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동부교회 설교/설교듣기

2011년 매일성경 설교 38. 로마로 가니라

날짜 : 2011-10-23

본문 : 사도행전 28장 1-15절


서론 : 또 다시 버스 안에서

지난 주일에는 우리에게는 우리가 흔들릴 때, 든든하게 붙들 수 있는 손잡이들이 여러 개가 있는데, 그 중의 한 가지가 바로 소명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소명은 우리가 넘어질 수 밖에 없을 때, 넘어지는 것을 막아주며, 우리가 심하게 흔들릴 때 다시 균형을 잡고 서게 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오늘도 본문을 통해서 우리들의 삶을 지탱해 주고 든든히 세워줄 손잡이를 하나 더 소개해 드릴텐데, 제가 일단 손잡이라고 표현하기는 했지만 실제로는 손잡이가 아니라 기둥이나 기초라고 생각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지난 주일의 그 버스 안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지난 주일 그 사람이 탔던 버스 안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그 사람이 탔던 버스에는 몇몇 사람이 더 타고 있었습니다. 버스가 조금씩 흔들리는 가운데 저마다 함께 동승한 사람들과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버스가 갑자기 심하게 흔들렸습니다. 너무 당황한 우리의 주인공은 얼른 손을 뻗어서 손잡이를 잡았습니다. 와당탕 넘어지는 것을 겨우 모면하고나서 정말 다행이라고 한숨을 돌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버스 안에는 조금 이상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버스가 흔들리는데도 놀라는 기색도 전혀 없었고 차바닥으로 우당탕 넘어졌으면서도 그냥 그 자리에 앉아 있서 깔깔대며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이 사람들이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들이라면 과연 이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이 질문을 가지고 함께 가 보겠습니다. 

멜리데섬에서 로마까지

15일간의 생사를 넘나드는 표류 끝에 바울을 태운 배는 멜리데라는 섬에 걸리게 됩니다. 다행히 그 섬 사람들은 성품이 좋고 친절한 사람들이어서 그렇게 난파된 사람들을 모두 따뜻하게 환영했습니다. 비바람을 뚫고 겨우 섬에 도착한 터라 배에 탔던 사람들은 모두 비맞은 생쥐꼴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게다가 아무리 지중해라고 해도 겨울이었으니 그들이 느끼는 추위는 정말 대단했을 것입니다. 엎친데 덮친다고 다시 비가 내리고 기온이 더 떨어집니다. 그래서 섬 사람들은 그들을 위해서 모닥불을 피워주었습니다. 바울은 나무를 한움큼 쥐어 그 모닥불에 넣으려고 했습니다. 그 순간 아주 긴급한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그 나무 속에서 독사가 한 마리 기어나와 바울의 손을 덥썩 물었던 것입니다. 그 섬 사람들은 그 독사가 얼마나 무서운 독사인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 뱀은 한 번 물리면 금방 목숨을 잃게 되는 치명적인 독을 가진 뱀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이미 바울이 죄수라는 것을 알고서는 바울에 대해서 이렇게 추측합니다. “저 사람은 분명히 살인자일꺼다. 어찌 어찌해서 폭풍 속에서는 살아남을 수 있었지만 정의의 여신이 이렇게 보응을 해서 여기서 죽게하는 것을 보니 살인자가 틀림없다.” 그러나, 상식대로라면 금방 몸에 독이 퍼질 것이고, 그러면 온몸이 붓고 쓰러져 죽어야 하는데, 자신을 물었던 뱀을 툭 털어낸 바울에게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목격한 그들은 바울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바꿉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은 신이다” 이렇게 해서 천벌을 받는 살인자가 갑자기 신이 되었습니다. 

이 일로 인해서 바울과 일행들은 촌장 보블리오의 집에서 사흘동안이나 머물면서 융숭한 대접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러던 중 보블리오의 아버지가 열병이 걸려 죽게 되었고, 바울은 그에게 손을 얹어서 기도하여 낫게 해 줍니다. 당연히 이 소식은 섬 전체에 퍼져나갔습니다. 사람들은 더 많은 병자들을 데리고 바울에게로 왔고 바울은 그들을 모두 고쳐주었습니다. 이 일로 바울과 바울의 일행들은 그 섬에 머무는 3개월 동안 융숭한 대접을 받을 수 있었고, 떠날 때는 로마까지 가는데 필요한 물품들을 넉넉하게 공급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멜리데를 떠난 바울은 수라구사를 들러 레기온을 경유하여 보디올까지 갔고 거기서 육로를 통해서 로마에 도착합니다. 이렇게 해서 예루살렘에서부터 로마까지의 대장정이 막을 내리게 됩니다. 

Flash back : 예루살렘에서 멜리데까지 

필름을 조금 더 뒤로 돌려보면 예루살렘에서 붙들린 이후 멜리데에 도착할 때까지의 바울의 삶은 그 어떤 때보다도 힘겨운 시간들이었고 생사를 가늠할 수 없는 커다란 위기의 연속이었습니다. 교회의 하나됨과 유익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예루살렘까지 왔지만 거기서 유대인들에게 붙들려서 돌아 맞아 죽기 일보직전까지 갑니다. 로마의 천부장 덕분에 목숨을 건지지만 계속해서 자신을 무고하는 유대지도자들의 모함 때문에 40명의 결사대의 서슬퍼런 위협 속에서 재판을 받게 되고, 유대지도자들의 눈치를 보는 총독들 때문에 2년이 넘는 세월을 감금상태에서 지내게 됩니다. 결국 상소가 받아들여져 로마로 떠나게 되지만 선주의 이익만 생각하며 항해를 강행한 백부장의 고집때문에 폭풍을 만나 15일이라는 시간을 생과 사를 넘나들며 표류하다가 겨우 멜리데 섬에 도착합니다. 그렇게 한 숨 돌리나 싶었는데 그 순간 이제까지의 그 어떤 위험보다도 더 긴급하고 위험한 상황에 놓입니다. 물리면 즉사하는 독사에게 물린 것입니다. 여기까지 아무리 잘 왔다고 하더라도 그 모든 노력과 과정이 수포로 돌아가는 순간에 맞닥뜨리게 되었습니다. 

하나 하나 살펴보면 그 어느 것 하나 쉽고 간단한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다 바울의 목숨을 바로 앞에서 위협하는 칼날과도 같은 것이었고, 모두가 다 바울 스스로의 힘으로 어쩔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습니다. 복음의 종으로 부름받은 후에 그는 말 그대로 하나님의 뜻을 찾고 그것에 대해 피하지 않고 액면 그대로 순종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의 삶은 점점 더 울퉁불퉁해지기만 합니다. 예루살렘에서 로마로 가게 될 것이라는 구체적인 하나님의 계획을 듣게 된 후에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아얘 피할 길 없는 어려움만 겹겹이 다가옵니다. 하나님의 뜻이 더 분명해지고, 그러한 하나님의 뜻에 더 온전히 순종할수록 더 형통해져야 하는데 현실은 정반대로 흘러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바울은 로마에서 최후를 맞이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죽으러 가셨던 것처럼 바울은 로마로 죽으러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바울은 당장은 그것을 몰랐겠지만 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다른 때는 몰라도 이 마지막 여행만큼은 평탄하게 해 주셨으면 어땠을까요? 별 방해나 핍박, 어려움이나 위험이 없이 순적하게 로마까지 가게 해 주실 수는 없었을까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죽음을 향해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는 그에게 하나님께서 그 정도의 선물을 주실 수는 없었을까요? 물론 하나님은 그렇게 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바울을 고이 고이 로마로 보내는 것보다는 그런 어려움과 위험 속에 두시는 것이 하나님과 바울, 그리고 바울을 둘러싼 환경 속에 있었던 사람들에게 훨씬 더 유익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돌이켜 보면 바울이 그렇게 빨리, 그리고 안전하게 유대지도자들의 손을 벗어나 가이사랴로 갈 수 있었던 것은 40명의 결사대 덕분이었습니다. 가이사랴에서는 총독이 그들의 눈치를 보았기 때문에 2년이 넘는 세월동안 발이 묶이게 되었지만 그 덕분에 가이사랴에서 더 오랫동안 총독을 비롯한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또, 배 위에서는 폭풍과 파선 덕분에 함께 배에 탄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여줄 수 있었고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멜리데 섬에서는 독사에 물렸기 때문에 거기 석 달이나 머물면서도 아무런 어려움 없이 지낼 수 있었고, 거의 신에 가까운 대접을 받으며 멜리데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성경에 이것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없지만 말 복음 밖에 몰랐던 바울, 그 복음에 인생을 걸었던 바울이 그 좋은 기회를, 그것도 석달 동안이나 되는 시간을 그냥 날려보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거의 신처럼 여겨졌던 바울을 통해 전해졌던 복음이 그 섬 사람들에게 얼마나 힘있게 들려졌을지 상상만 해도 흥분되는 일이 아닙니까?

바울이 가장 큰 수혜자였다

그렇지만 그런 일들 덕분에 복음만 힘있게 전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을 통해 복음을 들은 사람들만 유익을 얻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정작 가장 유익했던 것은 바울 자신이었습니다. 회원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가장 분명하고 생생하게 누릴 수 있는 때가 언제입니까? 평안하고 잘 나갈 때, 내가 무언가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이 남아 있을 때입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내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 더 이상 방법이 남아있지 않을 때 그 때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면 우리는 하나님을 가장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경험할 수 있습니다. 비록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거의 죽음 가까이까지 가는 위험 속으로 몰아넣으셨지만 그 속에서 하나님의 명확한 뜻을 알려주셨습니다. 특히 배 위에서 그 배를 깨뜨리는 풍랑을 만났을 때는 이미 그 폭풍이 있을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도 다치거나 죽지 않게 될 것이라는 것과 모두가 살아남기 위해서 취해야할 구체적인 방법까지 알려 주셨습니다. 바울은 배에 탄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했고 그 말은 그대로 이루어 졌습니다. 배는 완전히 깨어졌지만 거기 탔던 사람들은 한 사람도 생명을 잃지 않았습니다. 심지어는 한 섬에 걸리게 될 것까지도 그대로 맞아 떨어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역자로서 이것보다 더 신나는 경험이 어디있겠습니까? 이것보다 더 용기와 확신을 주는 은혜가 어디있겠습니까? 그리고, 그 이후에 바울이 전한 복음은 승무원들과 죄수들에게 어떻게 들려졌겠습니까? 27장 23절을 보면 천사가 바울에게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라고 전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 말씀으로 미루어 볼 때 이 풍랑과 풍랑 속에서 배가 깨지는 것은 바울을 그 모든 자들의 육체적인 생명 뿐만 아니라 영혼까지도 구원하는 사람이 되도록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환경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멜리데 섬에서 있었던 일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독사에 물린 일이 없었다면 멜리데에서의 여러가지 사역은 훨씬 더 어려웠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뱀이 스스로 나와서 물어주니 바울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고마웠을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능력을 증명해 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고 그것 때문에 그 섬에서 사람들에게 더 쉽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으니 말입니다. 그 덕분에 버려지고 잊혀졌던 한 섬에도 복음이 전해졌고 그곳에도 하나님 나라가 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부분에서 한 가지 아주 놀랍고 흥분되는 내용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울이 독사에 물렸지만 전혀 해를 입지 않았던 것, 그리고 그가 손을 얹고 기도할 때 병자들이 고침을 받게 된 것은 단순히 우연히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이미 예수님께서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약속해 주셨던 것이라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6장 17, 18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예수님의 그 약속은 그 오랜 시간을 지나 멜리데 섬의 바울에게 글자 그대로 성취되었던 것입니다. 

회원 여러분, 그 섬에서, 그리고 그 섬을 떠난 이후에 바울의 여행이 어땠을까요? 여전히 죄수취급을 받았을까요? 전혀 아닙니다. 그는 오히려 그 모든 자들의 지도자요 목회자가 되어서 그들에게 힘있게 복음을 가르쳤을 것이고, 그들은 점점 견고한 성도들로 양육되어져 갔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제자들을 예수님께 주셨듯이 그들을 바울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고 그 약속은 이루어질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로마로 가니라...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사도행전은 드디어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로마로 가니라” 거기까지 가는 길이 얼마나 오래 걸렸든지, 그리고 그 과정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방해를 했으며, 그 길이 얼마나 험하고 위험했든지 결국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로마에 도착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로마서의 마지막 두 절은 로마에서의 바울에 대해서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유하며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 로마에서의 바울은 더 이상 죄수의 신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셋집에 머물렀고 찾아오는 사람 모두를 만날 수 있는 자유를 얻을 수 있었으며, 그들 모두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마음껏 전할 수 있는 특권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거기서 바울은 자신의 사역을 위한 일생최고의 환경을 만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에서도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라”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다시 한 번 글자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경험했던 것입니다. 그것도 바울이 기대하지 못했던 훨씬 더 큰 자유 속에서 더 평안하고 풍성하게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말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로마에 도착한 이 사건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주셨던 개인적인 약속이 이루어진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실로 바울이 로마에 도착한 일은 그리고 거기서 복음을 선포하고 가르친 일은 더 큰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였습니다. 우리는 사도행전의 맨처음 1장 8절에 나오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라는 예수님의 약속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이제 사도행전의 맨 마지막 장에서 바울이 로마에 도착하고 거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된 것을 목격하게 됩니다. 회원 여러분, 땅끝이 어디입니까? 지금은 땅끝이 여기다 저기다 말이 많습니다만, 당시에 살아가던 사람들의 사고방식으로는 로마가 바로 땅끝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로마에 도착하고 거기서 마음껏 복음을 전하게 된 일은 1장 8절의 주님의 약속이 이루어진 것을 의미했던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28장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님의 모든 약속이 온전히 성취되었음을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사도행전은 그야 말로 약속의 성취로 가득 차 있는 그런 책입니다. 요엘 선지자의 예언대로, 그리고 예수님의 약속대로 성령님께서 충만하게 임재했습니다. 복음이 전파되었고 그 결과 수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더해졌습니다. 그리고 그 복음이 전파될 때 성도들이 당했던 핍박과 어려움들 또한 예수님께서 이미 말씀해 주셨던 그대로 였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4장 12절에서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이 약속 또한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사도들과 성도들은 정말 말 그대로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일들을 그대로 하며, 더 놀라운 일도 행했습니다. 병자들을 고친 것은 물론이고, 죽은 자를 살리기도 했습니다. 바울의 경우에는 그가 쓰던 앞치마를 덮기만 해도 병이 나을 정도였습니다. 빌립집사의 경우에는 이디오피아 내시를 만나기 위해 성령님의 능력으로 요즘말로 순간이동을 하기까지 했습니다. 

바울이 가졌던 견고함의 또 다른 이유

우리는 지금까지 바울의 행적을 따라가면서 그 속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지, 그 일에 있어서 하나님은 얼마나 틀림이 없고 한 치 오차도 없는 분이신지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뿐만이 아니라 그 안에서 흔들림이 없고 변함이 없는 바울의 모습도 만나게 됩니다. 그 때마다 우리는 질문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런 바울의 견고함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나도 그런 견고함을 가질 수 없을까?”하고 말입니다. 우리는 이미 그런 견고함의 손잡이 하나를 살펴보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소명이라는 손잡이였습니다. 바울의 삶처럼 불안하고 심하게 흔들리는 삶이 없었지만 그는 그의 삶이 흔들릴 때마다 항상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소명이라는 손잡이를 붙잡았고 다시 균형을 잡고 제 자리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이제 다시 처음 이야기가 시작되었던 버스 속으로 가 보겠습니다. 그리고 다시 거기 있었던 두 사람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버스가 심하게 흔들릴 때 손잡이를 잡았던 사람, 그리고 그러는 통에 우당탕 넘어져 버렸지만 그 자리에 앉아 깔깔대며 웃고 떠드는 사람. 여러분 보시기에 바울은 누구와 더 가깝습니까? 풍랑에 깨어지게 된 배 위에서, 치명적인 독사에게 물린 섬에서의 바울의 모습은 둘 중에서 어떤 사람과 더 비슷합니까? 뒤쪽에 있는 거의 미친 듯이 보이는 사람과 더 비슷하지 않습니까? 물론 바울은 삶이 요동할 때마다 소명이라는 손잡이를 붙잡고 균형을 잡곤 했습니다. 성경을 보면 그에게는 그런 모습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러한 견고함보다 더 든든한 영적인 견고함을 주는 기초가 따로 있었습니다. 

이제 버스 밖에서

지금까지는 카메라를 확 당겨서 버스 안의 모습만 보았는데, 이제 카메라를 조금 멀리 빼 보겠습니다. 잘 따라오시기 바랍니다. 카메라가 주욱 줌 아웃됩니다. 사람들의 모습은 점점 작아지고 이제 버스 전체가 눈에 들어옵니다. 카메라가 조금 더 멀리 줌 아웃 됩니다. 이제는 그 버스가 놓여있는 상황 전체가 눈에 들어옵니다. 이렇게 보니 그 동안 안 보이던 것이 보입니다. 그 버스는 도로 위를 달리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큰 배위에 주차되어 있었고, 그 배는 그 버스를 싣고 육지를 향해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그 상황이 이해가 가지죠? 왜 차 바닥에 넘어진 사람들이 전혀 불안함 없이 그렇게 깔깔대고 웃을 수 있었는지, 오히려 자신이 넘어진 것을 즐길 수 있었는지 말입니다. 

우리에게는 소명이라는 손잡이도 필요합니다. 그래서 삶이 흔들릴 때마다 균형을 잡고 제 자리를 잡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더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우리가 타고 있는 것은 달리는 버스가 아니라 결코 침몰할 수 없는 거대한 여객선이라는 사실을 알고 또 확신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확신한다면 때로 넘어진다고 하더라도, 완전히 넘어져 버린 것 같은 상황이 되더라도 낙심하고 좌절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표류하는 배 위의 바울처럼, 독사에게 물린 바울처럼 오히려 더 담대하고 평안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여객선이 무엇일까요? 결코 침몰할 수 없는 이 여객선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바울은 바로 자신이 하나님의 영원한 약속이라는 여객선을 타고 여행중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 여객선의 선장이 신실하신 하나님이심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바닥에 넘어져서도 두려워하거나 불안해 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결론 : 언약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을 붙잡으라

우리가 사도행전을 통해 보아야 할 것은 본질적으로 성령의 능력이 어떠한지, 제자들과 성도들의 헌신이 어떠했는지, 복음이 어떻게 힘있게 퍼져나갔는지 그런 것들이 아닙니다. 그런 것들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우리가 사도행전을 통해 진짜로 보아야 할 것은 바로 그 안에서 모든 약속들을 남김없이 그리고 온전하게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입니다. 성령의 능력도 복음으로 인한 구원도 다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이며, 제자들의 헌신과 견고함도 그 언약을 믿는 제자들의 믿음으로 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일에는 여러분의 영혼 속에 ‘소명’이라는 손잡이를 그리셨다면 오늘은 커다란 여객선을 그려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배의 맨 앞에다가 “하나님의 언약”이라고 쓰십시오. 그 배의 행선지는 ‘완전한 성취’라는 항구입니다. 그리고 그 배위 버스 안에 타고 있는 여러분 자신을 그려넣으시기 바랍니다. 이제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이 타고 있는 그 배가 ‘완전한 성취’라는 항구에 도착하게 될 것을 믿으십니까? 아무리 흔들리고 때로는 그 속에서 내가 쓰러지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 배가 나를 그 항구에 데려다 놓을 것을 믿으십니까? 반드시 믿으셔야 합니다. 그게 사실이니 믿으셔야 합니다. 사도행전을 보십시오. 그리고 바울의 삶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결국 그를 로마에 데려다 놓으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바울에게 주셨던 약속을 이루셨고, 제자들과 교회에 주셨던 가장 중요한 약속을 이루셨습니다. 

타이타닉도 침몰하고 포세이돈도 가라앉지만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배, 우리 모두가 타고 있는 그 배는 결코 침몰하지 않을 것입니다. ‘온전한 성취’라는 항구를 향해 나아갈 것이며 결국 우리를 그 곳에 데려다 놓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 믿음을 버리지 않는 한 우리는 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항상 그 안에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의심치 않는 한 우리는 쓰러지고 넘어지더라도 거기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과 든든함을 누리는 여유를 잃지 않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우리의 로마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데려다 놓으실 우리의 로마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분명 우리를 그 곳에 가게 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삶의 마지막 장도 “로마로 가니라”라고 기록되게 하실 것입니다. 믿으십시오. 그 분의 언약을 믿으십시오. 그러면 그 믿음이, 그리고 그 약속이 우리를 든든하게 할 것이고 쓰러지고 넘어져도 망하지 않게 해 줄 것입니다. 

모두가 다 하나님의 약속을 붙드는 이 항해를 계속해서 자신의 로마에 도착하는 행복한 여행자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