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동부교회 설교/설교듣기

2011년 매일성경 설교 5.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 댓글 남겨주세요. ^^


본문 : 마가복음 9장 30-37절



서론 : 항상 ‘금시초문’

집안에서 왕으로 사는 남편들이 아니라면 대개는 아내에게 핀잔을 듣는 이유를 한 두가지 쯤은 다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물론 저라고 예외는 아니죠. 저에게도 그런 이유가 여러가지 있습니다. 제가 가장 자주 핀잔을 듣는 것은 제가 집사람의 이야기를 주의있게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전혀 기억이 나질 않는데, 집사람의 이야기에 의하면 제가 이미 그 이야기를 듣고 알았다고 대답까지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음 날 그 일이 어떻게 되었느냐고 물으면 저는 항상 ‘금시초문’이라는 듯이 ‘응?‘한다는 것입니다. 전혀 기억이 나질 않는 제 입장에서는 굉장히 억울한 일이지만 제가 알았다고 대답까지 했다고 하니 저로서는 그럴 때마다 그저 겸연쩍게 웃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은 실제로 우리 삶 속에서 꽤 자주 일어납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내가 무시를 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고, 또 무시를 당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남이 한 이야기를 잊어버리는 것도 문제이지만, 더 심각한 경우는 남이 한 이야기를 알아듣지 못하거나 혹은 정반대로 알아듣는 경우가 아닌가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의사소통의 문제가 생겨나는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우리 마음 속에 들어있는 ‘딴 생각’ 때문일 때가 가장 많지 않나 생각합니다. 이야기를 듣습니다. 무슨 뜻인지 모르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그 뜻을 알아듣지 못하거나 곡해합니다. 이미 듣는 사람의 마음과 생각 속에 말하는 사람과는 전혀 다른 관심과 전제가 들어있기 때문에 들어도 기억이 나질 않거나 알아듣지 못하고 혹은 달리 해석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함

예수님께서는 무리들을 따돌리고 제자들하고만 갈릴리로 가는 일을 무척 중요하게 생각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는 그 길에서 제자들에게 자신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말씀해 주실 계획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이 세 가지에 대해서 알고 이해하는 것이 제자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무엇보다도 이것만큼은 제대로 알려주고 싶어하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 때, 그것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그 분의 부활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을 안다고 할 때 반드시 알고 이해해야 하는 부분도 바로 그 분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그 분의 부활입니다. 이 세 가지를 믿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무어라고 해도 예수를 믿는 믿음이 아닙니다. 이 세 가지를 모른다면 그는 결코 예수를 아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실제로 이 세가지는 성도의 신앙의 기초이며, 능력의 근원이고 또 나아가서 성도가 살아가는 삶의 원리이기도 합니다. 처음 예수 믿을 때만 필요한 교리가 아니라 성도의 성도됨을 결정하고 또 그 사람을 계속해서 성도답게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중심기둥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제자들은 이 중요한 이야기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무슨 뜻인지 단어와 문장의 뜻을 모른 것은 아니었지만, 도대체 그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인지를 그 진의를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단순히 그 이야기를 알아듣지 못한 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알아듣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아주 심각한 문제가 생겨났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계시는데 그 때, 그 이야기를 듣는 제자들은 뒤에서 ‘내가 높으니 니가 낮으니’하고 티격태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 두 개의 사건은 얼마나 서로 어울리지 않는 일들입니까? 스승은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제자들은 내가 제일 높다고 일등경쟁에 몰두해 있으니 말입니다. 이 일이 예수님의 마음을 얼마나 답답하고 슬프게 만들었을지 우리는 너무나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누가 가장 큰 자냐?’는 질문에 대한 답을 주시다.

예수님과 함께 가는 그 ‘길’ 위에서 그렇게 우습고도 슬픈, 답답하고 유치한 논쟁을 벌인 제자들이었지만 그들은 그 논쟁의 결론을 얻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서로 자신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일치된 결론을 얻는 것이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논쟁에 대한 답을 주셨습니다. 


집에 도착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불러 모으셨습니다. 그리고는 “너희들이 왜 길 위에서 그렇게 서로 논쟁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모르셔서 물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훤히 알고 계셨지만 그렇게 물으셨습니다. 그 질문은 그 일에 대해서 스스로 깨달을 기회를 주시려는 질문이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예수님의 질문에 제자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얼마나 잘못된 것이었는지, 얼마나 스승의 마음을 무시한 것이었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에게 이런 깨달음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릅니다. 그것은 이제부터 주어질 예수님의 답을 들을 가장 중요한 준비였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들에게 그런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마음조차 남아있지 않았다면 결코 바른 것을 들어도 그것을 받아들이고 그 잘못된 ‘길’을 바꾸어 바른 ‘길’을 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입을 열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예수님은 다툼의 이유를 다시 한 번 밝혀 주셨습니다. 제자들 사이에 다툼이 발생했던 것은 제자들이 서로 첫째가 되려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입니다. 이제껏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면서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놀라운 일들을 모두 목격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권위와 능력을 위임받아서 자신들도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해 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경험들은 그들에게 은근히 그런 예수님의 능력에 기대어서 그리고 그런 능력을 이용해서 한 자리 차지하고 싶은 욕망을 갖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서로 첫째가 되려는 다툼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바로 그것을 지적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상하게도 첫째가 되지 말라고 하시는 대신에 오히려 첫째가 될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셨습니다. 이렇게 해야 너희들이 원하는 첫째가 될 수 있다고 그 비결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그렇게 다툼을 벌일 수 밖에 없없던 것이 그들이 첫째가 되려고 하는 욕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자체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첫째가 되고 싶어하는 ‘장소’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생각하신 잘못된 장소란 바로 “땅”이었습니다. 그들이 땅 위에서 첫째가 되려고 했기 때문에 그런 일들이 벌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땅 위에서 첫째가 되려면 말 그대로 첫째가 되는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려면 다른 사람들과 치열하게 경쟁해야 하며, 이전투구를 벌여야 합니다. 이런 일들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 한, 땅 위에서 첫째가 되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바로 이런 일들이 우리가 살아가면서 나를 더럽히고 교회를 힘들게 하며 또 세상을 어둡게 하는 가장 큰 이유들 중의 하나가 됩니다. 원래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나를 더욱 정결하게 하고,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며, 이 세상을 더욱 아름다운 곳이 되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자꾸 땅 위에서 첫째가 되려고 하는 욕망을 버리지 못하니 그 분과 같은 길을 간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그 분이 가신 길과는 정반대 방향의 길을, 그 분이 남기셨던 열매들과는 정반대의 쓴 열매들을 남기면서 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장 먼저 바로 이것을 지적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첫째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려고 애쓰고 힘써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첫째가 될 수 있는 방법까지 알려 주셨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말씀해 주신 방법은 이 세상에서 첫째가 되는 방법과는 완전히 정반대였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이렇다는 것은 그 분이 지금 땅이 아닌 다른 곳에서 일등이 되는 방법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일등이 되려는 장소가 잘못되었으니 그 장소를 바꾸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땅에서 하늘로 말입니다. 회원 여러분, 우리는 땅이 아니라 하늘에서 일등이 되도록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이 부르심 대로 땅이 아니라 하늘에서 첫째가 되려고 한다면, 그렇게 일등이 되려는 장소를 바꾼다면 우리는 이 땅 위에서의 일등이 되려는 이전투구를 그칠 수 있습니다. 나를 더럽히고, 교회를 힘들게 하며, 또 세상을 어둡게 만드는 일을 멈출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수님과 같은 길을 간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가는 우리의 고질적인 문제도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내가 어디서 첫째가 되어야 할 것인지 그 장소를 결정해야 합니다. 땅 위에서 일등을 할 것인가 아니면 하늘에서 일등을 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합니다. 만약 땅 위에서 일등이 되려고 한다면, 그렇게 잠시잠깐만 일등을 하고 영원히 꼴지로 남으려고 한다면 오늘 주님의 말씀은 아무런 가치도 없고 전혀 상관도 없는, 오히려 비상식적인 말씀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에서, 그 영원한 나라에서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 일등이 되는 것이 여러분의 목표라면, 오늘 이 말씀은 충분히 아니, 반드시 귀를 기울여야 할 가장 가치 있는 말씀이 될 것입니다. 주님은 그래서 이 말씀을 그 때 제자들에게, 그리고 지금 우리들에게 해 주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뜻

주님은 하늘에서 첫째가 되라고 하시면서 그러려면 모든 사람의 마지막이 되고, 모든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회원 여러분, 그렇다면 왜 하늘에서 첫째가 되려면 이 땅에서 모든 사람의 마지막이 되고, 또 모든 사람들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할까요? 이 두 가지는 어떤 직접적인 관계가 있을까요? 낮아짐과 섬김이 우리에게 천국에서 첫째가 되게 해 줄만큼 엄청난 가치를 지닌 일이기 때문일까요? 그렇게 생각기 쉽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이런 겸손과 섬김도 우리의 공로로 전락해 버리고 말 것입니다. 


회원 여러분, 여기 이 세상에 모든 사람보다 낮아져서 모든 사람을 섬길 수 있는 한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리고 이 사람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봅시다. 이 사람은 과연 땅과 하늘에 대해 어떻게 여기며 살아가는 사람일까요? 과연 이 사람은 하늘이 아니라 땅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일 수 있을까요? 그래서 땅에 집착하며 땅에서 일등이 되려고 하는 욕심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그런 사람일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결코 그럴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정반대일 수 밖에 없습니다. 만약 땅에서 기꺼이 꼴찌가 되고 모든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 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땅이 아니라 그만큼 하늘을 무겁고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만큼 땅에서 높아지는 일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결코 모든 사람보다 낮아져 그들을 섬기는 사람이 되려는 소원을 가질 수도 없고, 또 그런 사람으로 스스로를 낮출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만약 어떤 사람이 이 땅에서 마지막이 되고 모든 사람들을 섬길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면, 그런 일에도 개의치 않을 수 있다면, 그것만큼 그가 하늘을 소중하고 무겁게 생각하고 살아가고 있다는 명확한 증거는 없을 것입니다. 그가 그렇게 하늘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살았기 때문에 하늘의 영광이 그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회원 여러분, 하늘의 영광은 아무에게나 무작위로 주어지는 값싼 선물이 아닙니다. 하늘영광은 하늘을 중요하게 여기는 자에게만 특별하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 영광을 너무 소중하고 무겁게 여기기 때문에 이 땅에서 기꺼이 낮아질 수 있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미미한 존재인 ‘어린 아이 하나’보다 낮아져 그를 섬겨도 전혀 상관없다고 여기는 그런 사람들의 것입니다. 이 땅 위에서 하늘 때문에 그만큼 낮아져서 섬기며 살았기 때문에, 그만큼 하나님 나라를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그 나라의 가장 중요한 자리는 그런 사람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하늘을 얻으려고 자신을 낮추었으니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그를 높이시는 것은 그에게 주어지는 너무나 당연한 상일 수 밖에 없습니다. 


결론 : 십자가의 길 속에 있는 영광을 보자.

예수님께서는 가버나움으로 가는 ‘길’에서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길’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예수님의 길은 바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따로 이 이야기를 하셨던 이유는 단순히 앞으로 자신에게 있을 일에 대해서 설명해 주시고 그에 대해서 준비하게 하시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고통에 대한 정보를 주시고자 함도 아니었습니다. 물론 그 ‘십자가의 길’은 예수님께서 이루실 구원에 대한 가장 중요한 사건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아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그렇지만, 그 ‘십자가의 길’이야 말로 ‘제자들의 길’이 되어야만 하고, 나아가서 ‘하늘 영광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에 주님은 제자들에게 그 ‘길’에 대해서 이야기 해 주실 수 밖에 없으셨던 것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신 구원의 자리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십자가는 성도들의 모든 삶의 원리가 흘러나오는 원천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고 대할 때, 다분히 감성적으로 접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 분의 고통, 그 분의 희생, 그리고 그 분이 사랑...이러 것들을 생각하면서 눈물을 흘립니다. 감사해 하기도 하지만 굉장히 죄송스러워 합니다. 물론 십자가의 사랑과 희생, 그리고 우리를 위한 고통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컸고, 또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나 때문에 그런 고통을 당하신 것에 대해 미안해 하기도 하고 감사해 하기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께서 그 십자가를 지실 때 결코 마지못해 억지로 지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 일이 예수님에게 엄청난 고통을 가져다 주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분이 그 일을 억지춘향으로 감당하신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히브리서 12장 1절은 우리에게 믿음의 주요 그 믿음을 온전케 하시는 분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자고 권면하면서 그 분의 십가가에 대해 이렇게 증거합니다.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무엇 때문에 십자가의 고통을 참고 그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았다고 말합니까? 그것은 바로 ‘즐거움’입니다. 그 분은 그 십자가 앞에 있는 즐거움, 하나님 우편에 앉는 그 즐거움을 눈으로 보셨기 때문에 그 고통스러운 십자가를 당당하게 지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셨던 ‘십자가의 길’에 대한 말씀 속에는 예수님께서 잡히시고 죽게되는 일 뿐만 아니라 부활도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더 이상 낮아질 수 없는 최고의 낮아짐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다시 일으키시고 가장 높은 자리, 하나님의 우편에 앉는 가장 높은 영광을 주셨던 것입니다. 십자가의 길 속에는 이 모든 것이 함께 들어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걸어가셨던 길이고, 예수님께서 그 분을 따르는 우리 모두가 걸어가기를 바라시는 길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수 있었던 이유는 그 분이 항상 부활과 하늘의 영광을 바라보셨기 때문입니다. 그 무한하고 영광스러운 즐거움을 생각하시며 십자가의 고통을 견디셨던 것입니다. 가장 높아지는 것을 소망하고 확신하시며 더 이상 낮아질 수 없는 자리로 기꺼이 낮아지셨던 것입니다. 회원 여러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십자가의 길을 가라고 하시는 것이 우리를 괴롭히시려고 그럴까요? 그 분은 우리에게 희생만 강요하시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주님은 그 뒤에 따라오는 영광을 주시고 싶어서 우리를 그 길로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그 영광과 즐거움을 우리에게도 나누어 주시려고 말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생각하면 자꾸 고통과 희생만을 떠올립니다. 힘들고 어려울 것만 상상합니다. 우리가 그 길을 가려는 엄두조차 내질 못하는 것은 우리가 십자가를 그렇게 생각하는 버릇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회원 여러분, 십자가의 길에는 ‘고난과 죽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길에는 ‘부활’도 있습니다. 낮아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지극히 높아지는 일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히려 낮아짐은 그 높아짐을 위해, 그 영광을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 할 길로 포함되어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볼 때, 그 속에서 고통과 죽음, 희생만을 보아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거기서 우리를 위해 활짝 열린 ‘영광스러운 길’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영광으로 우리를 초대하시는 먼저 가신 주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길이 억지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힘들지만 기꺼이 가고자 하는 길이 될 수 있고, 항상 나를 낙심하게 하고 넘어지게 하며, 될 수 있으면 피하고 싶은 길이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회원 여러분, 우리는 제자들처럼 주님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그 분과 같은 길에 있다고 하면서도 얼마든지 일등경쟁에 휘말릴 수 있습니다. 여전히 내가 첫째라고 주장하며 또 첫째가 되려고 이전투구를 벌일 수 있습니다.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주님은 하늘에 대해 말씀하시는데, 계속해서 땅에 대한 ‘딴 생각’으로 그 말씀을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 속에서 일어나는 이런 비극들을 방지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땅에 고정되어 있는 우리의 관심을 하늘나라로 돌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땅이 아니라 하늘을 진짜, 그리고 영원히 중요한 곳으로 여기고 그래서, 그 나라에서 첫째가 되기 위해서 여기서 가장 낮은 자가 되는 것도 마다하지 않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될 수 있으면 큰 욕심을 품으셨으면 합니다. 욕심을 좀 내시기를 바랍니다. 일등이 되려고 첫째가 되려고 욕심을 내시고, 그것을 위해서 서로 다투고 논쟁하며 경쟁하십시오. 단, 땅에서가 아니라 하늘에서, 그리고 잠시동안이 아니라 영원히 첫째가 되려고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너희가 노중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너희가 무엇 때문에 그렇게 서로 다투느냐?”라고 물으실 때, “네. 주님. 서로 자기가 더 낮은 사람이라고 싸웠습니다. 또 어떻게 하면 더 낮아질 수 있을까 토론했습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께 이런 복된 대답을 해 들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늘은 이런 대답을 할 수 있는 가장 사람을 존중합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에게 가장 높은 자리를 내어줄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삶을 통해 우리가 땅이 아니라 하늘을 더 크고 중요하게 여기고 있음을 증명해 낼 때, 우리는 비로소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능력있는 사람들이 될 것이고, 하나님께서는 그 나라의 영광으로 우리를 영원히 영광스럽게 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나중에 하나님 앞에서 이런 복된 성도들로 인정받고 또 영원한 영광의 상을 받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약속 : 하나님은 하늘나라를 가장 무겁게 여기며 사는 자에게 하늘영광을 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