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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교회 설교/설교듣기

2012.01.19. 새벽예배(매일성경)




오늘 성경묵상은 설교로 대신합니다. 

날짜 : 2012-01-19

본문 : 누가복음 1장 26-38절


성도들과 만나거나 혹은 심방을 하게 되면 가끔씩 저에게 개인적인 질문을 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참 감사하죠. 그것은 저에 대해서 궁금해 하시는 것이 있고 용기를 내어 물어보실만큼 저에게 관심이 있다는 뜻이니까요. 저에 대해서 물으시는 질문 중에는 제가 어떻게 목사가 되었는가에 대한 질문이 가장 많습니다. 성도님들이 저에게 “목사님은 어떻게 목회자가 되셨습니까?”라고 물으시면 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목사가 안되면 죽을 것 같아서 목사가 되었습니다.” 이런 대답을 들으시면 더 궁금해 하십니다. 더 궁금해 하라고 드린 대답이니 제 작전이 성공한 것이죠. 그런 다음에는 좀 더 자세히 설명해 드립니다. “처음에 부르심을 받았을 때는 도저히 제가 제대로 감당할 수 없는 일인 것 같아서 하나님께 안한다고 말씀드렸더니 제 마음 속에 당장 죽을 것 같은 공포감이 찾아왔고, 거절하면 거절할수록 그 공포가 더 강해져서 두 손, 두 발 다 들고 목사가 되었습니다.”라고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목사가 되는 것이 은혜입니까? 은혜가 아닙니까? 굉장히 큰 은혜입니다. 목사라는 직함 자체가 은혜가 아니라 사실 인간 중에는 그런 일을 감당할만한 자질도 자격도 온전히 갖춘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택하시고 부르셔서 하나님의 교회를 돌보는 일을 하게 하신다면 그것은 정말 특별한 은혜라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병이 낫고 개인적인 문제가 해결되는 것 보다 더 큰 은혜죠. 그런데, 이런 종류의 은혜에는 은혜치고는 좀 묘한 곳이 있습니다. 선뜻 나서서 그 은혜를 받으려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은혜인데, 굉장히 큰 은혜인데 될 수 있으면 그 은혜를 피하려 드는 사람이 더 많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런 종류의 굉장한 은혜를 그렇게 피하려고 하는 이유는 이 은혜가 크고 놀라운 은혜인만큼 그 은혜를 받은 사람에게는 큰 짐이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은혜라고 하면 그저 좋은 것만을 생각하지만 실제로 은혜 중에는 너무 큰 은혜이기 때문에 받기가 꺼려지는 그런 은혜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은혜라도 하나님께서 주시려고 하시면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지 않는 것은 또 하나의 불순종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약혼자가 있었습니다. 자신처럼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가장 귀한 것으로 여기고 가난하지만 은혜 가운데 성실하게 살아가는 요셉이 남편으로 정해져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그런 요셉과 결혼하는 날을 꿈꾸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러던 어느 날 가브리엘 천사가 나타납니다. 그리고는 대뜸 이런 인사를 건넵니다.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아주 아주 좋고 복된 인사인데 마리아는 이 인사를 듣고 굉장히 크게 당황스러워 합니다. 그 인사 자체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고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는 곰곰히 생각합니다. “이게 무슨 인사지? 왜 저런 인사를 하지?” 가브리엘은 그러한 마리아의 두려움을 알아차리고 다시 한 번 마리아를 안심시킵니다. “무서워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 그런데 그 뒤에 이어지는 이야기는 그런 위로와는 정반대가 되는 이야기였습니다. 마리아의 느낌이 맞았던 것입니다.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은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 노릇할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이것은 마리아가 낳을 아들이 약속된 메시야라는 뜻입니다. 경건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마리아는 그 말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낳을 아들이 모든 이스라엘이 기다리고 또 기다리던 메시야가 된다는 것은 얼마나 큰 영예이며 은혜입니까? 그런데 문제는 그런 은혜가 오는 방식이 사람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정상적이지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처녀가 아기를 낳아야 하는, 당시의 관습으로는 전혀 용납될 수 없는 그런 일을 의미했고, 또 한 가지는 그것이 도저히 상상조차 하지 못할만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묻습니다. “제가 남자를 전혀 알지 못하는데 어찌 아기를 낳는 일이 가능합니까?” 그러자 가브리엘은 이렇게 답합니다. “그건 걱정말아라.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는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그 분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리게 될 것이다. 봐라. 나이가 많아서 전혀 아이를 낳을 수 없었던 엘리사벳이 그 증거이다. 엘리사벳은 벌써 잉태한지 6개월이 되었다. 하나님께 불가능한 것은 없다.” 이 말에 마리아는 그 뜻을 받아들입니다. “주의 계집 종이오니 저에게 당신의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온 세상을 위한 메시야의 어머니가 된다는 것은 이 세상 그 어떤 복보다도 더 복된 복입니다. 그것은 아마도 인간이 얻을 수 있는 은혜 중에 가장 큰 은혜일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에게 메시야의 어머니가 된다는 것은 그가 순조롭게 결혼을 하고 남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자라서 메시야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았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처녀로 아이를 낳아야 했습니다. 그것을 받아들여야만 했습니다. 그 두렵고 거친 삶의 환경 속으로 내던져져야 했습니다. 메시야의 어머니가 된다는 것, 그 지극한 은혜와 복을 누리며, 또 온 세상에 가장 큰 은혜를 가져다 주는 통로가 되는 영광을 누린다는 것은 바로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했던 것입니다. 

내가 직접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누리는 것도 큰 복이지만 누군가를 위한 은혜의 통로가 된다는 것은 정말 은혜 중의 은혜입니다. 나 때문에 누군가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을 수 있고 또 그 은혜로 더 온전하고 풍성한 삶을 살 수 있게 된다면 그것만큼 가치있고 의미있는 일은 없을 것이고 그것보다 더 영광스럽고 복된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일에는 항상 내 편에서 짊어져야만 하는 지기 힘든 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사람이 그런 통로가 되는 것어 수많은 사람들을 유익하게 하는 것을 보면 감동하며 존경스러워 하면서도 막상 나나 내 가족은 그런 일에서 열외되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어찌보면 이기적인 우리들의 어쩔 수 없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우리의 본능에 져서 항상 이기심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온전한 모습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우리의 모습은 진실로 하나님께 순종하며 그 분을 기쁘시게 해 드리기를 원한다면, 그리고 참으로 큰 은혜를 누리려면 반드시 넘어서야 하는 장애물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계속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니며, 그래서 혼자의 힘으로 그 짐을 지고 갈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그리고 그 분의 종으로 살아가면서 반드시 믿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짐이라면 우리가 포기하고 내려놓지 않는 한, 반드시 그 분이 지게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지 못하니까 지레 겁먹고 의미있고 진실로 복된 은혜 안의 삶을 살아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건냈던 인사를 주의 깊게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거기에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참된 은혜의 짐, 영광스러운 짐을 가볍게 지고 갈 수 있는 비결이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가브리엘은 마리아에게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 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마리아를 향한 축복이기도 했지만 마리아가 다시 기억하고 확신해야하는, 이미 마리아가 누리고 있는 은혜를 일깨워 준 것이기도 했습니다. 마리아가 메시야의 어머니가 되는 은혜, 모든 인류를 위한 가장 큰 은혜의 통로가 되는 영광에 따르는 짐을 지기 위해서는 마리아가 그것을 기억하고 확신하는 것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은혜롭고 영광스러운 삶을 살아가려면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일깨워주었던 것을 기억해야 하며 또 붙들어야 합니다. 원래 은혜를 받은 자는 평안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은혜가 짐을 동반할 때는 오히려 은혜가 평안을 깨뜨리기도 합니다. 그럴 때 우리가 붙들어야 할 사실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나 혼자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짐은 내가 져야할 짐이 아니라 그 분이 너끈히 지게 하실 그런 짐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런 짐만 허락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진실로 우리와 함께 하시길 원하십니다. 스스로 임마누엘이 되어서 오실만큼 당신의 백성들과 함께 하시길 원하십니다. 성령 하나님으로 우리 안에 거하실 만큼 우리와 함께 하시길 원하시며, 또 그렇게 함께 하십니다. 이것이 마리아가 얻었던 은혜이고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은혜입니다. 우리가 은혜의 짐,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짐을 져야할 때 기억해야 할 것이 바로 이 은혜입니다. 우리가 이 은혜를 잊어버리고 이 은혜에 의지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항상 우리에게 주어지는 은혜로운 짐, 영광스러운 짐을 피해다니는 사람들로 살아갈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 짐을 지겠다고 나선다고 해도 결국은 그 짐에 눌려 지쳐버리고 말 것입니다. 

처녀 마리아는 결국 하나님의 은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확신하였기에 불안함 속에서 평강을 누릴 수 있었고, 그 평강 안에서 그 불가능해 보이는 짐을 질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되었고, 온 세상을 위한 복음의 통로가 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가장 큰 은혜, 그리고 가장 큰 영광은 때로는 우리에게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질 수 없는 짐을 안겨주곤 합니다. 그리고 이런 짐들이 우리로 하여금 그 은혜를 거부하고 그 영광을 거절하게 만들곤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멈춘다면 진짜 깊은 은혜의 바다를 항해할 수는 없습니다. 가장 풍성한 은혜를 나의 것으로 삼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영광과 은혜가 클수록 감당해야할 짐도 커지지만 그 짐은 나 홀로 감당할 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게 하실 짐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함께 계시며,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 분이 지게 하시는 멍에는 쉽고 가볍다는 사실을 믿고 담대함 속에서 순종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두려움은 우리의 순종을 가로 막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주어질 가장 큰 은혜도, 가장 큰 영광도 우리에게서 멀어지게 합니다. 그래서 그 두려움은 극복되어야 하고 또 극복될 수 있습니다. 져야할 짐을 바라보지 마시고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분이 함께 지고 가시니 쉽고 가벼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믿음 가운데서 담대하고 평강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느 순간에도 “주의 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질 것입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두려움에 지지 말고 믿음으로 두려움을 이기셔서 가장 큰 은혜 가운데 사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