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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교회 설교/설교듣기

2011년 매일성경 설교 40. 무서워 말며 두려워 말라


날짜 : 2011-11-06

본문 : 에스겔 3장 1-15절


도입 : 에스겔을 향한 부르심

하나님께서는 낙심해 있는 에스겔을 불러 하나님의 일을 맡기셨습니다. 그것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와 있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전하는 일이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완고한 죄악 때문에 징계를 받아 그런 처지에 있었으면서도 오히려 하나님께 대해서 굉장히 화가 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인 자신들을 그런 어려운 사황 가운데로 몰아넣으셨다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들을 귀가 없었습니다. 아무리 말해주어도 들으려 하지 않을 것이고 들으면 들을수록 마음은 더욱 완악해 갈 수 밖에 없는 상태였습니다. 에스겔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하는 사람들은 바로 이런 사람들이었습니다. 당연히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맡기신 소명은 굉장히 힘들고 까다로운 일이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이 사실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에스겔에게 이 일을 맡시시면서 아주 특별한 은혜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성품과 영광, 그리고 권능을 보여주시고, 에스겔이 맞닥뜨려야 할 현실에 대해서 솔직하게, 여러번 반복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힘든 일을 감당해야할 에스겔이 영적으로, 그리고 심리적으로 준비를 갖추도록 세심하게 배려하셨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제 하나님께서 에스겔이 해야할 일들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기 전에 에스겔이 그 일을 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들을 마지막으로 챙겨주시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본문 속에서 어려운 심부름을 하기 위해서 먼길을 가야 하는 아들의 요모조모를 챙겨주고 마지막으로 단속하는 어머니 같은 하나님의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을 불러서 그저 하나님의 일을 하라고만 명령하신 것이 아니라, 그가 그 일을 끝까지 온전하게 완수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들을 알려주시고, 재확인해 주시고 또 공급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향해서 가지고 계신 하나님의 세밀한 관심을 읽을 수가 있으며, 동시에 우리가 우리에게 맡겨진 일들을 끝까지 잘 감당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배우게 됩니다. 


1. 받는 것을 먹으라

첫번째로 살펴보아야 할 것은 에스겔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요구하신 것이 하나 있었다는 것입니다. 에스겔은 그 말씀을 들어야 할 사람들에게로 가야했고, 또 가서 그 말씀을 전해야 했지만 그 전에 지금 자신의 눈 앞에 있는 말씀, 그러니까 두루마리를 먹어야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의 눈 앞에 놓인 두루마리를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원래 말씀은 듣는 것이지 먹는 것이 아닙니다. 특히 두루마리에 적힌 말씀이라면 읽어야지 절대로 먹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거나 읽으라고 하시는 대신에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굳이 그런 말을 사용하신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읽거나 듣는 행동과 먹는 행동의 차이를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먼저 듣는 것과 읽는 것은 그저 형식적으로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저 듣고 보아서 무슨 뜻인지 이해하고 그것에 대한 지식을 얻는 것에서 얼마든지 끝날 수 있는 행동이고 그래도 별 문제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먹는 행동은 이와는 전혀 다릅니다. 본문에도 나와 있는 대로 먹는 것은 나의 배와 창자를 채우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소화될 수 밖에 없고 그렇게 소화되고 흡수된 후에는 더 이상 나 자신과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내 몸의 일부가 되고, 내가 움직이는 힘이 되며, 내가 의지해서 살아가는 생명의 힘이 됩니다. 그래서 먹는 것은 일부라고는 하지만 실은 그 사람의 전부입니다. 적어도 육체적인 생명과 삶에 있어서는 그가 먹은 것이 전부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두루마리에 기록된 말씀을 먹으라고 하신 것을 이런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단순이 알거나 이해하는 수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말씀 때문에 살고, 말씀을 힘으로 해서 살아가게 될만큼 자신이 전해야할 말씀이 자신과 하나가 되고 혼연일체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라고 말입니다. 실제로 에스겔이 이스라엘에게 말씀을 전하는 일은 그렇게 되지 않으면 끝까지 해 낼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아무도 듣지 않습니다. 열매도 없습니다. 게다가 핍박만 주어질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찌보면 무의미하고 허무하며 위험만 따르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은 그렇게 자신이 온전히 말씀과 하나가 되고 또 그 말씀이 자신의 삶의 에너지요 이유가 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에스겔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두루마리를 먹었습니다. 그랬더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같았다”고 이야기 합니다.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달았겠지 하고 쉽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에스겔의 이 경험은 사실은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 경험입니다.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말씀이 은혜가 되고 힘이 되고 위로가 되는 그런 말씀이 아니라 10절의 기록대로 앞뒤로 빽빽하게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씀들이 에스겔의 입에 들어갔을 때, 그 맛이 꿀처럼 달콤했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으면 안됩니다. 아무리 쓰디쓴 말씀이라고 하더라도 선지자에게는 달게 느껴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말씀을 액면 그대로 전할 수 없고, 그 말씀을 위해서 자신의 삶을 헌신할 수 없게 됩니다. 

에스겔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전에 그것을 먹어야 했고 또 그것을 먹었을 때 그것이 쓰지 않고 달게 느껴졌다는 것은 어떤 모양으로든 하나님의 말씀에 헌신하며 살아가야 하는 우리 성도들에게는 커다란 의미가 있는 사건입니다. 성도는 말씀과 관련해서 두 가지 소명을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말씀을 전하는 것이고 두번째는 그 말씀에 순종해서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려면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먹어야 한다는 말이 단순히 들어야 한다는 말과는 전혀 다른 말이라는 것에 주의를 기울여 주시기 바랍니다. 실제로 신앙의 많은 문제가 그런 오해에서 생겨납니다. 말씀을 먹지 않고 듣는 것에서 끝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말씀이 내 삶에서 실제적인 능력이 되지 못합니다. 

설교자로서 제가 깨달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저는 예전에는 진리는 어쨋든지 진리이기 때문에 그저 바르게 전하기만 하면 그 진리가 알아서 역사할 것이라고만 믿고 사역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언젠가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깊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스스로 일하게 되어 있지만 그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그 말씀을 참으로 믿고 그 말씀에 헌신하여 살아가고 있다면 그를 통해서 전해지는 진리는 더욱 더 많은 사람들을 구하고 온전케 하는 하나님의 도구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에 자신의 삶을 걸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통해서 더 크고 온전하게 일하시기로 결정하셨고 그렇게 일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성도는 누구나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그 말씀과 자신을 하나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럴 때라야 말씀에 따라 순종하며 살 수 있고 힘있게 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먹고 전하려면 그 말씀이 적어도 자신에게는 단 꿀처럼 여겨져야 합니다. 비록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씀이라고 하더라도 가장 맛있게 느껴져야 합니다. 그래야 자기 자신이 먼저 기쁘게 듣고 그렇게 들은 것에 순종할 수 있으며 또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2. 부정적인 감정을 극복해야 한다

두번째로 살펴보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이 사역 중에 부정적인 감정에 휩쓸리기 쉽다는 것을 아셨고 그것을 미리 해결해 주시려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만만치 않은 상태에 있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는 영적으로 볼 때 이미 사망진단이 내려진 후라고 할만큼 심각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니, 에스겔이 먹고 달게 느낀 말씀을 전한다고 하더라도 들으려는 사람이 없고 그래서 아무도 들을 수 없는 말씀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무슨 뜻인지 못 알아들어서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히브리 사람이 히브리 사람에게 히브리어로 말하는데, 그것도 아주 평범한 단어들을 사용하여 이야기하는데 어찌 알아듣지 못하겠습니다. 문제는 듣는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니라 듣지 않으려는 완고한 태도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결코 에스겔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귀를 막을 것입니다. 못 알아들어서가 아니라 다 알아 듣기 때문입니다. 알아듣기는 알아듣는데, 에스겔에게는 달았던 그 동일한 말씀이 그들의 귀에는 쓰디쓴 한약처럼 여겨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더 이상 말을 못하게 하려고 얼굴을 굳게 할 것입니다. 살기등등한 표정을 지을 것입니다. 그리고 에스겔은 그런 그들을 보면서 두려움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든지 혹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든지 어떻게든 말씀에 헌신하는 일은 그리 호락호락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더 정확하게 하나님의 뜻을 밝히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려고 하면 할수록 우리를 향한 사람들의 표정은 굳어져 갈 것이고, 우리를 향한 그들의 적대감은 커져갈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말과 행동이 하나님의 진리를 밝힐 때, 사람들은 그것을 통해서 자신의 잘못을 지적받게 되어 있고, 나아가서는 자신이 누리던 악한 유익을 예전처럼 쉽게 취할 수가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과 상관없는 선한 일을 할 때는 칭찬하고 격려하던 사람들도 막상 자신의 이익과 부딛히거나 배치되는 선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향해서는 등을 돌리게 되어 있습니다. 

특히 우리는 오늘 성경이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이방인들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에 우리의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당황스러운 사실입니다. 이스라엘이라면 그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고 있어야 하고 그렇기 때문에 또 다시 말씀이 들려올 때,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입니다. 몰라서가 아니라 알기 때문에 귀를 닫습니다. 들으려고 하지 않고 말하는 사람을 힘들게 합니다. 이스라엘이 오늘날의 교회라고 한다면 오늘날의 교회 안에서도 얼마든지 이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정직하게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이 거부당하고 또 정직하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신앙생활하며 교회를 섬기려는 사람들이 따돌림을 받고 무시를 당하게 될 수 있습니다. 교회를 이루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영적인 상태가 다 다르고 실제로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도 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엄연한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서 어떤 모양으로건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하는 삶을 살아가려면 그런 반대와 무시, 그리고 불이익쯤은 언제나 각오하고 있어야 합니다. 나를 향해 그런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이 ‘이스라엘’일 것이라는 예측을 한 상태에서 그런 삶을 유지해 가야 합니다. 그래야 그런 일들을 경험할 때, 심하게 흔들려 넘어지거나 낙망하는 일을 막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경험들이 에스겔을 두렵게 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말씀을 전하는데 듣는 사람들의 얼굴이 굳어집니다. 그 얼굴이 찡그려 집니다. 그리고 눈에 적대감이 가득차 오릅니다. 그런 사람들을 향해서 하나님의 말씀, 그것도 심판의 말씀을 전한다면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를 일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아무런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런 에스겔에게 먼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이마로 화석보다 굳은 금강석같이 하였으니 그들이 비록 패역한 족속이라도 두려워 말며 그 얼굴을 무서워 말라” 

이제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을 사역지로 데리고 가십니다. 그런데 그 곳으로 갈 때, 에스겔은 아주 큰 특전을 누리게 됩니다. 에스겔에게 너무나 껄끄럽고 힘든 일을 맡기신 하나님께서 그를 하나님의 전용 비행기에 태워주셨습니다. 그렇지만 에스겔은 굉장히 비통하고 화가 나 있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이스라엘은 하나님으로부터 사형선고를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혹은 그 뜻에 순종하는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진리를 증거하는 삶을 살려면 말씀에 헌신하는 일 자체를 위해서도 힘써야 하지만, 그런 헌신이 계속되는 것을 방해하고 좌절시키는 부정적인 감정들과도 싸워서 승리해야 합니다. 그 부정적인 감정들이란 바로 두려움과 비통함, 그리고 분노입니다. 물론 비통함이나 분노는 그것 자체로는 꼭 나쁜 감정이라고 할 수 없지만 자칫 잘못하면 우리가 가야할 길을 결정적으로 가로막고 우리를 주저앉혀 버리는 복병이 될 수 있습니다. 두려움이나 비통함, 그리고 분노는 주로 우리가 우리 힘으로 상황을 통제할 수 없다고 여겨질 때 찾아오는 감정들입니다. 그런데 두려움은 마땅히 해야할 일들을 피하게 만들고, 비통함은 우리를 좌절하게 만들며, 분노는 자칫 하나님의 일을 인간의 감정풀이로 만들어 버리기가 쉽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감정들을 잘 다스리고 적절한 수준에 머물게 하는 방법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뒷부분은 우리에게 바로 그 방법에 대해서 알려줍니다. 그 방법이란 한 마디로 말씀드리면 ‘믿는 것’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믿음이란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지는 통로입니다. 특별히 그 은혜를 은혜답게 충분히 누리려면 믿음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우리가 확실히 믿지 못할 때 은혜는 원래의 능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은혜를 받고서도 여전히 연약한 상태에 머물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2.1. 두려움을 이기는 방법

오늘 본문은 먼저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가 믿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이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을 하다가 충분히 두려움에 빠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들의 얼굴을 대하도록 네 얼굴을 굳게 하였고 그들의 이마를 대하도록 네 이마를 굳게 하였으되 네 이마로 화석보다 굳은 금강석같이 하였으니 그들이 비록 패역한 족속이라도 두려워 말며 그 얼굴을 무서워 말라”  에스겔이 앞으로 찾아올 두려움, 그리고 앞으로 생겨날지도 모를 일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믿어야 할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이미 그를 완고하고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보다 강하게 하셨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구절을 가만히 보시면 “네가 가면 네가 너를 그들보다 강하게 해 주겠다”고 미래형으로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그 대신 “강하게 하였으되”라고 과거형으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편에서는 이미 에스겔이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반대와 적대감을 이겨내기에 충분할만큼 강하게 해 주셨던 것입니다. 

두려운 감정은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생겨나게 마련입니다. 우리에게는 그 감정이 우리를 찾아오는 것자체를 원천봉쇄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두려움이 찾아왔을 때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있습니다.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은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에게는 진짜 확실한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이미 나를 충분하게 강하게 하셨다”는 것을 알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특히 내가 하나님께 의미있는 일, 바르고 정직하며 반드시 해야할 일에 헌신하려고 할 때, 그런데 그 일이 결코 쉽지 않은 일일 때, 그 때 하나님은 항상 우리에게 이 은혜를 주십니다. 우리가 우리를 두렵게 하기에 충분한 어려움과 손해에 부딛히기 전에 우리가 그 일을 넉넉하게 넘어설 수 있도록 충분히 강하게 하십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셨던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라는 고린도 전서 10장 13절의 약속은 공수표가 될 것이며 하나님은 거짓말장이가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전에 이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그 믿음을 준비하고 유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믿음을 준비해 놓지 않으면 우리는 두려움이 찾아오고, 우리를 두렵게 하는 상황이 되었을 때, 그 두려움에 휘둘리게 됩니다. 우리의 참된 신앙을 가로막는 장애물 앞에서 번번히 주저앉게 됩니다. 두려움은 절대로 우리 힘으로 이겨낼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미 나를 두렵게 하는 것보다 나를 더 강하게 하셨다”는 사실을 확신한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두려움을 넘어설 수 있게 되고, 담대함 가운데 살아갈 수 있게 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도 가치있는 일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2.2. 비통함과 분노를 이기는 방법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온전히 감당하기 위해서 다루고 처리해야 할 두 번째 감정은 비통한 감정과 분노입니다. 우리가 우리를 안타깝게 하며 낙심케 하기에 충분한 상황을 만나게 되면 우리는 비통한 감정에 빠지기 쉽습니다. 또 정상적이지 않은 상황 속에 있게 되거나 혹은 목격하게 되면 우리 안에서는 분노가 생겨나게 됩니다. 이 두 가지 감정은 그것 자체로 악한 감정은 아닙니다. 비통함은 하나님의 슬픔을 느끼게 해 주고, 분노는 그것이 거룩한 것일 때는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위해 헌신하는 에너지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감정은 자칫 도를 넘을 수가 있기 때문에 잘 다스리고 조절해야만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에스겔이 하나님의 영에 이끌려서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의 거주지였던 델아빕으로 갈 때, 에스겔이 비통해 하고 화가 나 있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에스겔은 이제 그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할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미 죽어버린 사체와도 같은 상태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려고 들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이런 복잡하고 힘든 감정 속에 있는 에스겔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해 주신 일을 볼 수 있습니다. 우선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을 하나님의 전용기에 태워서 델아빕까지 데려다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었습니다. 14절 뒷부분을 보면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내가 근심하고 분한 마음으로 행하니 여호와의 권능이 힘있게 나를 감동하시더라” 복잡하고 힘든 감정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로 향하는 에스겔 위에 하나님의 손이 힘있게 함께 하셨습니다. 마치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광야의 이스라엘 위에 머물러 있었듯이 에스겔 위에 하나님의 손이, 그 능력의 손이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힘든 절망적이고 힘든 상황을 만나면 우리의 감정은 폭풍 속의 바다처럼 요동치게 됩니다. 그것이 우리를 무기력하게 하고 그저 화만 낼 뿐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태로 몰아 넣습니다. 이 때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하고 또 믿어야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런 상황 위에, 그리고 그런 상황 속에 있는 우리들 위에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이 강하게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나를 둘러싼 모든 상황, 그리고 나 자신의 감정... 그 어느 것 하나도 하나님의 손 아래 있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은 그 분의 전능하신 손 아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어떤 분이십니까? 바로 낙심한 에스겔을 불러 당신의 모든 영광을 보여주시고, 함께 하심을 알게 하시고, 당신의 일을 맡겨주신 분이십니다. 나를 사랑하셔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의 모든 것이 되시고, 나를 위해 당신의 독생자를 내어주신 분이십니다. 그런 분의 전능하신 손이 항상 나와 함께 있습니다. 나를 둘러싼 상황 위에 있습니다. 이것을 믿으십니까? 확신하십니까? 우리가 이 사실을 굳게 믿는다면 우리의 감정이 요동칠 필요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 감정 때문에 인생을 허비하고 또 하나님 앞에서 의미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방해받을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또 속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일을 할 때, 우리 자신의 상태나 주변의 상황들은 우리의 감정을 뒤흔들기도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항상 두 가지 사실을 기억해야 하며 그 사실에 우리의 믿음을 더해야 합니다. 첫번째 사실은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를 강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강하게 하실 것이 아닙니다. 이미 강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를 그런 상황 가운데로 인도하시기 전에 이미 그런 은혜를 주셨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의 현실이 되는 그런 은혜입니다. 그러나 그 믿음이 없으면 별로 도움이 안되는 은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항상 우리의 믿음과 짝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됩니다. 은혜에 믿음이 더해질 때, 은혜를 믿음으로 받을 때 그 은혜가 능력이 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믿어야 할 두번째 사실은 그렇게 이미 우리를 강하게 하신 하나님께서 그렇다고 해서 우리 혼자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를 충분히 강하게 하셨지만 다시 우리 자신과 상황 위에 그 분의 전능하신 팔을 더하십니다. 이렇게 이중으로 안전장치를 갖추게 하신 후에 우리의 삶과 소명의 자리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3. 결론 : 말씀을 먹고, 약속을 믿자

우리는 모두다 말씀을 지키는 소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말씀대로 살아감으로써 그 말씀을 지키고 또 그 말씀을 전함으로써 지키는 소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소명을 따라 산다는 것은 정말 만만치 않은 일입니다. 우리는 그런 일들을 달갑지 않게 여기는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가고 있고, 그런 사람들 때문에 감정이 흔들리기 쉬운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먹어서 그 말씀과 내가 하나가 되고 완전히 동화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려면 무엇보다도 그 말씀을 달게 여기는 미각이 있어야 합니다. 말씀이 우리에게 쓰게 느껴진다면 우리는 그 말씀을 먹을 수도 없으며, 그 말씀대로 살거나 혹은 전하지도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이미 나를 충분히 강하게 하셨으며 그럴 뿐만 아니라 그 분의 전능하신 팔로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 믿음 안에서 살아갈 때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올곧게 말씀을 따르는 삶, 그 말씀을 전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미 우리에게 허락하시고 또 언제나 부어주고 계시는 이 은혜에 믿음을 더하심으로써 신앙의 삶을 방해하는 모든 장애물들을  훌쩍 뛰어넘는 사슴의 발을 가진 능력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