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동부교회 설교/설교듣기

2012년 새벽설교. 일어나 함께 가자


아0208to17.doc


아0208to17.pdf


0412.mp3.zip




문 : 아가서 2장 8-17절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이 말은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이미 굉장히 익숙해져 있는 말들 중의 하나입니다. 그렇지만 세상에 이것만큼 충격적이고 놀라운 선언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온 우주를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그 분이 그렇게 창조하신 피조물들 중의 하나입니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기는 했어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온 우주와 그 속을 채우고 있는 그 모든 것들에 비교해 본다면 우리들은 정말 미미한 존재에 불과합니다. 잘 아시다시피 우리가 사는 지구는 태양계에 속해 있습니다. 태양이라는 고정된 별을 중심으로 돌고 있는 별들 전체를 그렇게 부르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 태양계는 은하라고 부르는 더 큰 별무리에 속해 있는데, 하나의 은하에는 적게는 1천만개에서 많게는 100조개의 태양같은 별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의 은하 안에는 1천만개에서 100조개의 태양계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죠. 그런데, 현재의 과학기술로 관측 가능한 범위 안에서만 보아도 우주에는 대락 1천 7백억개 이상의 은하가 존재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우주, 또 아무렇지도 않게 우주라고 부르는 ‘우주’의 크기입니다. 아침부터 머리 복잡하게 해 드려서 죄송합니다. 

제가 이런 느낌도 오지 않는 숫자들을 나열한 것은 우리가 ‘세상’이라고 부르는 것 안에서의 우리의 ‘크기’가 어떠한지를 생각해 보자는 의미에서 였습니다. 그런 큰 우주 속에 있는 1천 7백억개 이상의 은하계, 그 중 하나의 은하계 안에 있는 1천만개에서 100조개의 태양계, 그리고 그 하나의 태양계에 속한 여러 개의 별들 중의 하나인 지구, 또 그 지구 속의 무수한 피조물, 그리고 그 피조물 중 하나인 인간, 그리고 60억의 인간 중의 하나.... 이렇게 보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크기는 정말 미미하다고 밖에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을 다 만드신 바로 그 분이 이런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으며, 또 우리는 이것을 믿고 또 살아가면서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원래 인간의 사고방식에서는 결코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사실 우리가 그 사랑 속에서 살아가고 있어서 그렇지 이 세상의 어떤 종교도 자신들의 신이 자신들을 사랑한다는 교리를 가지고, 그 사랑을 경험하며 그 속에서 살아간다고 이야기하는 종교는 없습니다. 그만큼 인간이 생각하는 신과 그 신을 섬기는 인간의 차이가 너무나 현저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기독교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은 그것 자체가 기적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랑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그런 기적 중에서도 최고의 기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랑이 단순히 이상적이거나 윤리적인 사랑이 아닌, 남녀간의 사랑, 서로 보고 싶어 안달하고, 집착하고, 서로에게 끌리고 함께 싶어하고, 그래서 떨어지기 싫어하는 이성간의 사랑과 같다고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또한 얼마나 경이롭고 충격적인 일이겠습니까?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단순히 아버지로서가 아니라 연인으로, 그리고 남편으로 애인을 사랑하고 아내를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는 그런 분이라고 말씀합니다. 

아가서는 성경의 그 어떤 책보다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그런 사랑, 그리고 그 사랑에 대한 우리의 반응으로써의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가장 생생하게 잘 그려주고 있니다. ‘시’라는 언어로 마치 그림을 그리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아가서는 설교하기 보다는 어쩌면 시를 감상하듯이 ‘감상’해야할 책인지도 모릅니다. 머리 보다는 가슴으로, 생각보다는 감정으로, 사랑에 촉촉하게 젖은 눈빛으로 얼굴에는 행복한 미소를 머금고 사랑에 빠진 연인의 마음이 되어 감상해야 할 책인지도 모릅니다. 기회가 되신다면 한 번 그렇게 읽어보기시 바랍니다. 

아가서는 어디서 부터 어디까지가 남자가 한 말이고, 또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여자가 한 말인지 잘 구분이 가질 않습니다. 이게 아가서를 읽기 힘들게 하는 이유들 중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읽어보면 단서가 있습니다. 남자가 여자를 부를 때는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라고 부르고, 여자가 남자를 부를 때는 “나의 사랑하는 자”라고 부릅니다. 이 호칭을 중심으로 해서 보면 대개는 누가 한 말인지 구분이 갈 것입니다. 읽으실 때 헤깔리지 마시라고 잠시 힌트를 드립니다. 

남자와 여자는 신분이 매우 달랐습니다. 여자는 들에서 포도원을 지키는 피부가 햇빛에 검게 그을린 보잘 것 없는 여인이었습니다. 외모도 그저 평범한 쪽에 속하는 여인이었습니다. 그 반면에 남자는 굉장히 귀한 신분이었습니다. 아가서 전체가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둘은 첫 눈에 반합니다. 그 모든 신분의 차이와 외모의 차이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시작부터 이 사랑은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을 보여주고 있는 듯합니다. 지존무상하신 하나님께서 집에서 조차 잘못하여 쫓겨난 것같은 보잘것 없는 시골여인같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하늘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인간으로 낮아지시면서까지 우리들을 사랑하셨습니다. 남자의 여인을 향한 사랑은 그 사랑이 아무리 깊고 위대하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이런 사랑에 비한다면 희미해서 잘 보이지조차 않는 뿌연 그림자에 불과할 것입니다. 

첫눈에 사랑에 빠졌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여인은 남자를 떠났습니다. 물론 완전히 떠난 것은 아니지만 무언가 그 사랑을 방해하는 것이 있었고, 여인은 그 방해를 이겨내지 못하고 남자를 떠나 산을 넘어 먼 곳으로 가서 거합니다. 둘 사이에 찬 바람 부는 겨울, 그리고 비바람이 몰아차는 계절이 찾아온 것입니다. 그 때 남자가 여자를 찾아옵니다. 여자를 애타게 부르며 산을 넘고 또 넘어서 노루와 젊은 사슴처럼 달려 순식간에 여인에게로 옵니다. 그 부르는 소리가 여인의 귀에 들려옵니다. 그 소리는 이내 애절한 요청으로 바뀝니다.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의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반구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 우리는 하나님께 언제나 사랑이고, 또 어여쁜 자입니다. 우리가 그 분의 자녀라면, 그 분이 사랑하시는 자라면 이 사실은 언제나 변함이 없습니다. 그 크기도 깊이도 진하기도 전혀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도 그 분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사랑은 변합니다. 여전히 그 분을 사랑한다고 고백해도 우리의 사랑은 이리저리 흔들립니다. 그 분의 땅, 그 분이 ‘우리 땅’이라고 부르는 곳에서 멀어져 갑니다. 그래서 그 분과 우리 사이의 겨울, 그리고 비오고 바람부는 계절은 전혀 그 분의 책임이 아닙니다. 모두가 다 우리의 책임입니다. 그 분은 언제나 우리를 다시 찾아오십니다. 차디찬 겨울을 흩어버리고, 비바람을 거둬버리고 우리를 다시 찾아오십니다. 우리의 낙심된 무릎을 일으켜 세우시고 때로는 토라진 마음을 달래셔서 함께 가자고 말씀하십니다. 이미 겨울은, 비바람은 내가 치워버렸으니 이제 함께 있어야 할 그 곳으로 다시 가자고 설득하시며 말씀하십니다. 혹시 거기가 바위 틈 낭떠러지라도 마다하지 않으십니다. 아무리 은밀하게 숨어있어도 그리로 찾아오십니다. 그리고는 다시 목소리를 들려달라고 다시 얼굴을 보게 해 달라고 간청하십니다.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온 광야를 헤맸던 그 분은 우리를 뜨겁게 사랑하시기에, 그렇게 깊이 사랑하시기에 그런 수고를 마다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저는 바울을 따라 분명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나의 나된 것은 오로지 주님의 은혜”라고 말입니다. 만약 단 한 번이라도 내가 주님에게서 멀어지고 그 신뢰를 잃어버렸을 때, 내 영혼이 그렇게 만신창이가 되었을 때 나를 그냥 내버려 두셨다면, 산들을 넘어 찾아오시고 낭떠러지로 자를 찾아오셔서 나를 어루만지시며 다시 부르시지 않으셨다면 저는 절대로 지금 여기에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유가 어찌되었든 하나님은 제가 하나님으로부터 너무 멀어진다 싶으면 항상 먼저 찾아오셔서 이런 저런 일들로 그 거리를 좁히게 하셨습니다. 때로는 찬양 한 곡으로, 때로는 기도 한 마디로, 때로는 성경이나 즐겨읽은 책 한 구절을 통해서라도 기어히 저를 설득하시고 제 자리로 되돌려 놓으셨습니다. 그러니 나의 나된 것이 주님의 은혜이듯이, 미래의 나의 나될 것 또한 하나님의 은혜일 수 밖에 없습니다. 

남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우리의 포도원에 꽃이 피었음이니라” 이미 포도원에는 꽃이 피었습니다. 그 남자와 여자, 우리들과 하나님 사이에는 꽃이 피었습니다. 비록 지금은 그저 아름다운 꽃이지만 그 꽃들은 모두 열매가 될 것입니다. 가장 달콤한 과실이 되고, 또 가장 향기로운 포도주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꽃이 열매가 되기를 원한다면 그저 내버려두어서는 안됩니다. 이미 꽃이 피어 향기를 발하기 시작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일지라도 그것이 열매가 되지 못하게 방해하는 방해물들은 언제든지 있습니다. 포도원 울타리 밑을 파고 들어와 과수원을 망가뜨리는 작은 여우를 그냥 내버려 둔다면 그 꽃들은 시들어 버리고 떨어져 버려 탐스러운 포도송이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처음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랑 하나로 모든 것이 다 될 것처럼 생각됩니다. 그 사랑이 주는 행복과 만족이 너무 커서 그것이 변질되거나 혹은 약해질 수 있고, 또 좌절될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런 은혜로운 감정은 그대로 놓아두면 6개월을 가지 못합니다. 그 사랑의 향기는 옅여지기 시작하고 그 풍성함은 매마르기 시작합니다. 그대로 놓아두면 나중에는 심지어는 그 사랑을 알기 이전보다 더 매말라버린 자신의 영혼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약해져 갈 때, 그 풍성한 만족이 옅여져 갈 때, 그 때가 바로 포도원 담장을 허무는 작은 여우를 잡아야 할 때입니다. 작다고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그냥 내버려 두어서도 안됩니다. 우리를 다시 찾아오셔서 이제 그 여우를 잡으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순종해야 합니다. 남자는 그 여우를 스스로 잡지 않았습니다. 그 여인에게 그 여우를 잡으라고 말했습니다. 여우를 잡아야 하는 것은 남자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유혹을 당하는 것, 그래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옅어지고 그 분을 향한 믿음이 약해지는 것은 우리들입니다. 그래서 작은 여우를 발견해야 할 것도 우리들이고, 그 여우를 잡아야 하는 것도 우리들의 일입니다. 그것을 분별해야 하고 그것을 몰아내기 위한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우리가 마지막 날 하나님 앞에 서는 그 날까지 우리 포도원에는 아직 풍성한 포도열매가 맺히지는 않을 것입니다. 꽃은 피고 또 향기를 발할지라도 온전한 열매는 언제나 맺혀지기 이전일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분 앞에 영원한 신부로, 가장 아름다운 그 분의 아내로 서기 까지는 우리는 이 포도원을 지켜내야 합니다. 지키려고 애쓰고 힘써야 합니다. 

남자의 목소리, 자신을 찾아와 깊고 풍성한 사랑으로 설득하는 남자의 목소리를 들은 여인은 정신을 차린 것같습니다. 여인은 그제서야 남자의 사랑이 얼마나 진실되고 풍성한지를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여인의 남자를 향한 참된 사랑은 그제서야 비로소 시작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인은 남자의 사랑에 이렇게 응답합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구나 그가 백합화 가운데서 양떼를 먹이는 구나 나의 사랑하는 자야 날이 기울고 그림자가 갈 때에 돌아와서 베데르 산에서의 노루와 어린 사슴 같아여라”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구나”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참된 사랑이 시작되는 것은 바로 우리가 이것을 깨닫고 또 이런 고백에 이르렀을 때입니다. 우리는 먼저 그 분을 진실로 사랑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사랑은 단지 그 분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깨닫기 시작할 때, 그 사랑에 대한 반응으로써 시작될 수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이 그 분과 우리를 하나로 만든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을 진실로 경험해야 합니다. 그 분이 나에게 속하였고 나는 그 분께 속해있다는 이 신비로운 은혜 속에 살아가는 자들이 되어야 하고 그 행복한 고백 속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사랑은 더 깊어질 수 있고 또 더 온전해 질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자신을 붙드는 것도, 또 우리의 사랑을 다시 회복되게 하시는 것도 결국 하나님입니다. 그 분의 변함없는 사랑, 산을 넘어 허겁지겁 우리를 찾아오시는 그 분의 그 깊고 뜨거운 사랑이 빗나간 우리를 제자리로 돌려놓는 것입니다. 때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희미해질지라도 또 그 분을 향한 신뢰가 약해질지라도 이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 분과 나는 하나이며 내가 그 분에게서 끊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고백하시고 그 분의 다시 찾아오시는 도움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 분이 사슴과 노루발로, 그 분의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를 찾아내셔셔 우리를 더 깊고 풍성한 사랑 가운데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일어나서 함께 가자고 우리를 일으켜 세워주실 것입니다. 

항상 이 풍성하고 다함없는 깊고 진한 사랑 속에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