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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교회 설교/설교듣기

2012년 매일성경 설교. 오직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저는 원래 근심과 걱정이 무지 무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체질적으로 그랬습니다. 아무리 근심과 걱정을 떨쳐 버리려고 해도 그렇게 되지를 않았고, 저는 아무리 신앙이 있다고 해도 근심과 걱정은 친구처럼 달고 살아야 하는 줄 알고 있었습니다. 목사가 된 후에도 한참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하나님께서 나에게 허락하신 믿음이란 그렇게 약하고 허접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제가 생각했던 것은 완전히 틀린 것이었고 믿음은 모든 근심과 걱정으로 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해 줄 수 있는 능력있는 선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제가 이렇게 이야기한다고 해서 제가 단 한 순간도, 그 어떤 근심과 걱정도 가지지 않고서 살아갈 수 있다고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제 말씀은 적어도 항상 근심하고 걱정하며 거기 붙들려 휘둘리면서도 여전히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는 그런 삶, 그런 근심과 걱정을 해결하는 일에 온통 집중해서 살아가는 삶을 살지 않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오늘 저는 그 믿음에 대해서 증거하려고 여기에 섰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의 말씀은 ‘그러므로’라는 단어로 시작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본문이 어제 본문의 결론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어제 본문은 ‘사람의 생명이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않다’는 것이 그 요점입니다. 그렇다면 ‘그러므로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는 오늘 본문은 그 결론이 되는 셈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놓고 보면 조금 이상합니다. 분명히 어제 본문은 근심과 걱정에 대한 본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욕심과 탐욕에 대한 말씀이죠. 그런데, 주님께서는 탐욕과 욕심에 대한 말씀을 근심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결론지으십니다. 그렇다면 그 사이에 무언가 끊어진 고리가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 고리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너희가 그것을 찾아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속에 있는 끊어진 고리, 아니 주님께서 감춰놓으신 고리는 바로 탐욕과 근심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것이라는 우리 마음에 대한 진리입니다. 주님은 탐욕은 실제로는 근심과 걱정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사람이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경우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것이 우리에게 다가올까봐 두려워하기도 하지만, 어떤 것이 떠날까봐 두려워하기도 합니다. 탐욕은 뒤쪽의 두려움에서 생겨나는 부산물입니다. 물질이 떠날까봐 부요함이 우리를 버릴까봐 두려워합니다. 왜냐하면 자기 생명의 안전함이 소유의 많고 적음에 달려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 두려워하는 것에 욕심을 냅니다. 더 많이 쌓아놓으려고 합니다. 떠나지 못하게 단단하게 붙들어 놓으려고 애쓰고 집착하게 됩니다. 그러니 우리의 진짜 문제는 욕심이 아니라 두려움인 셈입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이 누구십니까? 주님은 우리를 만드신 분이십니다. 우리를 속속들이 알고 계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욕심은 실은 근심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욕심 이야기를 하시고는 욕심부리지 말라고 하시지 않고 근심하지 말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왜 그 동안 우리가 욕심을 없애보려고 그렇게 애썼는데도 계속 실패해 왔는지 이제 아시겠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싸워야 할 적을 잘못 골랐기 때문입니다. 욕심과 싸워 이기기 위해서는 욕심이 아니라 근심과 싸워야 하는데, 자꾸 욕심을 상대했기 때문입니다. 뿌리가 아니라 가지를 붙들고 씨름했으니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싸움은 다람쥐 채바퀴 도는 듯한 싸움이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사람의 생명이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런 생각 때문에 생겨나는 욕심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셨고, 그 욕심에 대한 해답으로 근심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그렇게 우리가 진짜로 싸워야 할 적이 무엇인지 알려주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이 분명해 졌습니다. 우리의 진짜 대적은 ‘근심’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이 근심과 싸워 이기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또 문제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근심과 싸워 이기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주님은 그저 이제 누구와 싸워야 할지 알려주었으니 우리가 알아서 싸워보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이기든 지든 이제 우리 소관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 대신 그 방법까지 알려 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에서 어떻게 하라고 명령하실 때에는 항상 그렇게 할 수 있는 방법까지 알려주십니다. 그리고 그 방법은 그 명령 주변 어딘가에 있습니다. 확연하게 드러나 있기도 하고 때로는 넌지시 숨어있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찾아내기만 하면 됩니다. 만약 우리가 그렇게 찾아낸 방법에 순종할 수 있다면 그 명령에도 충분히 순종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을 능력있게 읽는 방법 중의 하나입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은혜로우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본문 속에 우리가 근심과 걱정과 싸워 승리할 수 있는 비결, 그래서 욕심의 문제까지도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셨습니다. 답부터 말씀드릴까요? 그것은 바른 지식과 바른 믿음입니다. 

먼저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바른 지식은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다’는 우리 자신에 대한 진리입니다. 너무 당연하죠. 누가 그걸 모르겠습니까? 그렇지만 우리는 실제 생활 속에서는 이것을 잊어버릴 때가 많습니다. 내 생명 자체가 아니라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고 근심하며 살아갈 때가 많다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우리가 근심의 문제, 먹고 쓰고 입고 사는 문제에 대한 근심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무엇보다도 우선 무엇이 더 중요하고 무엇이 덜 중요한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 순서를 확실히 정해 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꾸 우리의 생각과 관심이 먹고 사는 문제로 흐를 때마다 그것보다는 생명의 문제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연습을 많이 해야 합니다. 이것이 첫째 단계입니다. 뭐가 중요하다구요? 그렇습니다. 우리의 생명입니다. 그게 정말 중요하고 진짜로 걱정하려면 그것을 위해 걱정해야 합니다. 

이제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가겠습니다. 아마 여기까지 들으신 분들 중에는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생명이 중요하니까 그게 중요한 줄 아니까 그렇게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걱정하는 거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의 말씀에 의하면 그것이 바로 사탄의 속임수입니다. 사탄은 항상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생명은 우리가 먹고 입고 쓰는 것에 달려있다고, 그러니 그것을 더 많이 더 확실하게 확보해야 한다고, 그러니 욕심과 탐욕 밖에는 다른 삶의 원리가 없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의 사고방식이 아닙니다. 그것은 철저히 사탄적인 사고방식입니다. 그 이유는 너무나 분명합니다. 우리의 생명은 소유의 많고 적음에 달려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압니다. 너무나 잘 압니다. 우리 생명은 어디 달려있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그 분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그 생명을 좌지우지하시는 분이십니다. 원리적으로만 그런가요? 아닙니다. 현실 속에서도 그렇습니다. 저는 단순히 죽고 사는 문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먹고 사는 문제까지도 함께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를 다시 한 번 일깨우십니다. 까마귀와 백합화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에게 진짜로 필요한 것, 근심과 걱정에 휘둘리지 않으며 항상 풍성한 생명 가운데서 살아갈 수 있는 방법, 그리고 결국에는 하늘의 영광 가운데 영원히 살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십니다. 

까마귀 이야기와 백합 이야기는 우리가 욕심에 휘둘리고 근심에 휘둘리는 이유는 결국 우리가 우리가 하나님께 어떤 존재인지 확실히 알지 못하고 또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를 믿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까마귀보다 더 귀합니다. 백합화보다도 더 귀합니다. 존재 자체로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다른 피조물들과는 달리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런 것들을 먹이시고 입히시는 하나님이시라면 우리는 어떻겠습니까? 나 몰라라하시겠습니까? 훨씬 못한 것들은 돌보시면서 그런 것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귀한 존재인 그 분의 형상들을 그냥 내버려 두시겠습니까?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우리보다도 셈을 못하는 분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심한 모독이 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저와 여러분의 입고 먹고 사는 문제를 책임져 주실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이것 뿐만이 아닙니다. 30절을 보시면 “너희 아버지께서”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단지 그 분의 형상으로 귀하게 만드시기만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 뿐아니라 그 분은 결정적으로 모든 믿는 자들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저와 여러분의 아버지이십니다. 주님은 근심하고 걱정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믿음이 적은 자들아”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무슨 믿음이 적습니까? 우리가 거기 의지하고 살아갈 정도로 확신하지 못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놀랍게도 그 분이 우리 아버지시라는 사실입니다. 온 천지를 지으시고 주관하시는 분, 나를 그 무엇보다도 귀한 당신의 형상으로 만드신 분이 바로 나를 온전히 사랑하시는 나의 아버지라는 것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니라구요? 믿으신다구요? 성경의 논리는 그렇다면, 진실로 그 아버지를 믿는다면 근심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만약 그런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라면 그 전지전능하심과 사랑하심으로 나를 돌보지 않으실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 돌보심이 완벽하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는다는 것은 바로 바로 이 사실을 믿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나의 아버지라는 참된 믿음이 있다면 그는 적어도 근심과 걱정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고, 그것을 해결하려고 욕심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살아가지 않게 됩니다. 그럴 필요가 없죠. 나의  필요를 나보다 더 잘 아시고, 내게 가장 필요한 것을 가장 정확한 타이밍에 주시는 아버지가 있는데, 그 분이 실제로 나를 돌보고 계신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거기 의지해서 살아가는데 그럴 필요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오직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이것이 근심과 걱정에 휘들리며, 욕심과 탐욕의 힘에 굴복하며 살아가는 삶에 대해 주님께서 주신 대안적인 삶의 방법입니다. 이런 삶은 구체적으로 32절 이하의 말씀이 이야기 해주는 대로 나를 위해서 땅에 재물을 쌓는 삶이 아니라 그 재물을 가지고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삶이며 그렇게 해서 보물을 하늘에 쌓고, 그렇게 내 마음을 하늘에 고정시키는 삶의 방식을 말합니다. 그 나라의 영광을 얻게 되는 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게 옳다는 것을 알고 그것이 이 땅에서의 유한한 삶을 영원을 위해서 투자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이게 참 쉽지 않습니다. 여전히 어렵고 불가능하게만 여겨집니다. 그래서 여전히 우리를 좌절시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리하면 이런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라는 그 뒤에 붙어있는 주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진짜 더해주신다고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눈 앞에 근심과 걱정을 벗어나고 욕심을 이겨낼 방법, 그리고 하늘나라와 영원한 영광을 위한 확실한 삶의 방법이 있는데도 그리고 나아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빌 클린턴을 대통령에 당선시킨 표어가 있었습니다. 클린턴이 선거정책을 놓고 갈팡질팡할 때 친구이자 선거의 참모였던 한 사람이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라는 표어를 크게 써붙여놓았고 그 때부터 거기 집중해서 결국 선거에 승리했다고 합니다. 오늘 사탄도 우리를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 돈이야, 건강이야!”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속임수입니다. 우리를 계속해서 근심과 걱정에 묶어놓고 욕심에 휘둘리게 해서 하늘나라를 위해서 살지 못하게 하려는 거짓 표어입니다. 이 표어를 따르면 우리에게는 근심과 걱정, 욕심에 휘둘리는 것 밖에 남지 않습니다. 그대신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바보야, 문제는 믿음이야. 하나님을 네 아버지로 믿고 사는 믿음이야.”라고 말입니다. 

이제 하나님을 진실로 여러분의 전지하시고 전능하시며 여러분을 지극히 사랑하시는 아버지로 믿는 믿음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그 믿음으로 근심과 걱정, 그리고 탐욕과 싸워서 승리하시고 이제는 불확실한 땅이 아니라 확실한 하늘을 위해서 살아서 그 영광스러운 영생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