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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4.12.28. 주일오전 - 이 두 날을 부림이라하여(에스더 14)




20141228SM.mp3.zip






성경본문 : 에스더 9장 20-10장 3절




오늘은 우리가 에스더서를 묵상하고 공부하는 마지막 시간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하나님께서 에스더서를 우리에게 주신 이유와 에스더서가 우리에게 주는 유익을 생각해 보고 본문으로 넘어가려고 합니다. 에스더는 겉으로 보기와는 달리 하나의 소설같은 이야기나 혹은 한 용감한 여인의 스릴 넘치는 무용담이 아닙니다. 직접적으로 보면 부림절이라는 이스라엘의 중요한 절기가 어떻게 해서 생겨났는지를 알려주기 위해서 기록된 성경이지만 한 걸음 더 나가서 보면 바사라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땅에서도 하나님은 과연 하나님이신가 하는 질문에 대한 생생한 대답으로 기록된 책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에스더서에는 하나님이 단 한 번도 나오시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그저 우연처럼 그려져 있고, 이 이야기의 결론은 그저 그 우연들이 이러 저리 얽히고 섥혀서, 그리고 이리 뒤집히고 저리 뒤집히면서 아무렇게나 만들어낸 결과물처럼 그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에스더서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 속에서도 힘들게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며 살아가려고 애쓰는 성도들에게 가장 힘있는 위로와 격려가 됩니다. 그런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이 에스더 속에 내가 숨어 있듯이 내가 안 보이는 이 세상과 너의 삶 속에도 내가 있으며, 그 때도 그렇게 나의 선한 뜻을 이루었듯이 또다시 그렇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혹시라도 사시다가 내 삶에 그리고 이 세상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실 때가 있다면 다시 에스더서를 펴들고 가만히 읽어내려가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거기 숨어계시지만 완전하게 일하시는 하나님을 다시 만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내가 믿는 하나님이시라는 믿음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에스더서의 마지막 부분을 통해서 에스더서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하나님의 마지막 메세지들을 들어보겠습니다. 원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지키라고 하신 절기는 무교절, 유월절, 초실절, 오순절, 나팔절, 대속죄일 그리고 초막절  이렇게 일곱 개 입니다. 부림절은 에스더서에 기록되어 있는 사건 때문에 뒤에 덧붙여진 절기입니다. 이스라엘의 절기가 덧붙여질 수 있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조금 생소 할 수 있지만 성경은 부림절이 그렇게 해서 생겨난 절기라고 말하며 그것에 대해서 그 어떤 부정적인 말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에스더서는 이 부림절이 이스라엘의 절기가 되게 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던 모르드개와 에스더의 공을 크게 강조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선 20절을 보면 모르드개가 이 일을 기록하고 바사제국 각 지방에 있는 모든 유다인에게 친서를 보내서 한 규례를 만들어 해마다 아달월 십사일과 십오일을 지키게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고, 29절을 보면 모르드개와 에스더 두 사람이 전권으로 두번째 편지를 보내서 아얘 부림절을 지키는 것을 법으로 정해 버렸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 두 사람 덕분에 부림절이 이스라엘의 명절로 확실히 자리잡게 되었다는 뜻도 되지만, 그만큼 부림절을 새로운 명절로 만드는 일에 대한 두 사람이 열정이 대단했다는 뜻도 됩니다. 그렇다면 성도 여러분, 왜 이 두 사람은 매해의 마지막 달 14일과 15일을 새로운 명절로 만드는 일에 그렇게 열심을 냈을까요?  


부림절이 기념하는 날은 그저 어느 정도 좋은 날이 아닙니다. 유다 백성들이 하루아침에 몰살을 당할 뻔 하다가 다시 하루 아침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을 뿐 아니라 기적적인 승리를 경험한 날이기도 합니다. 22절에 기록된 것처럼 유다백성들이 대적의 손에서 벗어나서 평안함을 얻어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애통이 변하여 길한 날이 되는 그런 은혜를 경험한 날이었습니다. 이런 이유만으로도 유다백성들이 이 날을 잊지 않고 기념해야 할 이유가 충분하지만, 두 사람이 이 날을 자신들의 명절로 만드는 일을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했던 더 큰 이유가 한 가지 있었습니다. 우리가 구약성경을 보면 거기에는 수도 없이 실패하고 또 실패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실패는 따지고 보면 전부다 믿음의 실패였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큰 죄를 짓고 하나님께 불순종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반복해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든 불신앙과 불순종은 꼭 기억해야 할 것을 잊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잊으면 안되는데 항상 잊었던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출애굽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 그리고 보호해 주시는 은혜입니다. 출애굽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가장 크고 놀랍게, 그리고 가장 생생하게 경험했던 사건인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을 자꾸 그 일을 잊어버렸고 그 결과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흔들려 우상숭배를 하고 하나님께 불순종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런 그들이 깨닫고 돌아오게 하시기 위해서 그들을 징계하실 수 밖에 없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든 어려움들은 바로 그것 때문에 반복된 일들이었습니다. 


그 당시 유다백성이 바사에서 유배생활을 하게 되었던 것도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역사 속에서 당신을 생생하게 보여주셨던 하나님을 까맣게 잊어 버렸고, 그래서 선지자들의 거듭되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불신앙에 빠졌고 결국 거기까지 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들은 바사에서도 또 한 번 다른 모양의 출애굽, 어떻게 보면 원래 출애굽보다 더 극적인 구원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모두가 다 목숨을 잃을 뻔 했던 그 날이 오히려 원수를 갚고 영광을 얻는 그런 날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이 이번에 아무리 놀라운 일을 경험했다고 하더라도 시간이 흐르면 기억도 흐려지게 되어 있고, 그러면 결국 믿음도 흐려질 것이고, 그러면 또 다시 하나님께 불순종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결과는 뻔합니다. 그래서 그냥 내버려 두면 또 그렇게 될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에스더와 모르드개는 유다인이라면 반드시 그 날을 지켜야 한다고 아얘 법으로 정해 버렸던 것입니다. 두 사람이 부림절을 그렇게 만든 것도 똑같은 이유입니다. 그 날에 있었던 놀라운 일과 은혜를 기억하면서 다시금 하나님에 대한 생생한 감각을 되찾고 믿음을 되찾기를 바랬던 것입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이미 많은 절기들에다가 부림절을 덧붙여 주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신앙을 망가뜨리는 가장 강력한 방해물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망각’ 그러니까 잊으면 안되는 것을 잊게 되는 것입니다. 기억이라는 것이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실제로 인간에게는 기억이란 그 사람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우리가 가끔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는데요. 그들의 이야기 속에서 발견되는 공통점은 그들이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행동은 물론이고, 성격도 바뀌고, 성품도 바뀌고… 겉모습만 같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억은 우리의 믿음에도 강력한 영향을 미칩니다. 하나님께 대해서 기억해야 할 것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을 때, 그 사람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도 잘 지킬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놀라운 기적을 경험했다고 해도 그 기적에 대한 기억을 잘 지켜내지 못하면 그 때의 은혜도 잊어버리게 되고, 그래서 하나님을 향한 믿음도 흔들려 버리고 맙니다. 우리가 우리 삶을 돌이켜 보면 결코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부어주신 은혜와 행하신 놀라운 일들이 작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믿음은 그만큼 단단해져 있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잊으면 안되는 것을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실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후에 얻게 된 믿음을 지켜내려고 한다면, 우리는 그 은혜에 대한 기억을 지켜내야 합니다. 단순히 사실 뿐만이 아니라 그 때의 감정이나 믿음의 상태, 그리고 만족과 놀라움…. 할 수 있다면 그 은혜로운 사건에 대한 모든 것들에 대한 기억을 지켜내야 합니다. 


저는 오늘 설교를 준비하다가 문득 2015년도에 꼭 해보아야 하겠다고 생각되는 일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나만의 절기를 만드는 일입니다. 내년에는 꼭 한 번 해 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한 해를 살아가다 보면 분명히 한 번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은혜나 기적을 경험하게 됩니다. 바로 그 경험을 있는 그대로 적어 놓는 것입니다. 날짜와 시간, 그 때의 상황과 나의 마음, 놀라움과 기쁨, 그리고 그 일을 통해 얻은 나의 믿음의 성장까지… 그것을 기록한 기록을 남겨놓고 그 날을 저의 새로운 절기로 삼아보려고 합니다. 한 해를 지내면서 믿음이 흔들리고 마음이 식을 때, 그 기록을 다시 들여다 보면 참 유익할 것입니다. 한 해 한 해 그런 일이 반복되다 보면 아마도 한 해 동안의 수많은 날들이 나만의 절기가 될 것이고, 그 모든 절기들이 하나님을 기억하게 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게 도와줄 것입니다. 그러면 그만큼 은혜도 회복되고 믿음도 회복되겠지요. 과거가 과거로 잊혀지지 않고 매해 새로운 나만의 절기로 살아가는 은혜를 경험하게 되겠지요. 정말 좋지 않을까요? 정말 유익하지 않을까요? 


과거를 계속 살아있게 만드는 방법 그것을 다시 기억하는 일 밖에 없습니다. 은혜도 기적도 기억하는 일을 통해 또다시 오늘의 일로 되살아날 수 있습니다. 다가오는 새해에는 빈 공책 하나 마련하셔서 크고 특별한 은혜를 경험하게 될 때마다 그 경험에 대한 모든 것을 기록해 놓으시고 여러분의 영혼을 위한 여러분의 절기로 만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바라기는 우리 중에 그런 분들이 많아서 내년 연말에 그 은혜를 함께 나누는 풍성함을 맛보았으면 합니다. 내년 한 해 동안은 꼭 단 하루라도 여러분의 수첩에 여러분 자신의 절기를 더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삶과 신앙은 훨씬 더 풍성하고 든든해 질 것입니다. 


모르드개는 그렇게 해서 유다백성들이 부림절을 지킬 수 밖에 없도록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렇지만 모르드개는 그렇게 틀만 정해주는 데서 끝내지 않았습니다. 그 틀 안에 내용까지 채워주었습니다. 만약 모르드개가 그저 부림절만 꼭 지키라고 하고 더 이상의 지침을 알려주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도 시간이 흐르면서 부림절은 그저 먹고 마시는 일로 시작해서 먹고 마시는 일로 끝나는 그런 방탕한 절기가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모르드개는 어떻게 하면 부림절을 가장 부림절 답게 지킬 수 있을까를 고민했을 것이고 그 결과 생각해 낸 방법을 그들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22절이 알려주는 부림절지키는 방법은 이렇습니다. “이 달 이 날에 유다인들이 대적에게서 벗어나서 평안함을 얻어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애통이 변하여 길한 날이 되었으니 이 두 날을 지켜 잔치를 베풀고 즐기며 서로 예물을 주고 가난한 자를 구제하라” 부림절은 구원의 날이었습니다. 그래서 부림절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누리는 기쁨은 구원얻은 자가 누리는 기쁨이었습니다. 


우선 모르드개는 잔치를 베풀고 즐기라고 말합니다. 기쁨을 확실하게 누리는데 잔치보다 좋은 것이 없습니다. 많은 음식과 사람들과의 교제, 그리고 음악과 춤은 사람 안에 있는 기쁨을 바깥으로 표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니까요. 모르드개는 부림절을 지키는 유다백성들에게 절제하고 근신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파티를 열고 그저 즐기라고 말했습니다. 우선 너희들이 먼저 구원을 기뻐하고 그 기쁨을 누리라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구원을 얻은 자의 가장 확실한 표시는 기쁨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구원을 얻은 사람은 그 기쁨을 자기 자신이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저도 모르드개를 따라 여러분에게 권면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구원을 마음껏 즐거워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즐거움을 마음껏 누리시기 바랍니다. 무표정하고 어둡고 슬픈 표정, 기쁨이 없는 딱딱하게 굳은 표정을 지우시고 이제는 구원을 기뻐하고 그 기쁨을 만끽하시기 바랍니다. 그 기쁨으로 활짝 웃으시기 바랍니다. 날마다 잔치같은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구원의 기쁨이 충만하다면 우리는 충분히 그런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모드드개는 잔치를 벌이고 즐기라고 말하면서 유다백성들에게 “대적에게서 벗어나서 평안함을 얻어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애통이 변하여 길한 날이 되었은 즉…”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날 유다백성들만 그럴까요? 여기 기록되어 있는 아름다운 복들은 지금 우리와는 전혀 상관없는 복일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미 우리의 가장 큰 대적의 손에서 벗어 났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미 평안함을 얻었습니다. 우리의 슬픔은 변하여 기쁨이 되었고 애통은 변하여 길한 날이 되었습니다. 이 일은 이미 시작되었고 분명히 완전히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아직 우리가 얻은 평안과 기쁨은 완전하지 않으며, 우리 대적 사탄의 영향력도 우리에게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미 우리에게 허락된 기쁨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기쁜 삶을 살 수 있고, 그 평강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평안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구원의 기쁨을 누리고 즐기는 삶을 절대로 나중으로 미루지 마십시오. 지금 여기서는 그 기쁨 누리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에게 그 기쁨이 없으면, 그리고 지금 내가 그 기쁨을 누리고 있지 않으면 우리는 여기서 성도다운 영광스럽고 복된 삶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꼭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구원의 기쁨을 회복하시고 그 기쁨을 마음껏 누리며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이 기쁨을 나눠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모르드개가 알려준 구원의 기쁨을 누리는 두 번째 방법은 서로에게 선물을 주고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자기가 가진 것을 나누어 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구원얻은 사람들의 두번째 표지입니다. 구원얻은 사람들은 기뻐합니다. 그래서 그 기쁨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주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다른 사람들을 나눠주는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내가 가진 무언가를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것입니다. 나와 친한 사람들이나 혹은 크게 부족함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선물을 주면 됩니다. 가진 것이 없는 사람, 생활에 필요한 것이 부족한 사람에게는 가진 것을 나눠주며 구제하면 됩니다. 그러면 내 기쁨이 그 사람들에게 전달되고 더 크고 확실해 집니다. 구원얻은 사람들은 그것을 알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주려고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삭게오라는 사람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삭게오는 자신이 가진 재산에서 구원을 발견하려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재산을 모으기 위해서는 나쁜 짓도 서슴지 않았던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의 집에 들어가셨을 때 삭게오는 변했습니다. 자기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내놓았고, 이제까지 자기가 불법으로 착복한 것이 있다면 네 배나 변상하겠다고 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구원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자기 재산을 내놓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에게 구원을 선물하신 것일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예수님께서 그가 자기 생명처럼 여기던 재물을 나눠주기 위해서 내놓는 것을 보면서 그 안에 이미 있는 구원의 기쁨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삭게오는 구원의 기쁨을 그런 식으로 나누었고 그렇게 나누면서 크게 기뻐했던 것입니다. 


저는 이번 성탄절에 실제로 그런 비슷한 경험을 했습니다. 전에 제가 아주 오랜만에 다시 만나게 되었다고 말씀드렸던 그 후배가 기억나십니까? 전도 열심히 한다던 바로 그 후배인데요. 이 아이가 서울 목동에 사는데, 거기서 조금 더 가면 가양동이라는 동네가 있습니다. 거기 서민아파트들이 많이 있는데, 거기에는 형편이 어렵고 가정 환경이 정말 좋지 않은 아이들이 많이 산답니다. 편부나 편모슬하에서 자라는 아이들, 술만 먹으면 소란을 부리고 행패를 부리는 아버지와 함께 사는 아이들… 여러분이 믿으실지 모르시겠지만 그래서 그래도 조금 열심히 살려고 하고 공부를 하고 싶어 하는 아이들은 집에서 나와서 자기 발로 고아원으로 들어간답니다. 거기 가면 그래도 기본적인 생활이 되고 공부를 계속할 수 있기 때문이랍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가 사는 이 땅에 그렇게 힘들게 사는 아이들도 있다는 것이 얼마나 마음 아팠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제 후배가 그 동네 복지관으로 가서 봉사활동을 하는데, 거기 나와서 제 후배에게 연극을 배우는 중학생 여자 아이들을 전도하려고 공을 드렸는데, 드디어 그 아이들 중에서 두 명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소식을 알려 왔습니다. 그러면서 이 아이들은 환경이 너무 좋지 않아서 아직 패딩잠바 하나 없고 그 흔한 핸드크림하나 없어서 손등이 다 터져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아는 분들에게 협찬을 부탁했더니 색색으로 네 벌이나 보내 왔다고 하면서 너무 너무 기뻐했습니다. 제가 저희 집사람에게 그 이야기를 했더니 우리가 큰 것 선물하기는 힘들고 예쁜 장갑을 하나씩 사서 보내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마트에 간 김에 제일 예뻐 보이는 벙어리 장갑 두 개를 골라서 보내주었습니다. 그 아이들이 복음을 받아들인 것에 대한 축하선물이었죠. 그런데요, 성도 여러분. 그 장갑을 보내놓고 제 마음이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제 후배에게도 그렇고, 그 아이들에게도 그렇고 저에게 그런 선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서 고맙다고 몇 번이나 인사를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구원의 기쁨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무엇을 나눌 때, 그 때 더 커지고 풍성해 지게 마련입니다. 만약 여러분에게 구원의 기쁨이 희미하다면 한 번 다른 이들에게 나누는 일을 해 보십시오. 그 나누는 것에 여러분의 구원의 기쁨을 담아서 다른 이들에게 전해 보십시오. 분명히 여러분이 누리는 구원의 기쁨에도 커다란 변화가 있을 것입니다. 


부림절에 유다 백성들은 너무도 강하게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것과 하나님은 온 세상을 주관하시는 분이심을 경험했습니다. 단순히 목숨을 건진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없애라고 하던 사람들을 제거했으며, 그 과정에서 천덕꾸러기였던 유다 백성들은 바사 제국 안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민족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정점에는 바로 모르드개가 서게 되었습니다. 명실상부하게 아하수에로 다음 가는 권세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갑작스런 영광과 권력을 거머쥐게 된 모르드개였지만 놀랍게도 그는 전혀 변함이 없었습니다. 에스더서의 마지막 절인 10장 3절은 그 모르드개에 대해서 이렇게 증언합니다. “유다인 모르드개가 아하수에로 왕의 다음이 되고 크게 존경받고 그의 허다한 형제에게 사랑을 받고 그의 백성의 이익을 도모하며 그의 모든 종족을 안위하였더라.” 우리말 성경에서는 그 느낌을 제대로 살리지 못했지만, 원문은 모르드개가 형제들에게 사랑을 받았던 이유가 그가 계속해서 동족들의 유익을 위해서 일했고 또 항상 그들에게 평안을 주는 말을 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갑작스럽게 많은 것을 얻게 되고 또 큰 힘을 가지게 되면 많은 경우 이전보다는 훨씬 더 자기 중심적이 되게 마련입니다. 섬기려고 하기 보다는 군림하려고 하고, 또 은근히 자신은 다른 사람과는 격이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나타내려고 하게 되고…. 좋은 쪽보다는 좋지 않은 쪽으로 변하기가 더 쉽습니다. 그렇지만 모르드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전에도 그랬듯이 그는 여전히 유다백성 중심이었습니다. 그들의 유익을 위해서 일했고 항상 유배지에 사는 자기 백성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일에만 힘을 쏟았습니다. 자신의 힘을 그 일에 사용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에스더서의 마지막 절은 우리에게 참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이 있었기에 유다백성들은 바사에 끌려가서도 끝까지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믿음의 싸움에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성도들은 어느 정도는 당시의 유다백성들과 비슷한 환경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사회는 전반적으로 볼 때 예수님을 믿는 신앙이 결코 그 사람의 장점이 될 수 없는 그런 분위기이니까요. 그래서 오늘날 한국교회에서는 서로가 서로에게 작은 모르드개가 되어 주는 일이 꼭 필요합니다. 언젠가도 말씀드렸듯이 현대교회의 최대약점은 성도들 모두가 다 자기 삶의 자리에서 각개전투를 벌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싸움을 혼자서 다 싸워야 하니까 성도들은 믿음의 싸움을 싸우는데 있어서 힘을 내고 용기를 내기가 힘들 수 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그래서 많은 성도들이 싸워보기도 전에 겁을 내면서 뒤로 물러서고 있기도 합니다. 만약 모든 성도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작은 모르드개가 되어준다면 어떨까요? 그러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질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영적인 싸움을 싸우며,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 힘을 내고 용기를 내기가 훨씬 더 쉬워질 것입니다. 나에게 있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나만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을 위한 방패로 사용하고 또 항상 격려자가 되어주며 그 길을 함께 가는 동료가 되어 준다면 서로가 서로의 덕을 입어 바사같은 이 땅에서도 성도의 거룩함을 지키며 영광스러운 삶을 살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지금까지 함께 했던 에스더서 여행을 모두 정리할 때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분명하게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하수에로같은 왕이 다스리는 바사, 이스라엘이 포로로 끌려간 그 곳에서도 여전히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셨습니다. 비록 그들의 죄 때문에 징계를 하실 수 밖에 없었지만 그들을 징계하시면서도 여전히 그들을 사랑하시고 그들을 보호하시며 구원하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래서 유다백성들은 부림절이라는 절기를 새로 얻었고, 거기서 자기들의 구원을 기뻐하며 믿음을 더욱 더 새롭게 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모두 부림절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해 주시는 기적같은 은혜를 베풀어 주셨고, 또 크고 작게 계속 구원하셔서 여전히 이 바사 같은 땅에서도 믿음을 지키고 있으니까요. 부림절의 기쁨, 구원의 기쁨을 절대로 빼앗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서로에게 베풀고 가진 것을 나눠줌으로써 더 많이 섬김으로써 그 기쁨을 더 크고 온전한 것을 만들어 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서로가 서로에게 작은 모르드개가 되어 주시기 바랍니다. 서로가 서로의 힘이 되어주고 격려자가 되어주고, 위로와 방패가 되어주셔서 서로가 그 힘으로 함께 믿음의 싸움을 함께 싸우고 또 함께 이기는 영광스러운 믿음의 전우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모두 부림절의 백성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가 부림절의 기쁨을 놓치지 않는 구원얻는 백성들, 그 기쁨을 함께 나누는 하나님의 백성들, 서로가 서로에게 작은 모르드개가 되어 주는 그런 사람들로 살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뒤집으시고 바로 잡으시는 그 위대하고 놀라운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 우리의 하나님으로 믿는 믿음이 우리 안에 충만하게 해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바사 같은 세상에서도 항상 부림절의 기쁨으로 충만한 하나님의 백성들로 살게 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하나님, 하나님이 언제나 변함 없이 나와 이 세상의 하나님되심을 믿습니다. 
  2. 나에게 구원의 기쁨이 회복되게 하시고, 내가 그 기쁨을 나누며 더 풍성한 기쁨을 누리게 하소서. 
  3. 우리들에게도 새로운 부림절을 허락하셔서 항상 주님의 구원을 기념하며 살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