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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성경 묵상

2012.01.31. 매일성경 묵상

     오늘 본문은 누가복음 5장 1-11절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다. 우리는 본문에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예수님의 신중한 준비와 실행을 보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인간임을 잊지 않으신다. 예수님께서 얼마나 신중하고 확실하게 베드로에게로 다가가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자. 우리는 ‘믿음’이라는 미명 하에 ‘진리’라는 핑계로 너무 무례하고 무감각하게 사람들을 대하고 또 그들에게 다가가려고 하지 않는지 말이다. 단호함과 사려깊음은 반대말이 아니다. 충분히 함께 추구될 수 있으며 또 추구되야하는 가치들이다.
 

무리가 옹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새 예수는... 두 배가 있는 것을 보시니... 한 배... 시몬의 배라...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예수님께서는 원래 하셔야 할 일을 행하신다. 많은 무리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신다. 그런데, 그 눈길은 줄곳 한 곳을 향하고 있다. 무리들... 두 배... 한 배... 시몬... 화면은 점점 클로즈 업되고 예수님의 촛점은 그 베드로에게로 고정된다. 베드로는 배를 씻으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배를 빌리신다. 그리고는 베드로를 옆에 두고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신다. 말씀을 마치시고 예수님은 대뜸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베드로는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를 듣는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이야기 한다.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말씀...” 지금까지 그물을 씻으면서 또 배를 빌려주고 그 곁에서 들었던 예수님의 말씀은 평범한 말씀이 아니었다. 놀랍고 무언가 거부할 수 없는 권위가 있는 말씀이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의 말씀(이건 명령이었다)대로 따르기로 한다. 나사렛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놀라고 은혜로운 감정을 느꼈으면서도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던 것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그래서 그 결과도 대조적이다. 

“그리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찟어지는지라”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이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찟어지는지라”가 되었다. 동료들의 도움이 없이는 그 물고기들을 다 거둬올리지도 못할 정도였다. 무에서 차고 넘치는 풍성함이 되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하는 일이다. 그 분의 말씀은 창조주의 말씀이니 무에서 온 우주를 만들어 내신 절대능력의 말씀이시니 그 말씀이 실행되었을 때 이런 결과가 나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애초에 베드로에게 주어질 때는 현실적으로 볼 때는 상식과 어긋나고 불필요하며 또 굉장히 귀찮기도 한 그런 말씀이었다. (오해 마시길, 하나님의 말씀이 항상 이런 형태로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아주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말씀이다. 믿음은 비상식적이고 무논리적인 것이 아니다. 믿음은 결코 무식한 것이 아니다. 덮어놓고 믿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베드로도 배 위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계속 들었고 그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이해했기 때문에 그 논리 위에서 그 명령을 따른 것이지 그저 ‘무대뽀’로 따른 것이 아니었다. 믿음에 대한 이런 식의 오해는 사실 성도의 신앙을 망가뜨리고 교회를 망가뜨릴 뿐이다. 사실 지금 한국교회가 앓고 있는 질병의 대부분은 신앙을 이런 식으로 이해해 왔기 때문에 생겨날 수 밖에 없는 질병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수님께 설득된 베드로가 자신을 설득해서 그런 예수님의 말씀에 따랐을 때, 기대치 못한 엄청난 일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단순히 ‘기적적인 물고기 잡이’에 대한 기록일까? 그렇지 않다.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이는 ... 고기 잡힌 것을 인하여 놀라고... 놀랐음이라” 

베드로는 그런 고기잡이를 통해 엄청난 것을 얻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베드로가 표면적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100퍼센트 이해했다고 볼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는 이 경험을 통해서 정말 엄청난 ‘인식’을 얻게 된다. 칼뱅은 신앙이란 하나님을 알고 또 자신을 아는 것이라고 했는데 그런 점에서 베드로는 신앙의 중심에 도달했다. 그는 그 경험 속에서 자신은 지금 하나님 앞에 서 있으며 그렇지만 자신이 그 하나님 앞에 서 있을 수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인식’했다.(이 인식은 표면적이고 인식론인 인식이라기 보다는 본질적이고 존재론적인 인식이었다) 그래서 그는 두려워할 수 밖에 없었다.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예수님께서 지금까지 해 오신 모든 일들과 말씀들은 바로 이 말씀을 하시기 위한 것이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고기를 잡는 일과 관련된 이적을 행하신 것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창조주로서 베드로가 밤새도록 공치게 하셨다. 그물이 찟어질만큼 고기가 잡힌 것보다 밤 새 한 마리도 잡지 못한 것이 더 큰 기적이다. 간혹 기대치 못한 풍어는 있을 수 있지만 밤 새 한 마리도 잡지 못하는 일이 그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들에게 어찌 일어날 수 있는 일이겠는가? 예수님께서는 이미 베드로를 위해서 작업중이셨다. 갈릴리 호수의 상태, 기후, 물고기들... 이 모든 것을 다 움직이셔서 베드로의 그물에는 물고기가 단 한 마리도 걸리지 못하게 하셨다. 베드로가 ‘공친’ 일은 그 이례적인 풍어를 더욱 빛나게 하고 충격적이게 하는 배경의 역할을 했다. “밤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과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찟어지는 지라”의 대조를 묵상해 보라. 그러나, 이 이적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드러내는 사건인 동시에 앞으로 베드로와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물고기가 아닌 사람을 취하는 사람들이 되었을 때 그 일을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 지를 알려주는 시청각 교육이었다. 사람을 취하는 일이 때로는 생각처럼 되지 않을 때도 있을 것이다. 밤새도록 수고하여도 열매가 없을 때가 더 많을지도 모른다. 그 때 돌아가야 할 원칙이 있다. “말씀에 의지하여 깊은 데로 그물을 던져야 한다” 사람을 취하는 일은 하나님의 말씀이 요구하는 원리대로 해야하는데, 그 원리란 항상 깊은 데로 그물을 던지는 것이다. 

깊은 곳이 어디일까? 그것은 사람들이 다 아는 곳이 아니고, 사람들이 선호하는 것이 아니다. 경험적으로 효과가 입증된 방법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복음이라는, 십자가라는 어리석은 방법을 의미할 것이다. 그것이 상황 속에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그 때 그 때 하나님 앞에서 심사숙고하여 선택해야 할 일이지만 분명한 것은 얕은 곳이 아니라 깊은 곳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일하신다. 그물이 찟어지도록 사람을 얻게되는 일은 하나님의 말씀이 가리키는 깊은 곳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기적이다. 

 "저희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제자들은 그 모든 것을 지켜보고 경험한 후에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았다. 때로 제자도는 우리에게 이것을 요구한다. 모든 것을 버려두고 우선적으로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것을 요구한다. 그 부르심에 그런 방식으로 응답할 때 우리는 비로소 참된 제자로서의 첫걸음을 내딛을 수 있을 것이다. 


주님, 우리도 우리 삶의 모든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이 누구신지, 내가 누구인지, 그리고 무엇을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게 하시고, 그 부르심에 응답하게 해 주시옵소서. 참된 제자로서의 첫걸음을 내딛게 해 주시옵소서. 내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게 하시고, 항상 더 깊은 곳을 찾아 거기 그물을 던지는 삶을 살아서 나 자신이 아닌 하나님께서 내 그물을 채우시는 풍성하고 가치있는 삶을 살게 해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