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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교회 설교/설교듣기

2011년 매일성경 설교 42. 평강이 없으나

날짜 : 2011-11-20

본문 : 에스겔 13장 1-16절


도입 : 목회자의 갈등, 에스겔의 갈등

목회자에게는 크게 두 가지 임무가 맡겨져 있습니다. 한 가지는 선지자적인 임무이고 또 하나는 제사장적인 임무입니다. 아시다시피 선지자는 죄를 지적하고 돌이킬 것을 요구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제사장은 죄를 지어 무겁고 아픈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죄용서를 선포하고 위로를 주어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책임은 서로 갈등관계에 있습니다. 선지자적인 임무를 제대로 감당하려면 제사장적인 임무는 제대로 감당하지 못합니다. 반대로 제사장적인 임무에 충실하려면 선지자적인 임무는 제대로 행해질 수 없습니다. 두 가지 모두를 적절하게 행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특히 이 두 가지 임무와 책임은 설교에서도 행해져야 하는데, 설교의 영역에서는 이 두 가지를 균형있게 행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그리고 마음 같아서야 다 괜챦다고 해 주고 싶고,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말하고 싶고, 또 복만 빌어주고 싶지만 그럴수만은 없습니다. 만약 설교가 성도들 앞에서만 하는 행위라면 그래도 괜챦겠지만 설교는 동시에 하나님 앞에서도 행해지는 행위이고, 실제로 그 부분이 훨씬 중요하고 무게가 더 나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두 가지 임무와 책임은 목회자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목회자가 성도들을 위해서 존재하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목회자의 두 가지 임무 또한 성도들을 위한 것인데, 그렇다면 성도들 또한 목회자의 제사장적인 사역 뿐만 아니라 선지자적인 사역 또한 필요로 하고 또 두 가지 사역을 통한 목회적인 돌봄을 모두 받아야 한다는 뜻이 됩니다. 특히 이것을 설교와 연관지어 생각해 본다면 성도들은 제사장적인 메시지, 그러니까 용서를 선포하고 평강을 빌고, 복을 선언해 주고, 위로를 주는 메시지 뿐만 아니라 죄를 지적하고 돌이키라는 선지자적인 메시지도 들어야 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것은 설교를 듣는 것은 설교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이고, 그것이 내가 설교를 듣는다는 개인적인 차원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무게가 나가는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에스겔은 이미 예루살렘이 한 차례 함락을 당하고 백성들은 포로로 잡혀간 상황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하나님께로 돌이키려고 들지 않는 사람들을 향해서 하나님의 메시지, 그것도 위로와 평강의 메시지가 아닌 저주와 멸망의 메시지를 전해야 합니다. 게다가 그의 사역은 단순히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메시지를 전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백성들 뿐아니라 선지자들을 향해서도 같은 메시지를 전하라고 하셨는데, 문제는 이들이 신실한 선지자들이 아니라 사이비 선지자였던 것입니다. 게다가 에스겔은 한 사람이고 이들은 다수였습니다. 그리고 백성들도 에스겔이 아닌 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당시 백성들은 에스겔이 아닌 거짓 선지자들을 진짜 선지자로 여기고 있었다는 뜻이 됩니다. 그래서 영적인 권위가 가져다 주는 힘은 에스겔이 아니라 거짓 선지자들에게 쏠려있었다는 뜻이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에스겔은 두 쪽 모두에게 두 쪽 모두가 전혀 듣지 않는 메시지, 그것도 신변에 위험을 가져올 수 있는 껄끄러운 메시지를 전해야 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거짓 선지자들에게 전달하라고 하신 말씀 중의 일부입니다. 특히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거짓 선지자들을 벌주실 수 밖에 없는지 그 죄를 지적하고 고발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런 점에서 여러분 보다는 저처럼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이 들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일 것입니다. 그러나, 위에서도 잠시 말씀드린 것처럼 전하는 사람의 사역과 듣는 사람들의 듣는 행위는 절대로 분리될 수 없습니다. 전하는 것은 들으라고 하는 것이고, 그것을 분별하여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는 것은 듣는 성도들, 그러니까 청중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거짓 선지자들의 죄를 지적하고 그에 따르는 징벌을 말씀하시면서도 그 한 가운데 “이스라엘아!”라고 하시면서 별도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주시는 메시지도 포함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은 우리 모두가 함께 귀를 기울여야 하는 메시지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을 향한 고발과 경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선지자들 중 대부분은 거짓 선지자라고 가차없이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렇다면 회원 여러분, 그 선지자들도 자신이 가짜라고 생각했을까요? 물론 아주 의도적으로 흔히 쓰는 말로 종교적인 사기를 칠 목적으로 선지자 행세를 했던 사람들은 스스로도 자신이 가짜라는 것을 알고 있었겠지만 그렇지 않은 대부분의 선지자들은 추호도 자신이 가짜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도 나름대로 열심히 사역하고 있었고,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전한다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판단에 자신들의 사역이야 말로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꼭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주며, 자신들의 전한 말들이 이루어질 것을 열망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지 않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정반대였습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열광한다고 해도,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신봉한다고 해도 그들은 가짜 사이비에 불과했습니다. 그 첫번째 이유는 그들이 본 것이 없이 자기 심령을 따라 예언했기 때문입니다. 선지자의 사명은 본 것을 말하고 들은 것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때로 그들도 하나님의 뜻을 깨닫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그것과는 반대되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들은 진짜가 아니라 가짜가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것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무언가를 보았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무엇을 본 것일까요? 쉽게 말해 헛 것을 본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허탄한 것과 거짓 점괘를 보며...” 하나님 보시기에 그런 것들은 이방잡신을 섬기는 자들이 보는 잘못된 환상과 거짓 점괘와 전혀 다를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 이야기들이 선지자들의 입술에서 나오고 또한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해지고 있었지만 하나님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본 것도, 전한 것도 거짓이었고 그들은 거짓 선지자일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6절을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그 말이 굳게 이루기를 바라게 하거니와...” 이것은 거짓 선지자들이 그렇게 되도록 의도했던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당시 사람들이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보인 반응이기도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거짓 선지자들의 메시지를 듣고 그 이야기가 꼭 이루어져야 한다고 열망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왜 백성들은 거짓 선지자들의 이야기가 꼭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했을까요? 도데체 그 메시지가 어떤 메시지였길래 그랬을까요? 우리는 그 이야기가 어떤 이야기들이었는지 아주 구체적으로 알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그 이야기들이 듣는 사람들이 듣고 싶어하고 바라는 것이었다는 것만큼은 쉽게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선지자들은 백성들이 듣고 싶어하는 것을 전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회원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설교자를 좋은 설교자라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은혜로운 메시지를 전하는 설교자이겠지요. 그렇다면 그 ‘은혜롭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혹시 그 말이 ‘내가 듣고 싶어하던 이야기, 내 입맛에 맞는 이야기를 한다’는 말과 같은 의미인가요? 만약 우리가 이 말을 그런 뜻으로 사용한다면 그것은 완전히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가 설교를 통해서 들어야 할 것이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원칙적으로 내가 듣고 싶어하는 이야기를 듣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 대신 그것은 내가 들어야만 하는 메시지를 듣는 일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좋은 설교자는 성도들이 듣고 싶어하는 메시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들려주시고자 하는 메시지, 그래서 그들이 꼭 들어야 할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성도들이 그걸 듣기를 원치 않고, 설교자가 그것을 전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설교자는 “본 것이 없이 자기 심령에 따라 예언하는 우매한” 설교자가 될 것이고 청중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듣게 될지는 몰라도 그 우매한 이야기, 그저 설교자의 마음 속에서 나온 허망한 이야기나 듣기 좋은 점괘에 귀를 기울이는 우매한 청중이 될 것입니다. 

어찌 생각해 보면 그런다고 해서 큰 일이 날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 뒤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런 이야기를 전하는 일이나 그런 이야기를 들으며 위로를 받고 힘을 얻는 것은 참 괜챦은 일인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그게 그렇지가 않습니다. 일단 그 이야기를 전한 사람은 하나님의 엄청한 징벌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 선지자들이 허탄한 묵시를 보며 거짓 것을 점쳤으니 내 손이 그들을 쳐서 내 백성의 공회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며 이스라엘 족속의 호적에도 기록되지 못하게 하며 이스라엘 땅에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리니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그런 거짓 선지자와 설교자들이 받게 될 첫번째 벌은 백성의 공회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의로운 백성들의 모임에 들어갈 권한을 박탈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설 수있는 은혜를 박탈한다는 뜻입니다. 두번째 벌은 이스라엘 족속의 호적에서 제외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가 더 이상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특히 약속의 땅과 관련해서 재산을 상속받을 모든 권리를 박탈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번째 벌은 이스라엘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중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실 때 그 대상에서 제외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소망만 가지고 살아가는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가장 큰 형벌일 수 밖에 없습니다. 막상 회복된다고 해도 그 땅에 들어가지조차 못하니 말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백성들이 듣고 싶어하는 달콤한 이야기만을, 그것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전해주고, 백성들에게 인정받고 그들 중에 깊이 뿌리내고 싶어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아얘 그들의 뿌리를 뽑아버리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그렇게 진노하실 수 밖에 없는 이유를 다시 한 번 설명해 주십니다. 우리는 이 설명을 통해서 거짓 선지자들이 보았다고 했던 헛된 환상과 거짓 점괘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중요한 단서를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내 백성을 유혹하여 평강이 없으나 평강이 있다함이라 혹이 담을 쌓을 때에 그들이 회칠을 하는도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큰 죄를 지었습니다. 그래서 한 번 징계를 당했습니다. 그런데도 정신을 차리지 못합니다. 이미 살펴본 대로 예루살렘과 성전을 지킨답시고 아세라 여신상을 세웠고, 성전은 온갖 잡신들을 섬기는 만신전이 되게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들에게 다시 한 번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하십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이런 상황에서 이들이 들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평강의 메시지일까요? 아니면 징계와 회개의 메시지일까요? 앞쪽일 수가 없습니다. 뒤쪽이죠. 이들은 그대로 가다가는 더 심각한 하나님의 징계를 받게 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로 온전히 돌이켜야 한다는 메시지를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거짓 선지자들은 정반대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들은 “화로다, 화로다”하고 외쳐야 했지만 “평강하다 평강하다”고 외쳤던 것입니다. 전혀 평강이 없는데, 평강할래야 평강할 수가 없는데 하나님께서 평강을 주실 것이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말들에 대해서 아주 충격적인 표현을 쓰십니다. 그것은 ‘유혹’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회원 여러분, 괜챦지 않은데 괜챦다고 하는 것, 평강할 이유가 없는데 평강하다고 하는 것, 또 복받을 이유가 없는데 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해주는 것. 이런 이야기들은 여러분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의 이야기일 수가 없습니다. 정말 여러분을 아껴서 전해주는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이 비록 여러분이 듣고 싶어하는 이야기일 수 있고, 어쩌면 정서적으로는 꼭 필요한 용기가 되는 메시지일 수도 있지만 엄밀하게 말해서 그것은 여러분을 망하게 하려고 “유혹”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이야기하는 사람의 의도가 아무리 좋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여러분을 완전히 망하도록 유혹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마치 이런 것과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무너진 성벽을 세웁니다. 그런데, 그렇게 쌓아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그렇게 쌓으면 아무리 열심히 쌓는다고 해도 무너져 버릴 것이 분명합니다. 실제로 그 사람만 모르고 있지 다른 사람들이 보면 누가 보아도 허술하기 그지 없고 쌓는 방법도 영 잘못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지켜보던 어떤 사람이 그 사람을 너무 사랑해서, 그리고 그러한 그의 노력이 너무 가상해서 그를 돕기 시작합니다. 그는 다시 쌓은 성벽의 가장 허술한 곳을 석회로 칠하기 시작합니다. 형편없이 쌓아진 곳일수록 더 아름답게 그림으로 치장하고 구멍은 창호지를 발라 메꾸고 그 위에 석회를 덧칠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이구, 그렇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충분하고 말구요. 정말 든든하게 잘 쌓고 있습니다. 이제는 그 누가 쳐들어 와도 끄떡 없겠습니다. 이제 이 안에서 발 뻗고 잠자는 일만 남았네요.” 

우리가 지난 주일에도 살펴보았듯이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망해버린 이스라엘은 스스로를 보호하고자 정말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성을 다시 든든하게 하기 위해서 열심히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허술한 벽, 그래서 하나님께서 반드시 헐어버리게 될 그런 벽을 쌓았습니다. 하나님이 아닌 우상에 의지해서 자신들을 보호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리 열심히 하고 있으니 충분합니다. 이제 안전하고 평안할 것입니다.”라는 메시지가 아니라 그 벽이 아니라 다른 벽을 쌓아야 한다는, 무너져 버린 이스라엘을 보호하려면 우상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온전히 돌아가야 한다는 메시지를 들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거짓 선지자들은 그런 백성들의 노력에 새하얀 페인트를 칠해주고 있었습니다. 여기 저기 구멍이 나 있고, 결국 무너져 버릴 수 밖에 없는 그들이 쌓은 벽에 덧칠을 하며 그림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전혀 평강할 수가 없는, 절대로 괜챦지 않은 상황에서 “평강하다”고 외치는 그들의 메시지였던 것입니다. 

참 선지자라면 성벽이 무너진 곳에 스스로 올라가서 여기가 무너졌으니 여기를 다시 쌓아야 한다고 말해야 합니다. 그렇게 무너진 곳에 올라가는 위험을 감수해야 하며, 선두에 서서 다가올 여호와의 날의 전쟁을 위해서 그 성벽을 다시 든든하게 쌓는 일을 요구하고 지휘하는 수고를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나 당시의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은 선지자들이 아니라 마치 황무지에 돌아다니는 자캴이나 하이에나와도 같은 존재들이었습니다. 무리를 지어 돌아다니면서 다른 동물이 사냥해 놓은 것을 빼앗아 먹는 약삭빠르고 사악하며 이기적인 자캴처럼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성벽이 무너져도 상관하지 않습니다. 거기 올라가는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 그 무너진 곳의 재건을 위한 수고를 감당하지도 않습니다. 그대신 듣고 싶은 이야기만 들으려고 하는 백성들의 귀에 ‘평강하다’는 이야기만 들려주어서 백성들로 하여금 허약하기 그지 없는 자신들이 만든 허약한 가짜 성벽에 의지해서 살아가게 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무너지고 망할 것이 뻔한 길로 백성을 인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들로부터 자신이 원하는 것을 받아 챙기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지막으로 공격할 날을 눈앞에 두고 있었습니다. “여호와의 날”에 있을 전쟁에 대비해야만 했습니다. 성벽의 무너진 곳을 그 전쟁에도 끄떡없을 정도로 견고하게 재건해야 했습니다. 이것이 당시 이스라엘의 상황이었습니다. 무너진 성벽은 눈에 보이는 성벽이 아닙니다. 이 성벽은 영적인 성벽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 그들의 영적인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태는 붕괴 일보직전입니다. 이미 심각하게 무너진 곳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성벽을 제대로 세워놓지 못하면 하나님의 이차공격에 완전히 망하고 말 것입니다. 여호와의 날의 전쟁에 견디지 못하고 완전히 무너져 내리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 전쟁을 견디어 낼 튼튼한 성벽을 쌓아놓아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그런 성벽을 재건할 수 있을까요? 그런 성벽을 쌓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하나님께로 완전히 돌이키는 것 밖에 없습니다. 지금까지의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께 온전히 항복하는 것 밖에 없습니다. 애초에 그들이 무너진 것은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이었고, 그래서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만이 그 일을 다시 제 자리로 돌릴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원래 ‘여호와의 날의 전쟁’이라고 하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한 세력들을 상대로 벌이시는 전쟁을 말합니다. 그들을 징벌하기 위해서 벌이시는 무시무시한 전쟁의 날이 바로 ‘여호와의 날’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번에는 그 전쟁을 이스라엘과 벌이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이방의 악한 나라들에게 쏟아부을 진노를 하나님의 나라, 이스라엘에게 쏟아부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전쟁에서 견디어 내려면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어떤 것도 뚫을 수 있는 창으로부터 보호 받으려면 그 무엇으로도 뚫을 수 없는 방패가 있어야 하듯이, 그 어떤 성벽도 무너뜨릴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피하고 도움을 받으려면 결국 전능하신 하나님의 그늘 아래로, 하나님이라는 성벽 안으로 피하는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아닌 우상으로, 그리고 자기의 힘으로 그 성벽을 쌓았습니다. 그 성벽은 쌓아서는 안되는 성이었습니다. 무너질 수 밖에 없는, 결국 하나님께서 무너뜨리실 그런 성벽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선지자들은 그 형편없는 성벽에 회칠을 해가며 애써 평강의 소식을 전합니다. 전혀 평강이 없는데, 평강할래야 평강할 수가 없는데 말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회칠한 담을 내가 이렇게 훼파하여 땅에 넘어뜨리고 그 기초를 드러낼 것이라 담이 무너진즉 너희가 그 가운데서 망하리니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결론 : 서로를 지켜주는 견고한 공동체여야 한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선지자가 거짓 말씀을 전하고 허술한 담에 회칠을 하듯이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달콤한 말씀을 전하다고 해도 백성이 그것을 분별할 능력이 있고, 그래서 그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는다면 선지자도 계속해서 그런  말씀을 전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반대로 아무리 백성이 원한다고 해도 선지자들이 자기 자리를 지켜며 하나님이 보여주신 것, 말씀하라고 하신 것만 전한다면 백성들은 거짓 메시지를 듣고 유혹을 받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거짓 메시지, 형편없는 담벼락에 석회를 칠하는 메시지, 그리고 평강하지 않은데도 “평강하다”고 외치는 메시지, 복받을 것만을 보장하는 메시지가 외쳐지고 또 들려지는 일은 어느 한 쪽으로만 그 책임을 돌릴 수는 없습니다.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양쪽 모두의 책임이며 그래서 결국은 양쪽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그 책임을 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성도와 설교자는 서로가 서로를 지켜주어야 합니다. 설교자는 거짓 메시지, 허술하고 허약하게 세워진 삶과 신앙의 담벼락에 회칠을 해 주는 메시지를 전하지 않음으로써 성도들을 지켜주어야 합니다. 성도들은 설교자들에게 자신이 듣고 싶은 메시지, 자기 입맛에 맞는 메시지를 요구하고, 그런 메시지를 즐거워하는 일을 떠남으로써 설교자를 지켜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설교자는 무너진 신앙의 성벽을 재건하자고 외치는 목소리가 되어야 하며, 성도들은 그 목소리에 귀 기울여 함께 그 성벽을 재건하는 일에 헌신하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모두가 다 한 방향, 하나님을 향한 방향으로 더 온전히 나아가는 그런 교회를 만들어 가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를 결코 무너지지 않는 하나님이라는 성벽 안에 영원히 거하는 성도들의 교회로 만들어 가야 합니다. 

우리 장년부가 주님 오시는 그 날까지 이런 설교자와 이런 청중들의 공동체로 남아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 오시는 그 날까지 그 어떤 경고에도 견고하게 서 있는 영원히 평강한 사람들의 공동체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