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동부교회 설교/설교듣기

2011년 부활절 새벽설교 - 벌써 돌이 굴려졌으니


본문 : 마가복음 16장 1-8절



성도 여러분, 오늘은 부활절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그 새벽입니다. 서로 부활절 인사 한 번 나눠 볼까요? 이렇게 인사해 보세요. “예수님이 살아나셔서 너무 너무 감사합니다. 너무 기쁩니다.” 할렐루야! 

우리가 믿는 기독교 신앙의 전통에는 아주 아주 중요하게 여기는 절기들이 있습니다. 그 절기들 중에서도 예수님과 관계된 절기들은 특별히 더 그렇습니다. 성탄절, 종려주일, 수난일, 부활절, 그리고 이 날들과 관련된 주간들... 그렇지만 이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날은 바로 오늘, 부활절입니다. 물론 예수님과 관련된 모든 날은 분명히 그 어떤 한 날도 생략되거나 가볍게 여길 수 없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부활절은 나머지 모든 날들이 진정한 의미를 가질 수 있게 하는 가장 결정적인 날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그 분의 탄생이나 삶, 예루살렘 입성이나 십자가에 달리심... 그리고 죽으심조차도 한 위인과 관련된 일화가 될 수는 있어도 우리들의 구원과는 전혀 상관없는 날일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빛 아래에 있을 때라여 나머지 모든 사건들은 비로소 자신의 광채를 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삼일 째되는 날, 그러니까 성경의 기록대로 하면 안식일이 지난 다음 날 새벽, 두 명의 마리아와 살로메가 제대로 격식에 따라 장사지내지지도 못한 예수님의 시신에 향유라도 발라 줄 요량으로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습니다. 제자들을 비롯한 그 누구도 그렇게 하려고 엄두조차 내지 못했지만, 안식일이 지나자 마자, 세 명의 여인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무덤이 가까와 오자 이들에게는 걱정이 하나 생겼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그 굴에 장사지내지던 날 그 굴 입구를 막아놓은 그 엄청난 크기의 돌을 어떻게 치우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돌을 치워야 향유를 발라드릴 수 있을텐데, 가냘픈 세 여인의 힘으로는 도저히 그 어마어마한 돌을 옮길수가 없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 이 여인들 당사자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걱정을 하며 예수님의 무덤에 도착한 여인들은 너무 너무 놀랐습니다. 그렇게 걱정하던 그 돌이 이미 옆으로 둘려져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필시 누군가가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가거나 아니면 훼손시켰을 것이 분명했습니다. 허겁지겁 너나 할 것 없이 굴 속으로 뛰어들어간 여인들은 말 그대로 놀라서 심장이 멎을 뻔 했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은 간 데 없고, 그 대신 하얀 옷을 입은 한 청년이 예수님의 시신이 놓여있던 오른 쪽에 앉아있었기 때문입니다. 청년이 그 여인들에게 말합니다.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않는다. 보아라 이 자리가 그 부분의 시신을 두었던 곳이다. 그리고 가서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전해라. 예수님께서 그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서 기다릴 것이고, 그들을 만나실 것이라고 말이다.” 

그런데, 이 말을 들은 여인들은 그 무엇도 생각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여인들에게 처음에 찾아온 것은 놀라움이었지만  그 놀라움은 이내 두려움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그 두려움에 사로잡힌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저 도망치는 일 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살아계실 때, 당신의 십자가 위에서의 죽으심 뿐만 아니라 그 죽음을 이기고 사시는 부활에 대해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잠시 잠깐 스스로 죽음으로 들어갈 것이지만, 결코 그 죽음은 자신을 영원히 가두거나 묶어놓지 못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실제로 그 분이 가시는 곳에서는 이미 이런 일들이 일어나곤 했습니다. 어둠은 빛이 되었고, 사람들에게 드리워져 있었던 이런 저런 질병이라는 죽음의 그림자는 생명 앞에서 힘을 잃고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심지어는 여러 차례 죽은 사람도 살려주심으로써 그 분 앞에서 죽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보잘 것없고 힘없는 것인지를 스스로 증명해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분의 말씀대로 그 분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이제 일어나야 할 일은 그렇게 죽으신 그 분이 다시 살아나는 일 하나만 남아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 그 말씀이 무슨 이야기인지 조차 알아듣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그 다음에 부활이 올 것이라는,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더더욱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예수님의 죽음은 그 뒤에 부활을 알리는 승리의 나팔소리로 들릴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그들에게 그저 말 그대로 ‘마지막이며 완전한 끝’이외에 그 어떤 의미도 가질 수 없었습니다. 

죽음이 끝이라면, 비록 죽은 것이 예수님이라고 하더라도 죽음 이후에 남는 것은 ‘시체’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시체에게 해 줄 수 있는 일이란 그저 잘 장사지내주는 것 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사람들이 이미 죽은 사자(死者)의 장례에 그렇게도 정성을 드리는 이유입니다. 그것 밖에 더 이상 해 줄 수 있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인들의 행동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정말 용기있고 숭고한 행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은 여전히 다시는 그 어떤 것도 다시 시작할 수 없는, 그래서 더 이상 어떤 기대를 가질 수 없는 끝을 맞이한 사람들의 행동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셨고 그래서 결코 다시 사실 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한 행동이었던 것입니다. 

죽음은 그들에게 도저히 옮길 수 없는 무덤의 돌문이었습니다. 너무 무거워 아무리 힘써도 옮겨놓을 수 없는 그런 엄청난 크기의 바위 말입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만약 죽음이 바위라면 인간에게 죽음보다 더 크고 엄청난 바위가 어디있겠습니까? 죽음처럼 그 앞에서 완전히 무기력해지고 나약해지며 자포자기하게 만드는 거대한 바위가 어디있겠습니까? 아무리 노력하고 힘을 써도 그 바위는 여전히 그 자리에 버티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바위는 이미 옆으로 굴려져 있었습니다. 여전히 그 크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옆으로 치워져서 그 나약한 여인들에게 길을 비켜주고 있었습니다. 

청년은, 그들에게 청년으로만 보여졌던 흰옷을 입은 천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청년은 그들에게 번지수가 잘못되었다고 말합니다. 이미 살아나신 예수님을 찾아 무덤으로 오는 것은 번지수를 잘못 짚어도 한참 잘못 짚은 일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거기 계시지 않으셨습니다. 무덤은 죽음의 장소이지 생명의 장소, 부활의 장소가 아닙니다. 그래서 그 곳은 생명이신 예수님을 영원히 머물게 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고, 이미 살아나신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거기 계실 이유가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런 예수님을 믿는 이유는 그 분이 다시 사셨기 때문입니다. 그 분이 나를 대신해서 죽으셨기 때문에 그 분을 믿는 것이 아니라 다시 사셨기 때문에, 다시 사신 분으로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이 부활절 새벽에 묵상하고 다시 새겨야할 우리 믿음에 관한 진실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십자가에 달라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찾아서는 안됩니다. 그 그리스도를 잊어서는 안되겠지만, 항상 그 예수님만 생각하고 그 예수님만 만나려 해서는 안됩니다. 이제 우리가 찾는 예수님, 그렇게 찾아 만나야 하는 예수님은 이미 살아나셔서 이미 무덤 속, 그 어둠 속, 죽음의 장소에 있을 필요가 없는, 아니 거기 계실 수 없는 빛이시고 생명이신 예수님이십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한, 우리는 더 이상 어둠 속에, 죽음 속에, 무덤 속에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그 믿음을 통해 죽음이라는 가장 짙은 어둠을 이기고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우리는 이미 그 분과 함께 그 가장 찬란하게 빛나는 영원한 생명 속에서, 그 생명의 다스림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는 그 어떤 어둠 속에도 갇혀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은 이미 무덤 앞을 막고 있는 그 거대한 돌을 치워놓으셨습니다. 그 분이 그러셨듯이 죽음 아래, 그 어두운 무덤 속이 아니라 광명 속으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새 생명을 향해 나아오라고 말입니다. 아니, 이미 우리가 그 광명과 생명 속에 있음을 누리라고 말입니다. 

부활이 있어서 우리 신앙은 생명이 되었습니다. 부활이 있어서 우리 신앙은 빛이 되었고 기쁨이 되었습니다. 더 이상의 두려움이나 어두움이 없는 영원한 평강의 능력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부활을 믿는 믿음은 더 이상 어둠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더 이상 침울해 하거나 좌절하지 않습니다. 이미 무덤의 돌문, 그 엄청난 죽음이라는 돌문이 옆으로 치워져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기쁘고 든든한 부활절에 믿음의 눈을 들어 멀리 치워져 있는 돌문을 보십시오. 그 누구도 치울 수 없었던, 그러나 이제는 너무 가벼워진 그 죽음이라는 돌문을 보십시오. 그리고 이제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귀를 열어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영원한 생명으로, 그리고 그 무엇도 어둡게 할 수 있는 빛 속에 계시면서 우리에게 그 생명을 주시고 그 빛으로 다스리시는 예수님을 신뢰하십시오. 

그 분이 그러셨듯이 우리도 죽음을 이긴 자들입니다. 그리고 그 분이 그러셨듯이 우리도 더 이상 무덤 속, 죽음이 다스리는 곳, 절망과 두려움이 판을 치는 곳에 머물 필요가 없어진 사람들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이 부활을 붙들고 믿고 의지하며 죽음의 두려움도 넉넉히 이기는 능력있는 성도들, 항상 빛과 생명으로 다스림 받는 복있는 성도가 되게하시는 특별한 은총을 부어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