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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교회 설교/설교듣기

2011년 매일성경 설교 - 8. 앞서 사로잡히리니





본문 : 아모스 6장 1-14절



서론 : 노블리스 오블리주...권위와 특권에 대하여

다른 나라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우리나라와 서양의 여러나라를 비교해 보면 일반 국민들이 경제적으로나 혹은 정치적으로 지도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시각이 굉장히 많이 틀린다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서양에서는 각 분야에서 리더십을 가지고 있고, 또 거기에 걸맞는 이런 저런 특권이나 부를 누릴 때, 그것에 대해서 무조건 좋지 않은 눈으로 보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문화는 굉장히 권위적이면서도 지도력을 가진 사람들이 이런 저런 특권과 부를 누리는 것에 대해서 상당히 좋지 않은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사실입니다. 특히 비교적 많이 가지지 못한 사람들일 수록 그런 경향이 더욱 강합니다. 일이 이렇게 된 것은 아마도 그 동안의 우리나라의 상황에서 보면 지도자가 되고 부자가 되는 일이 정정당당한 과정과 수단보다는 그렇지 않은 과정과 수단을 통해서 더 많이 이루어져 왔고, 그렇다는 것을 모두가 다 알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과정에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런 지도력을 가지게 되고, 그래서 또 특권과 부를 누리게 된 사람들이 그 다음에 취한 행동들이 더 큰 문제였습니다. 그렇게 지도력과 특권을 가진 후에 소위 ‘노블리스 오블리주’라는 정신을 가지고, 그것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굉장히 드물었기 때문입니다. ‘노블리스 오블리주’라는 말은 말 그대로 번역하면 “귀족은 의무를 가진다”라는 뜻이 되는데, 보통 부와 권력, 명성은 사회에 대한 책임과 함께해야 한다는 의미로 쓰인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사회지도층에게 사회에 대한 책임이나 국민의 의무를 모범적으로 실천하는 높은 도덕성을 요구하는 단어가 되는 것입니다. 어느사회에서 이런 가치관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은 그 사회에서는 자신의 권력이나 지도력, 그리고 그에 따라는 부와 명성이 단지 자신의 능력으로 얻어진 자신의 것이 아니라 자신을 그 자리에 있게 한 사회의 덕분이라는 것이 널리 인정되고 있다는 뜻이고, 사람들이 그래도 그런 부담감을 많이 느끼고 있다는 뜻이 될 것입니다. 


이런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사는 사회와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사는 사회에서 지도층을 바라보는 눈이 같을 수가 없습니다. 지도력이 주는 특권에 대해서 사회를 향한 선한 의무를 느끼고 그 의무를 다하려 노력하는 지도층은 인정받고 존경받지만, 그 지도력을 정반대로 이해하고 사용하는 지도층이 신뢰받지 못하고 오히려 지탄의 대상이 되는 것은 어찌보면 너무나 당연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볼 때도, 상식적으로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지도력이나 그 지도력을 통해 주어지는 이런 저런 특권들을 생각할 때, 그것들이 사람들 없이, 자신이 몸담고 살아가고 있는 사회가 없이 진공상태에서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만큼은 인정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 지도력과 특권을 가능하게 한 것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바로 그 지도력을 위임해 주고 그에 따르는 특권들을 부여해 준 그 사회나 혹은 집단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 사람은 이미 지도력을 가지고 그것을 사용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자신의 지도력의 근원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우리 믿는 사람들이 지도력에 대해서 가져야 할 생각은 이것보다 훨씬 더 깊고 무거워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모든 지도력의 근원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며, 그 지도력을 행하하는데 필요한 능력도 하나님으로 부터 받는다는 사실을 믿고 고백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우리가 우리에게 맡겨진 지도력을 행사할 때는 일반적인 원리나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에 따라서 그렇게 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과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의 의미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주변의 여러나라를 향해 그 나라들의 범죄로 인해서 당하게 될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어느나라도 그 심판으로 부터 면제될 수는 없었습니다. 각각의 나라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너무 심각한 상태에 있었고 그래서 깨끗하게 정화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라고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비록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자녀의 나라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열외가 될 수는 없었습니다. 오히려 이들에게 주어질 징벌은 더 크고 강력했습니다. 물론 이 징벌은 멸망이나 고통이 아니라 회복을 전제로 하고 목적으로 하는 것이기는 했지만 다른 나라들이 당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고통스러웠습니다. 하나님이 이들을 이렇게 다루실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이들이 하나님이 그 어떤 나라나 민족보다도 사랑하는 자녀들이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거기에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당시 남쪽 유다를 포함한 이스라엘은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나라였습니다. 주변의 모든 나라들은 전혀 다른 신을 섬겼습니다. 이런 사실 때문에 그들은 온 세상의 제사장 나라가 되어야 했고, 나아가서 주변의 모든 나라들에게 하나님을 드러나게 증거할 수 있는 유일한 나라였습니다. 그렇게 자동적으로 선교적인 존재가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입장에서 보면 주변 나라들을 위한, 그리고 나아가서는 전 세계를 위한 영적인 지도자로 세워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을 떠나는 것은 단순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유일하게 하나님을 드러낼 수 있는 나라가 자신이 섬기는 하나님을 이런 저런 현실적인 이유로 헌신짝 버리듯 버리고 떠나게 될 때, 주변의 다른 신을 섬기는 나라들이 그 하나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하나님은 저렇게 언제든지 버리고 떠나도 될만큼 별 볼일 없는 신이라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또 저렇게 부와 명예, 현실적인 이익과 바꿔도 될만한, 지금 자신들이 섬기는 신들보다도 하등한 신이라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온 세상을 위한 제사장 나라, 영적인 리더로 세워진 이스라엘에 의해서 하나님의 명예와 영광은 그런 식으로 더럽혀지고 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그 직분을 주시면서 그에 따르는, 다른 민족들은 결코 누리지 못한 특권과 복을 주셨지만 바로 그 이스라엘이 그렇게 하나님을 배반하고 떠났고, 그래서 하나님은 이 이스라엘을 계속 그냥 내버려 두실 수가 없으셨던 것입니다. 그들이 모든 나라들 중에서도 가장 무겁고 강한 징벌을 받을 수 밖에 없었던 또 하나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징벌의 원칙은 이스라엘과 주변의 이방나라들의 관계에만 적용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똑같은 원칙을 이스라엘 백성들 내부에도 그대로 적용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을 벌 주실 때, 일반백성들보다 지도자들을 훨씬 더 혹독하게 벌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주변의 모든 나라들을 위한 영적인 지도자요 제사장 나라였다면,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이스라엘 안에서 그런 역할을 감당해야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으로 이스라엘 안에 살면서 그 땅에 하나님의 뜻을 펼치며 백성들을 섬겨서 그 나라에 하나님의 영광이 찬란하게 빛나게 해야할 임무를 맡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이런 거룩한 책임을 맡은 지도자들이 이스라엘의 타락과 배도의 선봉장 노릇을 했던 것입니다. 


누군가가 다른 사람에게 없는 권위를 위임받는다는 것은 그 권위를 행사할 수 있는 힘, 그러니까 권력을 동시에 부여받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힘이 없으면, 권한이 없으면 권위는 무용지물이 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누군가에게 권위를 위임한 사회나 집단은 그가 그런 책임을 감당하는 댓가로 특권과 부를 제공하게 됩니다. 만약 지도자들이 그저 여기에 만족한다면, 이 세상에는 지도력으로 인한 문제는 결코 생겨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힘을 가지게 되면, 그 힘이 위임받은 하나의 도구임에도 불구하고, 그 힘을 사용해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가지려들게 됩니다. 그게 돈이건, 명예이건, 혹은 더 큰 영향력이건 역할을 잘 수행하게 하기 위해 부여받은 힘을 자기 이익의 도구로 사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에서 자신들이 돌보고 잘 이끌어야 할 백성들은 큰 고통을 당하고 절망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일반적인 경우에도 큰 문제지만 이스라엘의 경우에는 정말 심각한 문제가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단순히 정치적인 리더십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영적인 지도력도 함께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이들은 정치적인 지도력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이스라엘을 영적으로 바로 인도해야 하는 이중의 책임을 맡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이 무너진다는 것은 결국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보여주어야 할 사람들이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현실로 이어지게 할 고리가 없어지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일상생활이 무너진 것은 물론이고 그들의 신앙까지 피폐해 질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향해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는 사로 잡히는 자 중에 앞서 사로잡히리니...”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이스라엘을 무너지게 하는데 선봉장의 역할을 했으니, 그들이 가장 먼저 사로잡히고 끌려갈 때도 맨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들이 비록 전에는 “시온에서 안일한 자”였고 “사마리아 산에서 마음이 든든한 자”였으며, “열국 중에서 우승하여 이스라엘 족속이 따르는 자”들이었지만, 누구나 그렇게 되고 싶어하고 부러워하는 사람들이었지만 이제는 가장 큰 수치와 가장 큰 고통과 모독을 당하는 사람으로 전락해 버릴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당시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생활상이 나옵니다. 성경은 그것에 대해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예전에는 왕이나 누울 수 있었던 상아로 만든 침대에서 잠을 잤습니다. 그들의 아내들은 누가 더 비싸고 큰 상아침대에서 잠을 자는가 하는 것으로 경쟁을 벌였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낮 동안에는 열심히 백성들을 돌보며 지도자의 역할을 하는 대신에 온 몸이 푹 꺼지는 소파에서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며 게으른 괴성을 질러댔습니다. 음식은 야들야들한 어린 양과 송아지 고기만, 그것도 먹고 싶은 것을 그 날 그 날 골라 먹었으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대신 자신의 헛된 욕망과 감정을 부축여 줄 헛된 노래를 흥얼거렸고, 기존에 있었던 악기들로는 심이 차지 않아서 자신을 위한 특별 악기를 제작하기도 했습니다. 술을 즐기는 수준이 아니라 아얘 대접으로 퍼 마셨습니다. 그리고 한 병에 수 백만원이 넘는 향유를 온 몸에 발랐습니다. 


이들이 이런 생활을 즐기고 유지했다면, 이들의 지도력은 이미 백성들을 위한 것일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힘은 이미 지도력을 행사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더 많이 가지고, 더 많이 누리고, 더 마음대로 하기 위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도구로 사용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들이 ‘요셉의 환란’에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습니다. 자신들의 그런 호사스런 생활을 유지되게 하기 위해서 백성들이 얼마나 고통당하고 있는지, 그리고 앞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어떤 징벌을 내리실 것인지에 대해서는 신경쓸 여력이 없었을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하나님이 이런 이들에게 이스라엘이 당할 징벌 중에서도 가장 심한 징벌을 당하게 하고, 가장 큰 모욕과 수치를 당하게 하시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도 정당한 것입니다. 하나님 대신 나라를 다스릴 권위와 힘, 그리고 큰 특권까지 주었지만 그것으로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고 백성들을 고통에 빠뜨렸기 때문입니다. 


흉한 날이 멀다고?

사람들은 거의가 지도자의 위치에 서고 싶어하며, 그 자리에서 지도력을 행사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회원 여러분, 지도력이란 무척 무겁고 또 무서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권위를 주시고, 그 권위를 행할 수 있는 힘을 주시는 것은 우리에게 큰 은혜고 영광임에 틀림이 없지만, 그런만큼 권위와 힘은 무겁고 부담스러운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크고 작은 권위를 가지고, 그에 따르는 힘을 적절하고 겸손하게 사용한다면 그것들은 나중에 우리를 가장 영광스럽게 해 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반대의 경우라면 오히려 그 권위와 힘 때문에 가장 크게 낭패를 당할 지도 모릅니다. 


오늘 본문의 이스라엘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지도력을 그렇게 말도 안되는 곳에, 말도 안되는 방법으로 사용하게 된 것은 그들이 자신들의 욕심을 제어하고 다스리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이 그런 삶을 살았던 이유, 그렇게 하나님께서 주신 복과 특권을 오히려 자신을 망하게 하고 백성들을 망하게 하는 도구로 사용할 수 밖에 없었던 더 깊고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9절은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흉한 날이 멀다하여 강포한 자리로 가까워지게 하고”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에 대해서 “나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백성들을 고통과 타락으로 밀어넣고, 자신들도 결국은 망하게 될 그런 길을 가고 말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그들이 “흉한 날이 멀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언젠가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니, 있을 것이라고 믿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때는 아직 멀다고 생각했습니다. 적어도 자신의 살아생전에는 절대로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바로 그들의 그런 생각이 그들을 그런 길로 밀어넣었던 것입니다. 


저는 요즘 과연 오늘날의 성도들이 하나님 뵐 날을 생각하면서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또 교회의 지도자들이 과연 하나님을 뵐 생각을 하며, 그 날에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교회에서의 섬김에 대해서 드릴 말씀을 준비하면서 살아가고 있는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제 생각에는 애석하게도 별로 그런 것 같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너무 걱정되고 마음이 떨립니다. 분명히 그 날은 올 것이고, 우리는 그 분 앞에 서게 될 것인데도, 우리가 그것을 정말 아는지, 믿는지, 그 날을 두려워하며 긴장하고 살아가는지 확신이 서질 않습니다. 


죽기 전에 우주의 종말이 오지 않는다고 내가 그 날을 맞이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내 살아생전에 벌을 받지 않는다고 다 끝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사는 세월은 아주 짧습니다. 그 이후에 우리가 살게될 저 위에서의 영원한 세월에 비하면 정말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의 시간입니다. 이 땅에서의 이 없는 것처럼 짧은 시간이 끝나면 우리는 영원의 문턱에서 하나님을 뵈어야만 합니다. 그 분과 독대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분의 그 빛나는 보좌 앞에서 우리의 인생에 대해서 결산해야 하는 순간을 맞이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 때는 아무 것도 숨기지 못할 것입니다. 숨기려하고 가리려고 해 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때 우리는 그 분 앞에 투명하게 서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회원 여러분, 그렇다면 말입니다. 그게 사실이라면 우리는 정말 뭐라도, 무슨 말이라도, 적어도 우리 삶에 대해서 뭐라고 변명할 말이라도 하나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요? 적어도 “제가 연약해서 그랬습니다”라고 핑계대도 부끄럽지 않을 수 있을 정도의 삶은 살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흉한 날이 멀다”고 생각하는 한, 그 흉한 날은 결코 나에게 호의적인 날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흉한 날이 멀다”고 생각하고 사는 한, 우리는 결코 그 날을 준비하며 살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흉한 날”이 가까이 있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비로소 그 날을 두려워할 수 있고 그래서 그 “흉한 날”을 준비할 수 있습니다. 그 흉한 날이 우리에게는 가장 영광스럽고 기대되는 날이 되게 할 수 있습니다. 


지도력과 영향력을 주시는 이유

회원 여러분, 여러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실지도 모르지만 사실 우리는 그 누구를 막론하고 자신만의 위치가 있으며, 또 가진 것이 있게 마련입니다. 이 세상에 그 어떤 것도 가진 것이 없고, 그 누구와의 관계 속에서 아무런 위치를 가지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크든 작든, 강하든 미미하든 그것을 통해서 세상과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며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다른 사람에게 의미있는 누군가로 불리우고 있고, 또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어떤 자리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그것을 증명하는 증거입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리더십의 문제는 단순히 지도층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리더십의 문제는 모든 사람의 문제이며 특히 모든 성도들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이방나라들 사이에서 살게하셨고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서 살게 하셨던 이유와 우리가 지금 이 세상에서 사람들과 어울려 살며, 교회 안에서 성도들과 어울려 살아가게 하시는 이유는 꼭 같습니다. 은혜를 주시고, 권위를 부여하시며 이런 저런 직분과 위치를 가지고 살아가게 하시는 이유는 그 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선하신 뜻대로 나눠주신 크고 작은 권위와 소유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며,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드러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세상이 인간이 대단하다고 외치듯이, 교회는 성도가 대단하다고 부축이는 그런 시대입니다. 그러나, 세상이 그 대단한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말해주지 않듯이, 교회는 그 대단한 성도가 어떤 가치있는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 귀한 존재로서 가져야 할 ‘노블리스 오블리주’에 대해서는 그만큼 많이 이야기해 주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런 세태는 무책임하고 무의미한 것입니다. 그런 이야기들이 듣기는 좋고 우리의 기분을 달래 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진짜로 우리를 그만큼의 가치를 지닌 사람들로 살아가게 해 주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특별한 은혜와 특권을 주시는 것은 우리가 이 땅에서 그에 걸맞는 삶을 살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시기 위해서 입니다. 우리가 더 이상 우리 자신이 아닌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게 하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그렇게 특별한 은혜를 주시고 이런 저런 지도력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좋은 것들이 오히려 우리에게 독이 되고 해가 되지 않게 하려면 결코 이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을 이 목적에 맞추어 가야 합니다. 


결론 : “흉한 날”이 영광스러운 날이 되게 하자. 

우리가 더 큰 지도력을 원하는 것은 그 리더십이 강하고 화려하며 그래서 매력적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회원 여러분, 리더십은 마냥 좋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사회의 리더십도 그렇지만 교회의 리더십은 더욱 그렇습니다. 리더십은 그것이 강하고 화려한 만큼 무겁고 부담스러운 것입니다. 적어도 예수를 믿는 우리들에게는 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 거기에는 항상 하나님의 무게가 실려있기 때문입니다. 그 무게와 부담을 제대로 헤아릴 줄 아는 사람들, 그리고 그 무게를 거부하지 않는 사람들만이 그 리더십을 자신과 하나님, 그리고 사람들 모두에게 유익하게 사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우리들 모두에게 크고 작은 영향력들이 결코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부끄럽게 하거나 난처하게 하는 것이 되지 않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그런데, 그러려면, 우리는 “흉한 날은 결코 멀지 않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흉한 날을 가장 영광스러운 날로 맞이하기 위한 준비를 해야만 합니다. 내가 가진 지도력과 영향력을 그것을 맡기신 하나님과 그것의 혜택을 입어야 할 사람들 중심으로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며, 사람들에게도 진정으로 유익할까를 생각하면서 조심스럽게 사용하십시오. 그리고, 원래부터 그 리더십에 동반되는 권위와 특권으로만 만족하십시오. 결코 더 욕심내지 마십시오. 더 확장하려하지 마시고, 더 부풀리려 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나의 영향력, 내 소유와 지도력은 결코 독과 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나를 가장 영광스럽게 하고 영원히 영광스럽게 하는 복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일이, 흉악한 날에 우리를 영광스럽게 하는 가장 큰 이유가 되게 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약속 : 하나님은 내가 소유와 영향력을 하나님을 위해 사용할 때, 흉악한 날을 영원히 영광스러운 날이 되게 해 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