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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성경 묵상

2012.01.22. 매일성경 묵상

     오늘 본문은 누가복음 1장 67-80절입니다. 

      스가랴의 예언이며 노래. 예언은 노래가 되기 힘들다. 그러나 스가랴의 예언은 그 어떤 노래보다도 기운차며 소망넘치며 확신이 가득찬 노래다. 그 노래가 그리스도를,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구원을 노래하고 있기 때문이다.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아보사 속량하시며...”(68절)

때로 우리가 사는 인생에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아보시지도 않고 또 건져주시지도 않는 것 같은 순간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막간’일 뿐이다. 그 막간이 지나면 본막은 반드시 오른다. 그 막간을 참지 못하면 본막을 기대할 수도 없을 뿐더러 그 본막의 감격과 기쁨을 경험할 수 없다. 스가랴는 그 막간에 살았던 사람이지만 본막이 오를 것을 의심치 않았던, 기다리고 기대했던 사람이었다. 그는 그 기다림 끝에 본막이 오른 것을 보게 된 것이다. 믿고 기다리는 자, 소망하는 자의 기쁨과 감격이 가장 크다. 파수꾼이 기다리는 새벽이 가장 밝고 따뜻한 것처럼 말이다. 

“우리 조상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 거룩한 언약을 지키셨으니 곧 아브라함에게 맹세하신 맹세라”(72절) 

아브라함을 돌아보셨던 것처럼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그리고 그 분의 형상으로 지으신 모든 피조물들을 돌아보셨다. 긍휼히 여기셨다. 그런데 이 긍휼히 여기심은 사람의 긍휼히 여김과 다르다. 사람의 긍휼은 전적으로 그 사람의 선의에 의존되어 있다. 말그대로 그 사람 내키는 대로인 불안한 것이다. 그래서 사람의 긍휼은 그 긍휼을 원하는 사람을 비굴하게 한다. 그 사람의 눈치를 보게 만든다. 여기서 수많은 인간관계, 그리고 권력 속의 악이 잉태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긍휼은 하나님께서 언약을 지키신 결과다. 아브라함을 불쌍히 여기사 아들을 주시겠다고 하셨과 그 약속대로, 그 언약대로 아들을 주셨다.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시는 것은 이런 식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긍휼을 기대하는 사람은 비굴해 지지 않는다. 오히려 긍휼을 기대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를 더 평안하게 만들고, 긍휼을 기대하면서 더 견고해 지고 당당해 진다. 간절하지만 평안하며, 간절하지만 겸손하다. 그리고 세상에 대해서는 당당하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겠다고 ‘맹세’하셨고, 그 ‘맹세’를 지키신다. 그 영원하신 분이 온전하신 분이 맹세하셨다면 그건 지금 눈 앞의 현실보다도 더 확실한 것이다. 이것을 믿는 것이 믿음이며, 이것을 믿는 믿음은 결코 배신당함이 없다. 그리고 믿는 자는 이것을 안다. 

“우리로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입고 종신토록 주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 없이 섬기게 하셨도다”(75절)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긍휼히 여기셨고, 그래서 우리 ‘원수’의 손에서 건지셨다.(할렐루야!!!) 구원을 주셨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그 구원 안에 있다. 모든 것이 끝났을까? 아니다. 그렇지 않다. 모든 은혜가 그렇듯이 구원의 은혜도 주신 목적이 있다. “종신토록 주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 없이 섬기게 하셨도다” 건지신 것은 건지신 자로 살게 하시기 위해서 였다. ‘종신토록...’ 우리가 주 앞에 설 때까지 ‘성결과 의로...’ 구별되고 하나님과의 온전히 회복된 관계 안에서 그 관계에 신실하며, ‘두려움 없이...’ 종의 마음이 아닌 자녀의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하기 위해서 였다. 구원의 목적, 우리에게 약속하시고 맹세하시고 또 그렇게 이루신 그 구원의 목적은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종의 마음이나 동기인 두려움이 아니라 자녀의 마음인 사랑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구원이란 바로 그럴 수 있는 동기와 힘을 모두 공급받아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자리로 옮겨지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지금 여기 살면서 살아야 할 ‘구원’이다. 이 구원을 통해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을 이루어 가는 것이다. 

“이 아이여,... 주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예비하여 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76-77절) 

선지자는 원래 하나님의 백성을 향해서 보냄을 받는 사람들이다. 결국은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다. 선지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결국에는 하나님의 백성들 밖에 없으니까 말이다. 누가 세례 요한의 말에 귀를 기울였을까?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이다. 세례 요한의 메시지로 하나님의 백성이 물 위로 떠오르기 시작한다. 하나님의 말씀이란 언제나 그런 것이다. 멸망받을 자들을 향해 전해지지만 결국에는 구원받을 자들만 듣게 되는 그런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듣는 우리에게 문제가 있어서이니 그것 가지고 왈가왈부할 일은 못되리라. 

세례 요한, 예수님 앞서 가는 세례 요한이 백성에게 알려주는 것은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이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듣는다고 하여도 꼭 들어야 하고 알아야 할 것은 바로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증거하고, 예수님을 증거하는 수많은 대리자들을 통해서 진실로 들어야 할 메시지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이다. 복음을 듣는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듣는다는 것이고,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믿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신앙의 중심이며 기반이다. 모든 것은 거기 덧붙여지고 거기 세워질 수 있을 뿐이다. 나머지 모든 것은 그것에서 ‘생겨나는 것들’일 뿐이다. 


하나님,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 속에서 평안히 쉬게 하시고, 든든하여 흔들리지 않게 하소서. 언제나 그 긍휼히 여기심 속에서 세상에 대하여 담대할 수 있게 해 주소서. 하나님께서 언약을 지키시고, 맹세를 지키신다는 사실을 신뢰하며 인내하며 기다리게 하소서.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 없이 하나님을 섬기게 하옵소서. 모든 해답이 복음에 있음을 잊지 않게 하시고, 그 위에 우리 삶을, 우리 믿음을 세워가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