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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성경 묵상

2012.02.02. 매일성경 묵상


        오늘 본문은 누가복음 5장 27-39절입니다.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나를 좇으라 하시니 저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좇으니라”

돈 때문에 동족으로부터 등을 돌렸고, 그래서 동족들도 그에서 등을 돌렸었다. 그런 그에게 세관의 자리는 ‘모든 것’을 의미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에게 ‘나를 좇으라’고 하셨고 그는 그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았다.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모든 것을 다 버렸지만 그는 기뻤다. 그 모든 것을 버리고도 잔치를 벌일 정도로 그의 기쁨은 말할 수 없이 컸다. 그 기쁨은 어디서 왔을까? 아마도 그는 ‘돈’에서 기쁨을 찾으려고 했던 것 같다. 그렇기에 돈 때문에 모든 것을 포기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르심 속에서 진짜를 발견했을 때, 그는 그 이전에 그에게 ‘모든 것’이었던 것을 던져 버리고도 기뻐서 잔치를 벌일 수 있을 정도로 기뻐할 수 있었다. 우리는 왜 예수님의 부르심을 부담스러워할까? 레위가 예수님의 부르심 속에서 보았던 것, 그러나 우리는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기에 레위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모든 것을 버리고도 기뻐했는데, 우리는 그런 부르심을 부담스러워하는 것일까? 우리는 우리 신앙의 기쁨을 회복해야 한다. 그러려면 그 분의 부르심 속에서 우리를 그토록 기쁘게 하는 무언가를 발견해야만 한다. 그래야 우리의 신앙은, 우리의 순종은 억지춘향이 아닌 ‘큰 잔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바리새인들과 저희 서기관들이... 너희가 어찌하여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나이다” 

‘큰 잔치’가 벌어졌다. 잔치에는 먹고 마시는 일이 가장 주된 일이며, 그것이 가장 큰 기쁨이다. 그런데, 이 당연한 것을 문제삼는 사람들이 있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었다. 그러느라고 그 기쁨을 누리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우리는 그 대답을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얻을 수 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너희가 그 손님으로 금식하게 할 수 있느뇨?”

레위의 기쁨은 병자가 고침을 받은 기쁨이고, 죄인이 회개했기 때문에 생겨난 기쁨이었다. 그 기쁨이 워낙 컸기에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도 기뻐할 수 있었다. 병자가 의사를 찾는 법이고, 자신이 죄인인 줄 아는 사람만이 자신의 죄인됨을 회개하는 법이다. 그러니 회복과 회개의 기쁨은 죄인들의 몫이다. 건강한 사람이나 의인에게는 이런 기쁨이 없다. 자기 의가 주는 뿌듯함과 자기만족이 가져다 주는 교만한 기쁨은 있을지언정 모든 것을 버리고도 기뻐할 수 있을만큼의 큰 기쁨은 있을 수가 없다. 그런데, 이 세상이 병자 아닌 사람이 없고 죄인 아닌 사람이 없다. 그렇다면 회복과 회개의 기쁨은 모든 사람이 누릴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외 그런 기쁨을 누리지 못했을까? 그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는 자기 자신을 몰랐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은 건강한 사람이고 또 의로운 사람이라고 자신만만했다. 그러니 이들이 고침을 받으려고 의원을 찾을리 없고, 죄용서를 받으려고 예수님을 찾을 리가 없다. 그러니 이들에게 회복과 회개의 기쁨이 있을리가 만무하다. 둘째는 이들이 자신들이 살아가는 ‘때’가 어떤 때인지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시간이 금식해야만 하는 때라고 생각했다. 이들이 자신들의 시대를 그렇게 우중충한 시대로 이해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금식으로 경건을 쌓으며, 의로움을 만들어야만 하나님이 베풀어 주시는 은혜의 대상이 되는 그런 때로 이해했다는 뜻이다(실제로 역사상 그래야 할 때는 단 한 순간도 없었다) 그러니 그런 경건도, 그런 의로움도 보이지 않는 예수님의 제자들에 대해서, 그리고 예수님에 대해서 날카로운 비난의 눈길을 보낼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혼인잔치에 초대된 손님들이었으면서도 그 잔치의 풍성함과 기쁨을 누리지 못했던 것이다. 

자신이 하나님의 고치심과 용서해 주시는 은총이 필요한 죄인이라는 사실과 자신이 그런 은총이 가장 충만한 시대에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참된 기쁨, 꽉 찬 기쁨을 알지 못한다. 잔치에 초대되었으면서도 그 진수성찬을 누리지 못하고, 그 기쁨에 참여하지 못한다. 그 대신 여전히 자신의 힘으로 의로워지려는 불가능하고도 불필요한 시도를 하면서 그런 노력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을 향해서 비뚤어진 눈길을 보내느라고 아까운 기쁨의 시간들을 흘려보내고 만다. 때로 금식해야 할 때도 있다. 그러나 금식이 상시적으로 해야만 하는 어떤 것으로 전락해 버리면 그 때부터 금식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고 만다. 

“새 옷에서 조각을 찟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찟을 뿐이요 ......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되리라 ......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

스스로 ‘새 것’이 되지 않으면 ‘새 것’과는 어울릴 수가 없다. 자신이 새 것이 되지 않은 채로 새 것을 취하려하면 새 것은 새 것대로, 자신은 자신대로 망가질 뿐이다. 낡은 옷은 버리거나 낡은 천으로 기워야 하며, 낡은 가죽부대 또한 버리거나 발효가 끝난 묵은 포도주를 넣어야 하며, 묵은 포도주에 입맛이 익숙해져 있다면 그는 묵은 포도주만을 먹어야 한다. 그렇게 스스로를 낡은 채로, 묵은 채로, 익숙한 채로 놓아두었다가 그 묵고 낡은 것들이 사라져 갈 때 함께 그 길을 갈 수 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려면 자신을 바꾸는 ‘환골탈퇴’가 필요하다. 낡은 옷과 낡은 부대는 버려야 하며, 옛 것에 익숙해져 있는 입맛 또한 바꾸어야 한다. 

건강한 사람은 자신이 병자임을 받아들여야 하며, 의인은 자신이 죄인임을 진실로 인정해야 한다. 또한 지금 이 순간이 ‘자기 의’가 가져다 주는 모조 기쁨을 즐거워하는 “옛 입맛”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의’가 가져다 주는 풍성하고 참된 기쁨을 만끽할 수 있는 새로운 입맛을 취해야 하는 때임을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회복의 기쁨도, 죄 용서의 기쁨도, 그리고 그리스도의 의가 가져다 주는 참된 만족의 기쁨도 알지 못한다. 오히려 그런 기쁨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비뚤어진 눈으로 바라보는 일에 시간을 허비할 수 밖에 없다. 

지금은 죄인과 병자의 시대이며, 그들만이 혼인잔치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은혜의 시대이다. 


하나님, 언제나 자신을 알고 자신이 사는 시대를 알게 하소서. 내가 죄인이며, 병자라는 사실을, 그리고 지금은 그들을 위한 혼인잔치의 때임을 알게 하소서. 그래서, 언제나 사죄의 은총을 누리며, 회복의 은혜를 누리고, 신랑을 보는 들러리들의 기쁨이 넘치게 하소서. 모든 것을 다 버리고도 기쁨의 잔치를 벌일 수 있는 그런 기쁨 가운데 살아가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