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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성경 묵상

2012.01.26. 매일성경 묵상

     
     오늘 본문은 누가복음 3장 1-17절입니다. 

     본문은 세례 요한의 사역을 소개하고 있다. 그의 사역은 이사야를 통해 주신 예언을 성취하는 것이었다. 주의 길을 예배시키고, 그의 첩경을 평탄케하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디베료 가이사가 위에 있은 지 열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왕으로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 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1-2절) 

세상은 세상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세상은 제 나름대로의 권력구조와 질서 속에서 스스로를 이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여졌고, 그것이 전부인듯이 보여지는 그런 세상이었다. 그것이 세상이 주인이며 그래서 그것이 세상을 구원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언제나 그랬듯이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사람에게 임하였고, 이것이야 말로 이 세상의 주류(main stream)가 무엇인지를 드러내는 첫 징조였다. 왜냐하면 그 말씀이야 말로 태초에 이 세상을 존재하게 했던, 그리고 그 이후 그 세상을 움직이고 지탱해 왔던 그 말씀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무엇을 이 세상의 메인 스트림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그래서 무엇을 바라보며 살아가고 있는가? 정치? 경제? 교육? 사상? 이런 것들은 중요하기는 하지만 주류가 아니라 지류(sub stream)에 불과하다. 이러한 지류들은 언젠가는 모두 한 곳으로 모여, 자신들이 그렇게 열심히 흐르고 또 흐른 이유는 이렇게 메인 스트림에 복종하고 포함되기 위해서였음을 스스로 증명하게 될 것이다. 

요한에게 말씀이 임한 곳은 ‘빈 들’이었다. 모든 인간적인 것들, 인간이 의지하고 살아가는 모든 것들이 부재중 팻말을 내건 곳, 그 누구도 가치를 두지 않는 곳, 아무도 자신의 적(籍)을 두려고 하지 않는 그 곳에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다. 그리고 요한은 그 말씀에 순종하여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을 감당해 냈다. 누군가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자신을 던져 순종하기를 원한다면 그는 ‘빈 들’에 있어야 할지 모른다. 자신을 ‘빈 들’에 두어야 할지 모른다. 공백이 없는 사람에게는 하늘나라도, 하나님 말씀도 들어갈 자리가 없으니까.

“요한이 요단 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3절)

우리는 여기서 굉장히 인상적인 한 어구를 만나게 된다.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 이것이 요한이 전파한 것의 요점이다. 그가 전파한 것은 ‘세례’였다. 그런데, 그 세례는 회개의 세례였고 그 세례만이 죄 사함을 얻게하는 것이었다. 여기에서는 ‘죄사함’, ‘회개’, 그리고  ‘세례’가 연결되어 있다. 세례를 받아야 하지만 그것은 회개의 표시일 때만 죄사함이라는 선물을 가져다 줄 수 있다. 이것이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라는 말의 의미이다.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정한 세 외에는 늑징치 말라... 사람에게 강포하지 말며 무소하지 말고 받는 요를 족한 줄로 알라”(11,13,14절)

이것은 요한의 메세지를 듣고 세례를 받으러 나오는 사람들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라고 물었을 때 그 사람들에게 요구한 ‘회개’였다. 사람들도 ‘회개’라는 말의 의미를 잘 알 고 있었다. 그것은 마음의 회심의 문제일 뿐 아니라 ‘무엇을 해야하는-하던 것을 하지 말아야 하고 해야할 일을 해야하는- 것과 관련된 문제’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것에 대한 구체적인 답을 요구했던 것이다. 요한은 권력이 없는 자들(무리)에게는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기본적인 사랑의 실천을 이야기했다. ‘죄만 짓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하며 살았던 그들에게 ‘아니다, 적극적으로 선을 행해야 한다’고 일침을 놓은 것이다. 권력을 가진 자들에게는 비록 그것이 관례이고 심지어는 법으로 보장되어 있는 권리라고 할지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는 일을 해서는 안된다고 요구했다. 어찌보면 권력이란 그래서 가지려고 하는지도 모른다. 남들보다 많은 권리를 가지고 사람들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움직여 자신의 유익의 도구로 삼으려고 말이다. 요한은 이제 그 일을 그쳐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율법이 요구하는 삶으로 돌아오라는 메시지였다.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의 방식으로 돌이키라는 요구였다. 이것이 회개였다. 이것이 세례를 통해 죄사함을 가져다 주는 회개였다. 

죄사함은 우리의 회개가 선행되어야 한다. 우리가 악한 행위와 삶의 방식에서 돌이키지 않는다면, 죄사함은 주어지지 않는다. 이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죄를 버리고 싶어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죄사함을 받을 수 있겠는가? 죄를 버려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 사람이 어떻게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할 수 있겠는가? 죄를 버리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이 원하는 죄용서는 단지 죄책감의 해소이며 정신적인 위안일 뿐이다. 

성경은 요한의 사역을 이렇게 요약한다.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곱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 질 것이요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4-6절)

주의 길을 예비하고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해야 한다. 그것이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을  자신을 향한 마지막 징벌로 맞이하지 않게 되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런데, 그 방법은 구체적으로 ‘높아져 있는 것은 낮아지고, 움푹 패인 곳은 메꿔지고 굽은 것은 바로 펴지며 험한 것은 평탄케 되는 것’이다. 죄는 이 세상에 이런 ‘정상적이지 않은 흔적’을 남긴다. 평탄하고 곧바라야 할 길을 높은 산이 되게 하고, 깊은 골짜기가 되게 하며, 굽게 만들고 거칠게 만든다. 왕은 이런 길로는 올 수가 없다. 이렇게 내버려 둔 채로 왕을 맞이할 수 없다. 왕을 맞이하려면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해야 한다. 죄로 인한 흔적들을 없애려면 결국 죄를 해결해야 한다. 내가 지은 죄로 인해 생겨난 이런 저런 굴곡들을 평탄하고 곧게 만들려면 죄에서 돌이켜야 하며 선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회개’가 필요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이런 회개가 없다면 왕을 맞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무엇을 하리이까?”라고 묻는다면 세례 요한은 무엇이라고 대답해 줄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나의 왕으로 맞아들이기 위해서 내가 버려야 할 일은 무엇이고 또 향해야 할 방향은 어디라고 말해줄 것인가? 그 대답은 이제 나 스스로 찾아야 할지도 모른다. 나에게 맺혀져야 할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무엇인지 그 해답을 찾고 그리로 향해야 할 것이다.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손에 키를 들고 자기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8, 17절)

이것이 요한이 이해한 예수님의 사역이었다. 그의 설명 속에는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가 아니라 서슬퍼런 진노하심만 가득한 것 같다. 요한이 예수님의 사역을 잘못 이해했던 것일까?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보이기 이전에는 하나님의 구원은 진노일 수 밖에 없다. 구원이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그 구원을 방해했던 쪽, 그리고 구원이 행해질 때 아직도 그 쪽에 속해있는 사람들에게는 진노와 심판으로 경험되어질 수 밖에 없다. 구원에는 항상 그림자가 있다는 뜻이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없는 사람’ 그러니까 아직도 죄의 어둠 속에서 빠져나오지 않은 사람, 그리고 그럴 의지와 소원조차 없는 사람은 스스로 그 그림자에 자신을 거둬놓은 사람이며, 그래서 이 사람들은 구원이라는 ‘빛’에 노출되지 못한 사람이다. 그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어둠이 아닌 빛으로 경험하기를 원한다면 그는 분명 세례 요한의 요구에 귀를 기울일 것이며 어렵고 고통스럽더라도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려 결단을 내릴 것이다. 그에게 세례 요한이 전한 “저주의 메세지”는 결코 불쾌한 악담이 아니라 구원을 위한 참되고도 유일한 초청장으로 들려지게 될 것이다. 

복음은 복음 때문에 회개할 수 있는, 회개하려고 하는 자를 위한 것이다. 그 빛이 강한만큼 그림자도 짙을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주님도 하늘나라를 그 나라를 세상에서 가장 귀한 진주로 여기는 사람의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나는 하늘나라를 위해서 무엇을 투자할 수 있는가? 


하나님, 언제나 빈 들에 있기를 소원합니다. 도시의 유혹이 있고 화려함에 매력을 느끼지만 언제나 빈 들을 더 소중히 여기기를 소원합니다. 언제나 꺼진 곳을 메꾸고, 솟은 곳을 낮추며 굽은 곳을 바로 펴고 울퉁불퉁한 곳을 평탄케 하는 일에 힘쓰게 하소서. 그래서 주님 언제 내 삶의 왕으로 임하시든지 편안히 오실 수 있는 삶을 살게 해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