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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성경 묵상

2012.01.01. 매일성경 묵상

오늘 본문은 시편 120편과 121편입니다. 

    시편 120편
 

[1-4절]

물리적인 고통도 큰 고통이지만 다른 이들의 공격적이고 사악하며, 거짓된 말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것 또한 때로는 죽기보다 힘들게 여겨질 때도 있다.(실제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도 있는 것을 보면 차라리 물리적이고 구체적으로 느껴지는 고통이 더 심각한지도 모르겠다) 시인이 당하는 환란은 바로 그런 악하고 거짓된 말로 인한 고통이었다.(주님보다 이런 고통을 강하게 당한 사람이 또 있을까!) 시인은 그런 환란 중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응답하셨다. 역시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이시다! 2절은 그의 기도다. 그는 거짓된 입술과 궤사한 혀에서 나오는 악하고 거짓된 말들로 인해서 죽음에 방불한 고통 속에 있었고 거기서 기도했다. 그랬더니 응답을 주셨다. 그렇다고 당장 시인을 향한 악한 말들이 그친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3절과 4절은 그 응답이다. 기도 중에 시인이 다시 확인하게 되고 확신하게 되었던 것은 그 궤사한 혀(그런 혀를 가진 사람)에 대해 하나님께서 행하실 심판이었다. 그 혀의 상급은 ‘징벌’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혀와 그 혀를 놀린 사람을 용사의 날카로운 화살로 공격하실 것이며, 로뎀나무 숯불을 그 혀 위에 올려놓으실 것이다. 이것을 깨닫고 확신하게 된 것이 하나님의 응답이었고, 구원이었다. 

  • 과연 나는 이것을, 이런 깨달음들을 참된 응답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 분의 보응과 심판하심을 믿고 그것을 충분하다는 믿음을 가지고 다시 평안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5-7절]

그리고 나서 보니 이제 상황이 파악되기 시작했다. 왜 자신이 그런 고통을 당할 수 밖에 없는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가 살아가고 있는 환경 자체가 그런 고통을 만들어 낼 수 밖에 없었다. 그는 ‘메섹’과 ‘게달의 장막’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었다. 그 곳이 그의 삶의 자리인 한 그에게 악한 자들의 말로 인한 고통은 어쩌면 그가 거기서 살고 있는 한 당연한 것이다. 왜냐하면 시인의 말대로 그들은 ‘화평을 미워하는 자’이며 화평을 위한 말을 ‘싸움’으로 되돌려 주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성도가 사는 삶의 자리는 신실한 성도들 가운데가 아니다. 성도는 항상 ‘세상’에서 산다. 세상의 근본적으로 투쟁의 장소이다. 거기 사는 사람들은 평화보다는 투쟁에 익숙하다. 그들 가운데서 살아간다면, 적어도 말로 인한 아픔과 고난은 당연한 결과가 아닐까?(하지만, 어디 하나님 모르는 세상만 그러하랴! 이스라엘도 그리고 오늘날의 이스라엘도 그렇지...) 시편 120편은 여기서 끝난다. 왜 그럴까? 왜 시편 120편은 시인이 기도 중에 얻은 현실인식과 상황판단으로 끝날까? 어쩌면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참된 응답이 아닐까? 시인은 여전히 같은 현실 속에서 살 수 밖에 없다. 그 현실은 벗어날 수도 부인할 수도 없다. 그곳이 성도의 자리이다. 참된 성도는 항상 잠재적으로 그런 고통을 내포하고 있는 현실 속에서 살아간다. 그걸 부인하는 것은 신앙이 아니다. 그건 착각이며 환각이다. 내가 어디서 누구와 살고 있는가 하는 것을 직시해야 하며, 거기서도 넉넉하게 지낼 수 있는 비결을 배워야 한다. 


시편 121편 

이 시를 따로 떼어 놓아도 참 아름답고 든든한 시편이 된다. 그렇지만 한 번 120편과 연결해서 생각해 볼까? 이제 시인은 자기 속에 갇혀있지 않다. 고통 때문에, 그 고통에만 집착되어 있던 시각이 현실로 향했다. 그리고 지금 고통 당하는 것은 자신이지만 영원히 고통당하게 될 것은 그 혀들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의 눈은 서서히 위를 향하고 있다. 멀리 그리고 높이 들려지고 있다. 그러자 하나님이 보이기 시작했다. 밝게 보이기 시작했다. 시인의 영혼은 가벼워졌다. 그는 다시 하나님을 향한 근본적인 확신으로 돌아가고 있다. 그의 도움은 바로 하나님, 이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으로부터 올 것이다. 그 도움이 어찌 부족하랴? 그 도움이 어찌 연약하랴? 그 분의 도움은 틀림이 없고, 그의 도움은 부족함이 없고, 그의 도움은 정확하며, 빈틈없이 완전하다. 눈이 산을 향할 수 있게 되니 그 분이 보였고, 그 분이 보이니 그 분의 완전한 도우심이 보이기 시작했다. 시인은 그렇게 그 도우심에 대한 확신으로 평안할 수 있었다. 


두 시편의 제목은 ‘성전으로 올라가는 노래’다. 성전으로 올라가는 사람은 누구일까? 힘들고 거칠어도 하나님께서 주신 ‘현실’을 떠나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심판에 소망을 걸고 모든 것이 바로 잡혀질 그 날을 기대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의 발은 고통스러운 삶의 자리에 놓여 있지만 눈은 하나님의 산, 시온을 바라보는 사람이다. 또한 거기로 부터 올 하나님의 도움을 신뢰하며 소망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의 제사를, 예배를, 그리고 기도를 기뻐받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