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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성경 묵상

2012.01.02. 매일성경 묵상

시편 122편 

1-2절

시인이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 임재 가운데 거하는 일을 얼마나 좋아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시인은 누군가 자신에게 성전으로 가자고 하는 말을 했을 때부터 그 마음에 기쁨이 가득 찼다. 이 말을 단지 교회에 가는 일이나 예배드리는 일로만 이해해서는 안된다. 당시 성전이란 하나님의 집이었고,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이었으며,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 맺었던 언약을 확증하고 상징하는 그런 곳이었다. 그러니 단순히 오늘날의 예배당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시인이 기뻐하는 일은 그 건물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었으며 그 하나님과의 만남이었다.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거하고, 그 분을 진심으로 경배하며, 그 분과의 변함없은 약속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일... 시인은 그것에 대해서 기대와 흥분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그런 마음으로 들어서는 예루살렘 성읍은 하나의 단순한 성읍이 아니라 그의 기쁨을 함께 나눌 친구와도 같았다.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 자신을 가장 기쁘게 맞이해 줄 그런 친구 말이다. “예루살렘아!” 시인은 예루살렘을 이렇게 부를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친구를 향해서 이렇게 말할 수 밖에 없었다. “우리 왔다!” 

3-5절

예루살렘은 구조적으로 아주 잘 지어진 도시였다. 적어도 시인의 보기에 그 모든 것들에서 단 하나라도 빠지만 그 온전함이 깨지는 조화롭게 잘 지어진 도시였다. 시인은 그러한 도시의 모습 속에서 열 두 지파로 이루어진 이스라엘의 모습을 본다. 잘 짜여져 견고하게 세워진 예루살렘, 그리고 잘 연합된 열 두 지파로 견고하게 세워진 이스라엘... 예루살렘의 그 온전함과 조화 속에 성전이 있듯이, 하나님께서는 이 열 두 지파의 연합 속에 임재하시며 거하신다. 예루살렘이 예루살렘 성전을 더욱 빛나고 영광스럽게 하듯이 그러한 이스라엘은 그들과 함께 계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더욱 빛나게 한다. 예루살렘, 거기 심판의 보좌가 세워져 있다. 다윗 집의 보좌가 세워져 있다. 다윗 가문의 보좌는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상징한다. 그 보좌가 든든히 그리고 제대로 세워져 있다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로 서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예루살렘은 단지 하나님의 임재가 이스라엘과 함께 있음을 나타낼 뿐 아니라 그 분의 완전한 판단과 다스리심도 그들과 함께 하심을 나타내는 곳이었다. 그러니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예루살렘으로 가는 일, 거기서 성전을 보고 다윗의 보좌를 보는 일은 그 어떤 일보다도 기쁘고 감격적인,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드릴 수 밖에 없는 일이었다. 

여기서 참된 교회의 모습을 본다. 교회에는 하나님의 임재와 그 분의 다스림이 있어야 한다. 그 두 가지가 수월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 곳이 바로 교회여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충만하고 지속적인 임재와 온전한 다스리심은 결코 기계적인 것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의 충만하신 임재와 다스리심이 있는 교회, 그 교회는 예루살렘 성을 닮아야 하고 그 성을 닮은 열 두 지파의 연합을 닮아야 한다. 그 온전한 연합과 조화 속에 하나님은 온전히 임하시고 또 다스리신다. 

6-9절

예루살렘이 평안하다는 것, 그것은 곧 하나님의 다스리심과 임재하심이 이스라엘과 함께 한다는 뜻이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예루살렘의 평강을 위해서 기도하는가?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누가 예루살렘을 위해서 기도할 때 기쁘게 응답하시는가? 바로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 진실로 하나님의 임재와 다스리심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예루살렘의 평강은 바로 그의 평강이기도 하다. 그의 형통이기도 하다.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예루살렘에 평강이 없다면,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 온전한 평화가 없다면 결코 평안을 누릴 수도 없고, 자신의 삶을 형통한 삶이라고 여기지도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의 평강은 모두의 평강이다. 그 분이 충만히 거하시고 또 온전히 다스린다면 그것은 곧 모두의 ‘복’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시인, 그리고 경건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어서 형통과 평강이란 결코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지금 내가 바라는 평강, 그리고 우리가 원하는 평강은 시인이 바라보고 인식했던 평강과 어떻게 다른가? 오늘날 우리는 어쩌면 우리의 평강과 복을 너무 일방적이고 기계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것을 하나님의 임재와 다스리심의 열매라는 것을 온전히 인식하는 인식이 너무 부족하지 않은가?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든 우리의 복이란, 우리의 평강이란 그런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의 다스림이 가져다 줄 수 있는 선물이다. 만약 그렇지 않은 평강과 복이 있다면 분명히 그것은 언젠가는 쓰디쓴 부산물을 생산할 것이며 그것 때문에 참된 평강과 복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마치 현재의 조국 교회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