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동부교회 설교/설교듣기

2012.03.22. 새벽예배.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느니라


날짜 : 2012-03-22

본문 : 누가복음 19장 45절 20장 8절



오늘 본문 바로 앞을 보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보시고 우시면서 이렇게 한탄하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도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예수님께서는 전혀 회개할 줄 모르는 예루살렘을 향해서 슬퍼하시고 한탄하시며 그 멸망을 예언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실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예루살렘이 다른 도시와 똑같은 도시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중심, 거기 성전이 있는 중심 중의 중심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까지만 해도 하나님의 임재는 보편적인 일이 아니었고, 예루살렘 성전에만 한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성전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신다는 것은 곧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전체와 함께 하시면서 당신을 온 세상에 드러내신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성전에 하나님께서 더 이상 임재하실 수 없게 된다면 그것은 결국 이스라엘 그 어디도 임재하시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었던 이유는 다른데 있지 않았습니다. 죄 때문에 더 이상 성전은 성전이 아니었고, 그래서 예루살렘이 예루살렘이 아니었으며, 결국 이스라엘도 더 이상 이스라엘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을 통해서 온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시려고 하셨던 하나님의 목적이 실패하게 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그런 예루살렘의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그런데 바로 그 예루살렘의 모습이 예루살렘과 이스라엘이 멸망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였습니다.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예수님께서는 성전으로 가셨습니다. 성전 안은 그야말로 난장판이었습니다. 제사에 쓰는 제물을 사고 파는 장사치들, 또 동전을 성전세겔로 바꿔주는 환전상들로 북세통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처음에 이런 상인들은 꼭 필요하고 긍정적인 역할을 했었습니다. 아주 멀리서 제사를 드리러 오는 경우 흠없는 제물을 가지고 올 수 없었고 그래서 예루살렘에 와서 제물을 구입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또 이스라엘 백성의 성인들은 모두 성전세를 바치게 되어 있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세겔이라고 부르는 이스라엘 동전이 사용되지 않게 되었고 로마의 화폐만 사용되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로마의 동전에는 모두 시저의 얼굴이 새겨져 있어서 그런 동전으로는 성전세를 바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로마의 화폐를 성전에서 통용되는 세겔로 바꿔주는 환전상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이런 순기능은 약해지고 역기능만 커지게 됩니다. 제물을 파는 사람과 환전상이 제사장들과 종교지도자들과 결탁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 그들이 파는 제물은 부르는 게 값입니다. 그렇지만 제사를 드려야만 하는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울며 겨자먹기로 그 값에 제물을 구입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환전상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환율을 터무니 없이 매겼습니다. 동전 하나 바꿔주는 일로 폭리를 취한 것입니다. 성전세나 제사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로 정해주신 것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악덕상인들과 그들과 결탁한 종교지도자들의 부정축재의 도구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전은 “도둑놈의 소굴”이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라고 나무라시며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어좇았습니다. 그리고는 성전에서 날마다 하늘나라에 대해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대제사장, 서기관, 그리고 백성의 두목은 현실적인 이유에서나 신앙적인 이유에서나 그런 예수님을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죽이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백성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마음을 다하여 경청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교묘한 질문으로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합니다. 그의 권위를 무너뜨리려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하늘나라의 소식을 전하시는데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찾아와서 공개적으로 이렇게 묻습니다. “당신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가? 이 권위는 누가 준 것인가?” 이들은 예수님께서 이 권위가 하늘에서 왔다고 대답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대답한다면 하나님을 사칭하였다고 물고 늘어지려고 했던 것이죠. 그런데, 그들은 원하는 답을 듣지 못했습니다. 그 대신 오히려 대답 못할 질문만 하나 받게 됩니다. 예수님은 조건을 거셨습니다. “만약 내가 너희에게 하는 질문에 대답하면 나도 너희 질문에 대답하겠다. 그렇다면 세례 요한의 세례는 누구의 권위로 행해진 것인가? 사람인가? 아니면 하나님인가?” 개인적으로 물었다면 그들은 분명히 “사람으로 부터 왔다”고 대답했을 것입니다. 그게 그들의 진짜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의 대부분은 이미 요한에게 가르침을 받고 또 그에게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약 요한의 세례가 요한의 마음대로 행해진 것이라고 대답한다면 그 자리에서 요한을 선지자로 믿는 군중들이 던진 돌에 맞아죽을 것이 뻔했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으로 부터 왔다”고 둘러댈 수도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잘 아는 그들이 요한의 세례를 받지 않은 이유를 설명해야 하는데, 둘러댈 이유 또한 변변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상황에 처한 그들은 그 유명한 모르쇠 작전을 쓰기로 합니다. “모릅니다. 생각이 나질 않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우스운 대답인 줄 알았고, 그래서 엄청 창피해지는 일을 무릅써야 했지만 그들은 그 대답 밖에 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주 여유있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희에게 대답하지 않을 것이다” 게임은 이렇게 해서 예수님의 완승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들의 적대감은 극에 달할 수 밖에 없었지만 그들은 그렇게 물러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그들이 왜 그렇게 물러날 수 밖에 없었는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있었고 바르다고 생각하는 행동이 있으면서도 그렇게 슬그머니 꼬리를 내릴 수 밖에 없었는지 그 이유를 알려줍니다. 우리가 두 사건을 가만히 살펴보면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여러분 지도자, 그것도 종교지도자라면 자신이 옳다고 판단한 일에 대해서는 정직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행동을 취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비록 그들의 판단이 틀린 것이기는 했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있었고, 마땅히 해야한다고 생각하는 행동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말하고 또 행동으로 옮기지 못합니다. 19장 48절을 보시면 “백성이 다 그에게 귀를 기울여 들으므로”라고 말하고 있고, 20장 6절을 보시면 “백성이 요한을 선지자로 인정하니 저희가 다 우리를 돌로 칠 것이요”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바른 것을 말하지 못하고 또 행하지 못한 이유였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것을 주는 대상과 자신을 안전하게 해 주는 것을 굉장히 좋아합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이런 것들이 자신을 떠날까봐 그만큼 두려워하기도 합니다.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은 바로 이 두려움에 빠져 있었습니다. 백성들은 그들의 부와 권력의 원천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안전을 좌우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백성들이 자신들로부터 등을 돌리게 할 수 있는 일들을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들로부터 얻는 것을 지나치게 좋아하고 또 의지하게 되면, 우리에게 그것을 제공하는 사람들을 두려워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두려워하게 되면 그 때부터는 옳고 그름이나 정직함과는 점점 멀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정직한 말도 할 수 없게 되고, 올바른 행동도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렇게 사람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그만큼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저는, 모든 시대의 모든 교회가 다 마찬가지이겠지만 오늘날의 한국교회가 앓고 있는 질병의 가장 큰 원인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두 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교회의 지도자들이 하나님을 진실로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사람을 두려워 합니다. 그러니 바른 것을 바르다고 말하지 못합니다. 옳은 것을 행하지 못합니다. 그 대신 그 두려워하는 사람, 인기를 주고 권위를 주며 또 원하는 것을 제공해 주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말하고,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합니다. 저도 목회자이기 때문에, 또 부족하나마 교회의 지도자이기 때문에 너무 잘 압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이 그렇게 하는 이유는 그들이 사람으로부터 만족을 구하고, 그래서 그만큼 사람에게 의지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드려봐야 자기 얼굴에 침뱉기이겠지만 그래도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제 마음 속에는 이런 아프고 부끄러운 저희들의 모습이 떠올랐고, 그래서 이것을 여러분에게 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다른 사람이나 교회를 비난하고 평가하기 위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렇지만 나는 안그렇다고 의로운 척하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제가 서로에게 거북한 이런 이야기를 꺼낸 것은 여러분에게 기도를 부탁하기 위해서 입니다. 

성도 여러분, 그래도 여러분은 기도하려고 노력하시는 분들인 줄 압니다. 그래서 부족하나마 조국의 교회를 섬기는 한 명의 목회자로서 여러분에게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아마 여러분은 교회와 목회자들을 위해서 기도하실 때면 그들이 목회를 잘 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시고 또 한국교회가 발전하고 성장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실 것입니다. 이런 기도들도 물론 필요한 기도입니다. 그러나, 죄송하지만 그런 기도는 본질적인 기도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리고 지금 한국교회에 진짜 필요한 기도도 아닌 것 같습니다. 성도 여러분, 만약 지금 한국 교회의 지도자들이 당시의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을 닮아있다면, 그들처럼 사람에게서 만족을 구하고 있고, 그래서 그 사람들을 두려워하는 죄를 범하고 있다면 그 문제가 먼저 해결되어야만 합니다. 다시 하나님을 진실로 두려워하는 자리로 돌아가는 일이 가장 시급합니다. 다시 하나님의 기준에서 옳고 그름을 분별하고 그 옳고 그름에 따라 말하고 행동하는, 그렇게 목회하는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 가장 시급한 일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제 목회자들을 위해서 기도하실 때, 목회자들이 여러분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해달라고 기도해 주십시오. 사람에게서 만족을 구하지 않고 하나님에게서만 만족을 구하는 하나님의 일꾼들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해 주십시오. 목회를 잘 하고, 교회를 양적으로 성장시키는 목회자가 되기 전에 정말 제대로 목회하며 교회를 바로 세우는, 교회를 하나님의 기도하는 집으로 온전하게 지켜내는 목회자들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도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잘 나가는 목회자, 교회를 숫적으로 부흥시키는 목회자를 훌륭하다고 인정하는 세속적인 기준에서 벗어나서 잘 나가지 못해도 사람이 아닌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정직하게 목회하려고 애쓰는 목회자들을 진심으로 인정하고 존중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자신을 위해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판단하는 성도들이 되기 위해서 애써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여러분의 기도가, 그리고 그러한 여러분의 분별이 한국 교회를 지키고 또 한국의 목회자들을 지킬 것이라고 믿습니다. 만약 저희들이 잘못가더라도 여러분이 따라오지 않는다면 아직은 희망이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염치없는 부탁처럼 들려지시더라도 저와 같은 부족한 목회자들을 위해서 꼭 그렇게 기도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여러분에게 간절하게 부탁드립니다. 성도들로서 저희 목회자들에게 잘하는 것보다는 바른 것을 요구해 주시고, 업적이나 성과같은 세속적인 기준으로 목회자들을 바라보지 마시고, 그가 정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지, 그래서 정말 정직하게 하나님의 교회를 기도하는 집으로 지켜내려고 애쓰고 있는지를 보시기 바랍니다. 

당시 이스라엘을 위한 가장 큰 책임은 종교지도자들에게 있었듯이 한국교회를 위한 가장 큰 책임은 저희들 목회자들에게 있습니다. 그걸 부인할 길은 없습니다. 그러나, 성도들도 목회자들에게 바른 것만을 요구하고, 또 바른 목회자로 살아가도록 자기 일처럼 기도해 주셔야 합니다. 그것이 여러분의 책임이라는 것 또한 부인할 길이 없습니다. 그래야 한국교회 전체가 하나님의 기도하는 집으로 든든히 서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런 기도를 드리고, 또 그런 애씀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예루살렘처럼 버리지 않으실 것이고, 또 그 분의 집을 만민의 기도하는 집으로 서 있게 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님 오시는 그 날까지 한국교회에, 그리고 목회자와 성도들에게 이런 복을 허락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