨졌을 것이고 그래서 그것을 전하기 위해서 그의 제자로 자처하며 전도활동에 헌신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전하는 내용에 문제가 있다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당당히 자신들을 제자들이라고 소개할 정도였으니 자기들이 알고 믿고 또 전하는 것이 충분하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게 되고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야 하며, 성령을 선물로 받아야 한다는 것을 듣게 됩니다. 이 제자들은 바울의 말에 순종합니다. 그리스도를 믿게 되고 또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됩니다. 

이들에게도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일은 그렇게 쉽고 당연한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자신이 알고 믿는 바를 전하기 위해서 생업을 포기하고 그렇게 순회사역을 하고 있다면 적어도 이들에게 있어서 자신들이 아는 진리는 그만큼 정확하고 절대적일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에게 새로 들려온 복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런 것들을 다 내려놓는 것을 의미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자기 껍데기를 깨는 수고를 감당했을 때, 그들은 이전에 자신들이 알지 못했던 진짜를 발견하게 되고 이제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결론 : ‘요한의 세례’를 넘어서서

저는 오늘 본문을 읽고 묵상하는 내내 본문에 나오는 한 두 단어를 많이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요한의 세례”라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본문은 아볼로와 어떤 제자들에 대해서 공통된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 모두가 “세례 요한의 세례”밖에 모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요한의 세례 “밖에” 모르고 있었다는 것은 그들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그들이 아는 전부였고 그들은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확신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 기간이 길어지면 점점 우리가 믿는 바에 대해서 이런 저런 아는 것들이 늘어나게 됩니다. 처음에는 마냥 새롭고 좋지만 나중에는 솔직히 설교시간에 들려오는 이야기들도 다 그게 그거 같고 새로운 것이 별로 없다고 느껴집니다. 그러다 보면 우리는 우리 자신도 모르게 “아, 나는 이 정도면 충분하다.” “나는 더 이상 배울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빠지게 됩니다. 물론 직접 물어보면 절대로 그렇게 대답하지 않습니다. 나는 아무 것도 모른다고 아직 멀었다고 대답합니다. 하지만 실제의 삶에서 보여지는 모습은 정반대인 경우가 많습니다. 더 배운다는 것 자체를 자존심 상해하고 그런 이야기를 하면 언쨚아 하기도 합니다.  알아야 한다고, 배워야 한다고 말해도 별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언젠가도 말씀드렸지만 신앙의 성장은 마치 윗계단에서는 아랫계단이 훤히 보이지만 아랫계단에서는 윗계단이 전혀 보이지 않아서 지금 자기가 서 있는 계단이 가장 높은 계단같이 여겨지는 그런 계단을 오르는 것과도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성도들이 자기도 모르게 자기가 알고 또 믿는 것이 신앙이라는 세계의 전부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죠. 

그러나, 우리가 아는 것과 믿는 것은 전부일 수가 없고 그것으로 충분하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언제나 아볼로와 어떤 제자들이 알았던 ‘요한의 세례’와도 같습니다. 우리에게는 그것이 우리가 아는 전부이지만 그것이 때로는 정말 아무 것도 아닌, 진짜에는 아직 가까이 가지도 못한 그런 것일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 다음 계단에 오를 때까지는 그 사실을 깨닫기가 정말 힘들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신앙생활에 대해서 항상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신앙생활은 어찌보면 아직 올라가야 할 봉우리가 끝없이 남아있는 그런 산맥을 오르는 것과도 같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최종목표지점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는데 있어서도, 믿는데 있어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수준에 이르기를 끊임없이 요구받고 있는 그런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우리의 앎과 믿음을 성장시켜 갈 수 밖에 없습니다. 저는 오늘 저와 함께 이 길을 가야만 하는 여러분에게 “그가 주의 도를 배워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라는 구절을 기억하시며 계속 묵상하시기를 권면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 모두를 ‘내가 알고 믿는 것은 항상 요한의 세례에 불과하다’라고 생각할 줄 아는 겸손한 사고방식으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초대에 응해야 합니다. 이런 사고방식이야 말로 우리를 계속해서 성장하게 하고 또 성숙하게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사고방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사실 아닌 것을 그저 그렇게 여기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실이기 때문에 사실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아는 것과 믿는 것은 언제나 ‘요한의 세례’에 불과할 수 밖에 없습니다. 더 깊은 진짜, 더 온전한 진짜는 항상 저 위에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줄탁동시’라는 말이 있습니다. 병아리가 알을 깨고 세상으로 나오려면 병아리는 안에서 그리고 어미 닭은 밖에서 그 껍데기를 쪼아 주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 또한 자신이 살고 있는 좁은 세상을 나와서 더 온전한 영적인 성장을 향해 가려면 자기 밖으로 부터 들려오는 진리에 대해서 자신의 전부일지도 모를 껍데기를 깨려는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 밖에서 우리의 껍데기를 쪼고 계십니다. 너도 함께 그 껍데기를 쪼아서 깨뜨리고 빨리 더 넓고 온전한 믿음의 세상으로 나아오라고 그 분의 진리로 우리의 단단한 껍데기를 쪼고 계십니다. 우리가 그 초청에 올바로 응답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 더욱 더 귀하고 온전하게 쓰임받게 될 것이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써 더 든든한 확신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항상 우리에게 아볼로와 어떤 제자들에게 주셨던 메시지를 듣게 하심으로써 복음과 진리를 더 온전히 알고 또 믿는데서 더 성숙한 자들로 자라가며 또 더 온전하게 쓰임받는 은혜를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