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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교회 설교/설교듣기

2011.12.29. 새벽예배설교

* 오늘은 새벽예배 설교로 매일성경 묵상을 대신합니다. 

 


날짜 : 2011-12-29

본문 : 시편 119편 129-144절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성도로 살아가시는 것이 쉬우십니까? 아니면 만만치 않다고 여겨지십니까? 그렇죠. 성도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참 만만치 않은 일인 것 같습니다. 그우리들은 성도이기 이전에 한 명의 생활인입니다. 예수를 믿어도 예수믿지 않는 사람들과 똑같은 세상, 똑같은 환경 속에서 ‘생활’해 나가야 하기 때문에 믿지 않는 사람들과 똑같은 무게의 삶의 짐을 져야만 합니다. 그런데, 우리 성도들은 여기다가 이것보다 더 무거운 짐 하나를 더 짊어지고 살아갑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짐입니다. 그냥 생활인으로 살아가는 일도 그리 쉽지 않은데,이 짐까지 지고 가려면 정말 정말 힘에 부칠 때가 많습니다. 주님은 분명 내가 주는 멍에는 쉽다고 그러니까 너의 멍에를 내려놓고 내가 주는 멍에를 메고 가라고 하셨는데 막상 살아보면 오히려 예전에 내가 지고 가던 멍에가 더 쉬운 것처럼 여겨질 때가 많습니다. 이것이 우리 모두가 경험하는 어려움이고 또 유혹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요즘 시편 119편을 계속해서 묵상해 오고 있는데, 우리가 시편 119편 속에서 반복해서 확인하게 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시인도 우리와 꼭같은 환경 속에서, 꼭같은 고민을 하면서 꼭같이 고통당하며 살아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계명을 붙들고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힘들다고 외치며 무겁다고 하소연하고 구해달라고 간구합니다. 시인의 현실과 우리의 현실이 별로 다르지 않듯이 그의 기도 또한 우리의 기도와 별로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그러나, 앞에서도 살펴보았듯이 시인의 기도 속에는 항상 우리의 기도 속에서는 좀처럼 발견되지 않는 특별한 점이있고 바로 그것이 시인이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지키며 살아가기 위해서 당하는 굉장한 어려움 속에서도 계속해서 그 말씀과 계명을 더 힘있게 붙들고 온전히 행하기 위해서 힘쓰게 만드는 이유가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40킬로그램짜리 배낭을 짊어져야한다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그 배낭의 무게 자체를 줄일 수는 없습니다. 40킬로는 항상 40킬로이고 그것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같은 40킬로짜리 배낭이라고 하더라도 지고 갈 때 느껴지는 무게는 완전히 달라질 수 있습니다. 만약 그 배낭이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짐이라고 한다면, 그 속에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나 가치있게 여기는 것이 들어있는데, 그것을 목적지까지 가져가면 모두 내 것이 된다면 그 배낭은 훨씬 더 가볍게 여겨집니다. 또 내가 그것을 아주 쉽게 짊어질만큼 힘이 세다면 그렇지 않을 때보다는 훨씬 더 수월하게 지고 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에게 주는 멍에는 쉽고 가볍다”고 하신 말씀의 진짜 의미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 실제로 더 가벼운 멍에를 주시기 때문에 가볍다고 하신 것이 아니라, 첫째는 예수님께서 함께 지고 가시니까 가볍다고 하신 것이고, 둘째는 똑같은 멍에라고 할지라도 그것을 더 쉽고 가볍게 지고 갈 수 있는 비결을 가르쳐 주실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그것이 옛 계명이거나 혹은 예수님께서 주신 새로운 계명이거나 결코 가볍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짐을 지고 가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짐을 쉽게 지고 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때로는 어렵고 고통스럽더라도 즐겁게 그리고 기꺼이 지고갈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그것을 알아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시인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향한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131절에서 시인은 “내가 주의 계명을 사모하므로 입을 열고 헐떡였나이다”라고 말합니다. 136절에서는 “저희가 주의 법을 지키지 아니하므로 내 눈물이 시냇물같이 흐르나이다”라고 말하며, 139절에서는 “내 대적이 주의 말씀을 잊어버렸으므로 내 열성이 나를 소멸하였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계명에 대해서 꺼질 줄 모르는 갈증을 느꼈습니다. 마치 옆에 있어도 그리워지는 연인을 둔 사람처럼 그만큼 하나님의 계명을 사랑했습니다.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시인은 심지어는 자신을 대적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떠날 때 눈물을 시냇물처럼 흘릴 정도로,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잊고 살 때 그것 때문에 생겨나는 안타까움으로 탈진할 정도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시인이 하나님의 말씀의 엄청난 무게에 힘겨워하고 또 고통스러워 하면서도, 살려달라고 건져달라고 간구하면서도 오히려 더욱 더 그 짐을 지고 가고 싶어했던 이유였습니다. 그는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계명을 사랑했습니다. 물론 시인이 진실로 사랑하는 것은 그 말씀을 주신 하나님이었지만 시인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만큼이나 하나님의 말씀도 사랑했습니다. 그러한 말씀을 향한 사랑의 힘이 하나님의 말씀이 지워주는 그 무거운 짐을 힘들어 하고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여전히 그리고 기꺼이 지고 갈 수 있게 해 주는 힘이 되어주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명,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데 따르는 무거운 짐을 쉽고 가볍게 지고 갈 수 있는 비결은 바로 하나님의 계명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참을 수 없는 갈증을 느낄 정도로, 그리고 비록 대적일지라도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어긋나갈 때는 슬픔과 안타까움에 지칠 정도로 하나님의 계명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상태가 되면 주님의 멍에는 쉬워질 것입니다. 훨씬 가벼워질 것입니다. 이제 답은 알았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그 답으로 가는 길을 찾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말씀과 그 분의 계명과 깊은 사랑에 빠질 수 있을지 그 방법을 찾는 일입니다. 사랑에 빠지는 법을 찾는다는 말이 조금 앞뒤가 맞지 않는 것 같지만 말씀은 남자나 여자와 달라서 그냥 좋아지지 않습니다. 저절로 사랑하게 되는 법이 없습니다. 적어도 오늘 시편의 시인이 사랑하는 정도로 사랑하고, 그래서 그 사랑으로 인해 말씀이 지워주는 짐을 기쁘고 쉽게 지고 갈 정도가 되려면 그 사랑은 저절로 얻을 수가 없습니다. 

시인은 129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의 증거가 기이하므로 내 영혼이 이를 지키나이다.”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주의 증거’라고 말합니다. 증거는 원래 무언가를 증명하는 자료를 말합니다. 그런데,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라고 말합니다. 시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표현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말씀은 처음 대할 때는 굉장히 현실과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말씀에 순종해서 살아서 정말 제대로 살아갈 수 있을까 생각될 정도입니다. 그리고 막상 순종하려고 해 보면 그런 생각이 더 강해집니다. 그렇게 순종하는 삶이 순탄하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짧게 볼 때, 그리고 좁게 볼 때만 그렇습니다. 나 자신의 좁은 경험이 아니라 수많은 성도들의 수많은 경험을 통해 살펴보면, 그리고 아주 긴 시간을 두고 살펴보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대로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때 말씀은 스스로를 ‘증명’해 냅니다. 스스로 자신이 옳다는 것을 ‘증거’하게 됩니다. 그래서 말씀은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은 말씀에 놀랍니다. 보이는 것이 진리인 것 같고, 하나님의 말씀은 현실과 전혀 동떨어져 있는 것 같은데, 제각기 방향없이 흐르던 시내가 결국에는 한 줄기 강으로 모이듯이 하나님의 말씀이 틀렸다고 말하는 것 같았던 하나 하나의 사건들이 결국 하나님의 말씀이 틀림이 없다는 증거가 되는 것을 보면서 정말 기이하게 여기고 놀라게 됩니다. 이 놀라움이 있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진실로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정확하게 맞아떨어지고 모든 방해를 넘어서서 스스로 성취되는 것을 보면서 그 진리에 대해서 말할 수 없는 기쁨을 가지고 사랑하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과의 깊은 사랑에 빠질 수 있는 첫번째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됨과 틀림없음에 크게 놀라야 합니다. 

두번째 방법은 그 다음 구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시인은 130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의 말씀을 열므로 우둔한 자에게 비취어 깨닫게 하나이다” 우리 말 번역이 조금 이상한데요. 원래는 “하나님의 펼쳐 열려진 말씀이 빛을 비추어 어리석은 자에게 깨달음을 줍니다”라는 뜻입니다. 어리석은 자가 누구입니까? 그는 바로 참된 진리에 대해서 꽁꽁 닫혀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자기 속에 갇혀있고, 세상 속에 갇혀있는 사람이 바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 그 분의 진리가 열리질 때, 그렇게 열려진 말씀은 그 닫힌 사람을 활짝 열어 젖힙니다. 그를 빛의 사람, 열린 사람, 깨달음을 가진 더 이상 어리석지 않은 사람이 되게 합니다.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려면 바로 이러한 열려지는 경험을 많이 해야하고, 나아가서 근본적으로 그리고 온전히 열려지는 경험을 해야 합니다. 그러한 경험을 통해 내가 이전에는 얼마나 꽁꽁 닫혀있고 갇혀 있는 존재였고, 지금은 또 얼마나 온전히 열려진 상태가 되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 열림에 대한 기쁨과 감격이 있을 때, 우리는 그 기쁨과 감격을 가져다 준 말씀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됩니다. 왜 시인이 자신의 대적들을 향해서 그런 슬픔과 안타까움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아마도 그들 속에서 이전에 자기 속에 있었던 그 어리석음을, 갇혀있음과 닫혀있음을 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마지막 방법은 140절에 들어있습니다.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의 말씀이 심히 정미하므로 주의 종이 이를 사랑하나이다” 시인은 말씀을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정미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정미하다”는 말은 “순수하다, 순전하다”는 뜻입니다. 불순물이나 결함이 없다는 뜻입니다. 시인이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발견한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순수함, 순전함, 그리고 완전함... 시인의 영혼은 이런 것을 기뻐했던 것입니다. 순수함과 순전함 완전무결함, 그리고 거기서 나오는 아름다움.... 우리 영혼은 이런 것을 발견할 때 가장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시인이 그렇게 하나님의 계명을 사랑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의 계명 안에서 자신의 영혼이 전심을 다하여 사랑할만한 그런 순수함과 순전함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현대는 현실주의자들이 대세입니다. 그래서, 신앙에 대해서도 참되고 깊은 차원의 이야기는 하려고 들지도 않고 그것이 얼마나 가치있는 것인가는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당장 현실에서 유익하고 쓸모있는 것, 당장 힘이되고 위로가 되는 것, 현실에 작용하여 현실적인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것들만을 가치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적어도 진짜 기쁨은 우리 겉사람이 느끼는 것이 아닙니다. 진짜 만족은 우리 속사람이 느끼는 것입니다. 그걸 모르고 그 기쁨을 경험하지 못하니까 사람들이 자꾸 현실적인 수준의 찰라적이고 감각적인 만족과 기쁨만을 찾는 것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이 쓸모가 있어서, 유용해서, 현실적인 능력이 되니까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발견한 순전함과 온전함 때문에 그 말씀을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사랑은, 전혀 현실적인 이유 때문에 생겨난 것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 속에서 현실을 이유로 하나님을 떠나고 버리지 않게 해 줄 수 있는 능력이 되어 주었던 것입니다. 

시인은 말씀을 무거워 했습니다. 그 짐을 지고 가느라고 고통을 당했고 깊은 슬픔과 안타까움도 느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현실의 무거움 속에서도 주님께서 주시는 멍에를 기꺼이 지고 갔습니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계명을, 그 분의 진리를 진실로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말씀과의 사랑에 완전히 빠져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경이롭게 정확한지를 깨달았고, 그 말씀으로 어둠 속에 꽁꽁 닫혀있던 자신의 존재와 삶이 빛을 향해 온전히 열리는 것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묵상하면서 그 속에서 그의 영혼이 그토록 찾아 해매던 순수함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경험들은 그를 하나님의 말씀을 향한 깊고 깊은 사랑으로 몰고 갔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그에게 능력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말씀에 헌신한다는 것은 단순히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에 헌신한다는 것은 자신의 삶 속에서 그 말씀의 완전함과 정확함을 거듭 거듭 확인해 가는 일에 투자하는 것이며, 그 말씀으로 인해 새롭게 열리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일을 경험하는 것이고 나아가서 성경을 묵상하고 연구함으로써 하나님의 진리만에 줄 수 있는 영혼의 참된 기쁨을 발견하기 위해 애쓰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그 말씀과 사랑에 빠지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순종의 짐은 가벼워질 것입니다. 연인의 짐처럼, 내 몫의 상품처럼 짊어지기가 훨씬 쉬워질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하나님의 진리가 이렇게 경험되어지는 일에 투자하시기 바랍니다. 놀라기 위해 투자하시고, 자신을 열기 위해 투자하시고 그래서 진실로 하나님의 진리를 사랑하게 되시고, 그 사랑의 능력을 경험하는 일에 투자하시기 바랍니다.

 그 사랑이, 죽음보다 강한 그 사랑의 능력이 우리를 이기게 할 것입니다. 끝까지 인내하며 기뻐하게 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진리를 사랑하게 됨으로 그 사랑의 능력으로 충만하게 되어 가벼워지는 멍에를 기뻐하며 지고 가는 경험하며 살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