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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성경 묵상

2012.01.28. 매일성경 묵상

       오늘 본문은 누가복음 4장 1-13절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1-2절)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광야의 사십 일은 금식의 기간이었고 시험의 기간이었다. 금식은 목숨까지도 하나님께 의탁하는 행위이고 그래서 그만큼 자신이 아닌 하나님께만 의존하는 행위이다. 광야에는 사람이 없고 거칠음과 황량함만이 있을 뿐이다. 그렇게 해서 광야와 금식은 그야말로 하나님께 대한 절대의존과 절대신뢰의 환경이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시험은 더욱 더 강하게 느껴질 수 밖에 없다.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2절)

우리 상식과는 정반대인 것 같다. 성령의 인도를 받는 내내 마귀의 시험을 받으시다니! 그러나 이것이 40일 동안의 예수님의 광야생활의 요약이다. 성령충만하고 또 그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다고 해서 마귀의 시험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 어떤 순간에도 마귀는 쉬지 않는다. 오히려 성령이 충만할수록, 성령의 인도를 온전히 받고 있을수록 사탄의  시험은 더 집요하고 강렬하다. 성령충만함이 모든 시험과 고통으로부터의 진공상태를 의미하지 않는다. 시험의 무균지대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성령충만함은 그 반대상태로 들어가는 것이다. 시험은 더 거칠고 강해지며 더 집요해진다. 성령의 충만하심과 인도하심은 그러한 시험을 이겨내기 위해 필요한 것이지 그 시험을 면제받는 상태가 되는 것이 아니다. 

“날 수가 다하매 주리신지라”(2절)

40일이 다 지났다. 그 동안 예수님은 아무 것도 먹지 못해서 극도로 굶주리신 상태였다. “날 수가 다 하매 주리신지라” 본격적인 시험, 가장 강력하고도 집요한 시험이 주어질 것을 알리는 나팔소리이다. 영적으로는 가장 충만하신 상태인지 몰라도 육체적으로는 가장 약하고 부족한 상태였다. 음식에 대해서 가장 간절한 상태였다. 예수님도 ‘주리셨다’ 이 언급은 예수님께 첫번째 시험이 얼마나 쉽지 않은 것이었는지를 알려주고 있다. 40일동안 굶으셨다. 그래도 예수님이시니까 괜챦으신 것이 아니었다. 여느 사람들처럼 예수님은 음식을 가장 필요로 하시는 상태가 되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덩이가 되게 하라”(3절)

마귀의 제안은 예수님에게는 너무 당연한 선택을 하라는 충고였다. 진짜 그렇게 하면 된다. 무엇이 걱정인가? 이 세상을 지으신 분이신데 돌로 빵을 만드는 것쯤은 아무 것도 아니다. 사실 돌도 필요없다. 그냥  처음에 그러셨던 것처럼 “빵이 있어라”라고 하시면 그만이다. 그리고 그 빵으로 배를 채우시면 된다. 여기에는 그 어떤 이상한 점도 있을 수가 없다. 그러나, 마귀의 제안 속에는 은밀한 함정이 숨어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말 때문에 마귀의 첫번째 제안은 제안이 아니라 시험과 유혹이 된다. 마귀는 단순히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고 이야기한 것이 아니었다. 마귀는 그렇게 함으로써 네가 진짜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명해 보이라고 한 것이다. 이것은 자신의 필요를 자신이 채우라는, 그렇게 독립적인 존재가 되고,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 보이라는 시험이었는지도 모른다. “돌로 떡을 만드는 일”은 “에덴의 선악과를 따먹는 일”과 많이 닮아있다. 두 가지 모두 가장 은밀하고도 절실한 욕구를 통한 시험이었고 그만큼 이겨내기가 쉽지 않은 시험이었다. 둘 다 자신의 하나님이 되라는 시험이었다. 그러나 두 번째 아담은 첫번째 아담과는 달랐다. 첫번째 아담은 자기 속에 은밀한 욕구를 바라보았고 그것을 앞에 두었다. 그러나 두번째 아담은 그 절실한 필요 속에서도 자신의 욕구가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욕구보다는 하나님께 대해서 신실함을 지키셨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4절)

사람에게는 떡도 필요하다. 그러나 떡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며, 하나님의 뜻이다. 예수님께서는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양식이 있다”고 하셨고 “그 양식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진실로 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바로 하나님의 뜻이다. 그 뜻 안에 머물 때에만 우리는 비로소 ‘산다’고 할 수 있다. 

“순식간에 천하만국을 보이며 가로되 이 모든 권세와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5-6절)

이것이 마귀가 사람들을 유혹할 때 항상 사용하는 방법이다. 우선 사탄은 우리가 이 세상에 대해서 매력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그것을 소유하고 싶은 욕망을 자극한다. 그 후에 이렇게 말한다. ‘자 이것은 다 나의 것이다. 내가 주고 싶은 사람에게 줄 것이다. 네가 나를 섬긴다면 이 모든 것은 다 너의 것이 될 것이다.” 얼마나 그럴 듯한지 모른다. 정말 그렇다고 여겨진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다. 하나님의 뜻대로 흘러가는 것 같지가 않다. 사탄에게 절한 수많은 사람들이 온 세상을 자기 마음대로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나도 그들 중에 한 자리 차지하고 싶어진다. 사탄이 모든 것을 손에 쥐고 있고, 그래서 그에게 잘 보이고 싶어진다. 절만하면 된다. 

그러나, 이 말 속에는 거짓과 함정이 숨겨져 있다. 보이는 것과는 달리 이 세상의 권세와 영광은 사탄의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 모든 권세와 영광을 그에게 넘겨주신 적이 없다. 그리고 그는 그 권세와 영광을 자기 마음대로 누구에게 나눠줄 수 없다. 그 일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권한이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에게 나눠주실 것이다. 이 화려하고 달콤한 유혹 속에 숨겨져 있는 함정은 알아차리기가 힘든다. 사탄에게 절하고 권세와 영광을 받으면 세상이 다 내 것이 될 것 같다. 그러나, 섬기는 사람은 섬김을 받는 대상의 것이 된다. 절을 받는 사람이 절하는 사람의 위에 서게 된다. 세상을 모두 얻으면 무엇하겠는가? 그래봤자 그는 사탄, 그 파괴와 죽음의 영의 종이 될 뿐이다.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8절)

이 얼마나 적절한 대답인가! 사탄은 절을 받을 자격이 없다. 그는 결코 주인도 왕도 아니기 때문이다. 경배와 섬김을 받으실 분, 주인이시고 왕이신 분은 하나님 밖에 없다. 이 한 마디는 사탄을 향한 완벽한 카운터 펀치다. 사탄은 이 말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낼 수 밖에 없었고, 유혹의 모든 거짓된 근거, 모든 첫째 아담의 후손들을 농락했던 거짓을 드러낼 수 밖에 없었다. 우리는 항상 이 말을 기억해야 한다.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이것이 신앙의 가장 근본적인 기초이며, 그 신앙이 신앙으로 남아있기 위해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신앙의 철칙이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9절)

사탄은 또 첫번째 시험을 들고 나온다. 하나님의 아들됨을 증명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 시험은 조금 다르다. 첫번째 시험이 인간의 가장 기초적이고 절실한 욕구를 통한 시험이었다면 이것은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의 관계에 대한 시험이기 때문이다. 사탄은 말한다. 

“여기서 뛰어 내리라 기록하였으되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하였고 또한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네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시리라 하였느니라”(9-10절)

사탄은 아들에 대한 약속을 들먹이면서 그 약속이 참된 약속임을 증명해 보이라고 말한다. 그저 하나님의 말씀이 진실이라는 것을 확인해 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안될 일이었다. 확인하려는 시도는 의심에서 나온다. 확신이 부족하기 때문에 확인하려고 드는 것이다. 확실한 일, 정말 확신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는 확인할 필요가 없다. 더욱이 그 일이 관계에 대한 것이라면 확인하려고 들어서는 안된다. 확인하려는 행위가 곧 의심을 의미하며, 그래서 그 관계를 깨뜨리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보호가 필요한 상황으로 자신을 밀어넣으면서 그 보호하심을 경험하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시험’이다. 그 상황으로 하나님을 조작하려는 시도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말씀하시기를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12절)

예수님께서는 이것이 자신이 아닌 하나님을 향한 시험이라는 사실을 간파하셨다. 자신을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로 만드는 유혹임을 알아차리셨다. 하나님은 신뢰의 대상이지 시험과 확인의 대상이 아니다. 하나님을 그렇게 대하는 순간 이미 신앙은 신앙이 아니게 된다. 사람은 때로 관계를 더 돈독하게 하기 위해서 확인하려고 들지만 그렇게 확인하려고 드는 것 자체가 신앙을 불신앙으로 만들고 하나님과의 신실한 관계를 뒤흔드는 일이다. 우리는 신앙을 견고하게 한답시고, 더 확실하게 만든답시고 하나님을 시험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엄히 금하신 일이다.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나니라”(13절)

‘얼마 동안 떠나니라’ 마귀는 후퇴하기는 하지만 완전히 떠나지는 않는다. 또 다시 찾아와 더 강하고 집요한 시험을 퍼부을 것이다. 마귀의 이름이 ‘시험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성도의 삶에 대해서 ‘순진한’ 이해는 금물이다. 우리에게 죄의 무풍지대나 유혹의 무균지대는 없다. 잠시 그렇게 여겨지는 순간이 있을 뿐이다. 

하나님, 사탄의 시험을 분별해 내시고 이겨내신 예수님의 본을 따르게 하소서. 우리가 이미 그 분 안에서 저 모든 시험을 통과했으며 그래서 앞으로 다가오는 모든 시험들도 능히 이겨낼 수 있음을 믿게 하소서. 그러나 우리의 힘으로가 아니라 성령의 충만함과 인도하심 속에서만 그 일이 가능함을 잊지 말게 하시고, 항상 깨어 있어 성령충만과 인도하심을 위해서 기도하며 기꺼이 성령의 소욕에 순종할 수 있게 하소서. 누가 나의 주인인지, 누가 우리의 왕인지 잊지 말게 하시고, 모든 좋은 것과 선한 것은 사탄이 아닌 당신께로 부터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임을 잊지 말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