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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성경 묵상

2012년 매일성경 설교 -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본문 : 누가복음 7장 36-50절

     언젠가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책 중에서 “우리는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건다”는 제목의 책이 있었습니다. 제목만 보아도 이 책이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지 대번 알 수 있을 정도로 확실한 책 제목이었습니다. 그 책은 사람은 이상하게도 정말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전혀 그렇지 않은 것에 고집을 부리고 집착하며 그것 때문에 갈등을 겪게 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정말 공감이 가는 주장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만큼은 정말 크고 중요한 일에만 신경쓰고 그렇지 않은 것들은 대범하게 넘어가는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함께 살아가는 식구들, 특히 아내나 남편에게 물어보면 내가 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대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 대번 들통날 것입니다. 궁금하시다면 오늘 돌아가셔서 식구들에게 한 번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큰 일이 아니라 사소한 일에 더 많이 신경쓰고 더 집착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작은 일, 사소한 일 때문에 진짜 중요하고 심지어는 결정적인 어떤 것을 놓치게 된다면 그것만큼 큰 낭패와 손해는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런 안타까운 실수를 했던 한 사람 나옵니다. 바로 바리새인인  시몬입니다. 시몬은 무엇보다도 예수님과 친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40절 이하를 보면 예수님은 시몬의 이름을 부르고 계시고, 시몬은 예수님께 대해서 “선생님”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을 보면 둘 사이의 관계가 그렇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몬이 예수님을 식사에 초대했습니다. 얼핏 보기에는 이 일이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당시로써는 정말 굉장한 일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우리가 이미 앞서 보았다시피 이미 그 당시에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죽일 방법을 의논할만큼 이들이 예수님께 대해서 가지고 있는 적대감은 극단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바리새인인 시몬이 예수님과 여전히 그런 관계를 유지하고 있고, 또 그런 예수님을 자기 집에 식사초대한다는 것은 그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역으로 생각해 보면 그렇기 때문에 시몬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복을 받아 누리기에 가장 유리한 자리에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런 은혜로운 기회를, 그 기회가 가져다줄 은혜의 크기에 비교한다면, 진짜 ‘사소한 일’ 때문에 송두리째 잃어버릴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시몬과 함께 식사 자리에 앉으셨을 때, 한 여인이 그 집으로 들어왔습니다. 그 여인은 그 동네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죄인인 한 여인”이었습니다. 그 여인은 예수님의 발 뒤로 왔습니다. 그리고는 갑자기 향유가 담긴 옥합을 깨뜨려서 한 병을 모두 예수님의 발에 부었습니다. 그리고는 거기 엎드려서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는 그 발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그 더러운 발을 닦았습니다. 이 광경은 시몬의 눈에 굉장히 심하게 거슬렀습니다. 그런데, 시몬이 진짜로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예수님의 반응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여인의 그런 행동에도 가만히 계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시몬이 가지고 있었던 예수님께 대한 기대를 완전히 깨뜨리는 일이었던 것같습니다. 시몬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만약 이 사람이 내 생각대로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여인이 어떤 죄인이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고, 그러면 저런 행동을 하지 못하게 했을텐데 가만히 있는 것을 보니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예수님께서는 시몬의 이런 생각을 아시고 안타깝게 생각하셨고, 그래서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빚진 자의 비유를 통해서 더 많이 빚진 자가 빚을 탕감해 준 사람을 더 사랑하게 된다는 일반적인 진리를 가르쳐 주셨고, 그것을 기준으로 예수님을 초대한 시몬의 행동과 여인의 행동을 비교 평가해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결론내려 주셨습니다.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두 사람이 죄를 용서받았다고 했을 때, 겉으로는 두 사람 중에서 누가 더 큰 죄를 용서받았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알 수 있는 한 가지 기준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둘 중에 누가 용서해 준 사람을 더 많이 사랑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의 표현이 큰 사람이 더 많이 용서받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여인의 그런 행동은 예수님을 향한 사랑의 크기를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행동은 그 여인이 받았던 용서의 크기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 여인은 가장 큰 죄를 용서받았고 그래서 예수님을 가장 많이 사랑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라는 이 말씀을 곰곰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 말은 큰 용서를 받은 사람은 예수님을 많이 사랑하고 작은 용서를 받은 사람은 예수님을 적게 사랑하게 마련이며 그러니까 자신이 받은 용서의 크기에 따라서 예수님을 많이 사랑해도 되고 적게 사랑해도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성도 여러분, 이 세상에는 하나님께 적게 용서 받아도 되는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적게 용서받는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가 잊지 말야아 할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신다”라는 말을 들을 때, 우리는 그것을 무엇보다도 우리의 “원죄”와 연관지어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우리가 살면서 저지른 이런 저런 겉으로 드러나는 크고 작은 죄들도 용서받아야 합니다. 그렇지만 그런 죄들 이전에 반드시 용서받아야만 하는 죄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존재와 영혼에 뿌리박혀 있어서 우리 힘으로는 절대로 뿌리 뽑을 수 없는 우리가 원죄라고 부르는 그 죄입니다. 이 원죄를 용서받지 않으면 우리는 절대로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없습니다. 구원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누구나 크고 작은 실제적인 죄들을 용서받기 전에 원죄를 용서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실은 우리 생각에 아주 아주 작다고 여겨지는 그런 죄들도 반드시 용서받아야 한다는 점에서는 원죄와 똑같은 자리에 있습니다. 만약 그런 죄들 중에서 단 하나라도 용서를 받지 못한다면 우리는 바로 그 죄 때문에 구원받지 못합니다. 물론 큰 죄는 큰 죄이고 그렇게 큰 죄는 작은 죄보다는 사람들이 보기에나 하나님보시기에 훨씬 중하고 악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만약 용서받지 못한다면, 거의 느껴지지 않는 작은 죄든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죄든,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은 똑같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용서의 은총은 구원에 관한 한 죄의 크기와 상관없이 동일한 무게를 가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어떻습니까? 이 세상에 큰 용서를 받은 사람과 작게 용서를 받은 사람은 없습니다. 실제로 그런 구별은 완전히 무의미합니다. 그 죄가 원죄든 우리 스스로 저지른 죄든, 큰 죄든 작은 죄든, 많은 죄든 적은 죄든 그 어떤 죄든지 하나님의 용서를 받고 구원을 얻는 것은 실로 그 크기를 헤아릴 수 없는 큰 은혜라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죄에 관한 한 우리가 익숙해져 있는 덧셈과 뺄셈을 버리고 이런 계산법을 사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실제로 시몬이 다른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과는 정반대로 예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초대하는, 굉장히 훌륭하고 의미있는 결정을 하였고, 그렇게 은혜에 가장 가깝게 다가갔으면서도 바로 그 앞에서 미끄러졌던 이유는 죄와 용서에 대한 이러한 계산법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가 사용했던 것은 행위의 계산법이었습니다. 행위의 계산법은 하나님 앞에 순종하지 못했고 그래서 용서받아야만 하는 죄가 아니라 남과 비교해서 자신이 잘 한 것만을 헤아립니다. 남들보다 더 많이 한 것만을 헤아립니다. 그렇게 해서 자기보다 못한 사람은 “죄인”으로 생각하고 자신은 “의인”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바로 거기가 그가 은혜에서 미끄러지는 자리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그 용서의 은혜가 얼마나 절대적으로 크고 중한지를 망각하게 되는 지점입니다. 우리 주님의 말씀에 의하면 그 곳이 바로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하는 일로부터 멀어져 가는 가장 죄악된 지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용서는 우리의 죄의 크기에 상관없이 무한히 크고 절대적으로 중요한 그런 용서입니다. 그 어떤 죄라도 용서해 주시지 않은 죄가 있다면 우리는 구원조차 받을 수가 없는 그런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허락하신 용서의 은혜가 희미해 질 때, 그래서 내가 ‘큰 죄인인 여자’가 아니라 ‘바리새인인 시몬’이 되어져 가고 있음이 깨달아 질 때는 내가 하고 있는 일들, 내가 순종하고 있는 명령들이 아니라 그렇지 못한 반대편의 일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그런 것들 중에서 단 하나라도 용서해 주시지 않는다면 나는 결코 구원얻을 수도, 하나님 앞에 설 수도 없다는 그 엄중한 사실을 떠 올려 보십시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지금 누리고 있는 용서의 은총이 얼마나 무한히 크고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인지를 묵상해 보십시오. 그러면 내가 받은 용서의 크기를 아는 은혜가 회복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더욱 더 사랑하게 되고, 그 분을 사랑하는 순종과 헌신들도 더 온전해지고 기쁜 것이 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다른 이들의 죄인됨과 나의 의를 비교하는 일은 지극히 작은 일입니다. 그래서 누가 더 의인이고 누가 더 죄인인지를 가리는 일은 너무나 사소한 일입니다. 그것은 지극히 사소한 일일 뿐만 아니라 오히려 우리에게로 흘러오는 하나님의 은혜의 강줄기를 가로막는 가장 크고 악한 장애물이기도 합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권면합니다. 그런 악하고 사소한 것이 여러분 앞을 가로막지 못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반드시 그것을 뛰어넘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누구나 하나님의 무한한 용서하심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고 우리는 그 용서 안에서만 구원받고 하나님 앞에 서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이 용서의 은혜의 참된 크기를 깨닫고 잊지 않을 때, 우리는 주님을 진실로 사랑하게 될 것이고, 그 분을 그 분답게 섬기는 일에 실패하지 않는 사람들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우리가 무한한 용서의 은총을 놓치지 않고 그 은혜의 풍성함 가운데 주님을 더욱 온전히 사랑하는 자리에 이르게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항상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시는 주님의 말씀을 듣는 복된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