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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성경 묵상

2012.02.03. 매일성경 묵상

    오늘 본문은 누가복음 6장 1-11절입니다. 

     본문은 안식일에 일어났던 두 가지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첫번째 것은 우발적이라면 두번째 것은 의도적이고 계획적으로 일어난 일이었다. 바리새인들이 놓아둔 덫에 예수님께서 스스로 걸어들어가심으로써 오히려 바리새인들은 자신이 놓은 덫에 자신이 걸리고 만다. 이 사건의 중심에는 두 가지가 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의 주인이시라는 것과 과연 안식일이란 어떤 날인가하는 것이다. 

“안식일에...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으니...”

제자들은 너무 배가 고팠다. 그래서 길을 지나다가 나그네와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남겨놓은 밀이삭을 손으로 비벼 먹었다. 공교롭게도 그 날은 안식일이었다. 물론 안식일이라고 해서 제자들이 율법을 어긴 것은 아니었다. 단지 그 율법을 더 잘 지키기 위해서 정해놓은 규칙을 어겼을 뿐이다. 바리새인들의 눈에는 이 행동은 안식일을 어긴 행동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즉각적으로 반응한다.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느뇨?”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 물론 율법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했고,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을 규정해 놓기도 했다. 그러나 여기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은 그런 것들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 일들은 누가 정한 것인가? 그것은 사람들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만들어낸 것이다. 그래서 본질적으로 이것이 율법은 아니다. 그럼에도 시간 때문에, 그리고 그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영향력 때문에 이미 율법이나 마찬가지로 여겨지는 것이었다. 물론 그것이 안식일에 관한 율법의 참된 정신과 의미를 살리는 규정들이라면 그런 규정들은 절대로 무시될 수 없다. 그러나, 그 규정이 정반대라면 안식일을 형식적으로 준수하기 위해서 그 정신과 의미를 훼손하는 것이라면 그 규정은 준수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실은 파기되어야 할 것이며, 적어도 심사숙고 되어야 할 것이다. 주님의 말씀대로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우리의 신앙도, 신앙을 채우고 있는 내용물들도 단지 묵은 것이 좋기 때문에 고집될 수 있을까? 

“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사... 오른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송사할 빙거를 찾으려 하여 안식일에 병 고치는가 엿보니”

안식일이다.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만드시고 그 피조된 것들을 만끽하셨던, 그리고 결국 우리가 누리게될 온전한 안식의 모형인 안식일이다. 이 날은 어떤 날이어야 할까? 무엇을 해야하는 날일까? 그리고 적어도 무엇을 해서는 안되는 날일까? 안식일인데 그 안식일을 목숨처럼 여긴다는 사람들이 ‘음모’를 꾸민다. 그것도 몸에 있는 온전치 못함 때문에 안식다운 안식을 누려보지 못한 사람들을 도구로 사용해서 말이다. 

“예수를 송사할 빙거를 찾으려 하여...” 

이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밭에서 밀 좀 비벼먹었다고 비난하던 자들이다. 그런데, 이들은 안식일에 예수님을 잡으려고 ‘덫’을 놓는다. 그것도 결코 ‘덫’으로 사용될 수 없는 사람을 이용해서 말이다. 안식일에 가장 안식이 필요한 사람을 사용해서 사람을 ‘죽이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과연 이런 일이 안식일에 행해져도 되는 것인가? 소위 ‘거룩한 목적’을 위해서라면 이런 일도 불사할 수 있는가?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생명을 멸하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이 안식일 되게 하는 것이 “무엇을 하지 않는 일”을 통해서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안식일은 그런 날이 아니다.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쉬게 하셔서 쉬는 날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 또한 다른 이들을 쉬게 하는 날이 되어야 한다. 그러니까 안식일은 소극적인 날이 아니라 적극적인 날이며, 무엇을 ‘하지 않음으로써’가 아니라 ‘무엇을 행함으로써’ 안식일다워지는 그런 날이다. 예수님의 질문은 어떻게 하면 안식일을 안식일 답게 지킬 것인지를 알아내기 위해 수없이 고민하고 또 고민하며 그렇게 해서 만들어낸 이런 저런 조항을 지키기 위해서 신경을 곤두세웠던 그들은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것이었다. 그러니 그들은 그 ‘해서는 안되는 일’이라고 정해진 것을 ‘하는’ 사람들을 정죄하고, 그들을 정죄하기 위해서 안식일에 해서는 절대로 안되는 일을 했던 것이다. 악을 행했으며, 생명을 멸하려 하였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안식일을 안식일 답게 만드는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아, 슬픈 오해와 착각이여!

“저희는 분기가 가득하여 예수를 어떻게 처치할 것을 서로 의논하니라”

이것이 참된 안식일을 알게된 안식일을 가장 귀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도달한 목적지였다. 그들은 분기가 가득해 졌고 예수를 어떻게 죽일지를 의논했다. 안식일에, 그들은 안식을 빼앗겼을 뿐 아니라 목숨을 살리기 위해서 의논한 것이 아니라 목숨을 죽이기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이 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그들은 안식일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런 저런 규정을 통해 안식일을 안식일 답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 기준을 가지고 안식일을 수호하는 사람을 자처하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안식일에 덫을 놓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정작 그들은 안식일을 장악한 것도, 수호한 것도 아니었고 심지어는 안식일에 안식을 누리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되어 있었다. 오히려 안식일을 악을 행하고 사람을 죽이는 날로 만들어 버리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분의 말씀대로 이 두 가지 사건을 통해서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 그러니가 ‘하나님’이심을 증명해 보이셨다. 그 분은 제자들을 풀어 주셔서 고픈 배를 채울 수 있게 해 주셨다. 그렇게 안식일에 그들의 생명이 더 풍성해 지도록 해 주셨다. 그리고 안식일에 가장 안식이 필요한 사람, 오른 손 마른 사람을 고쳐 주셨다. 그에게 난생 처음으로 참된 안식을 선물하신 것이다. 그 분은 선을 행하셨고 또 사람을 살리셨다. 그럼으로써 안식일의 참된 주인이심을 선포하고 증명하신 것이다. 

우리의 안식일은, 그리고 영원하고 완전한 안식을 소망하는 우리의 신앙은 어떤 모양인가? 우리는 우리 주님이 진정 안식일의 주인이시며 안식을 주시는 분이심을 믿고 그 분의 뒤를 따르는 방식으로 나아가고 있는가? 깊이 생각해 볼 일이다. 


하나님, 안식일의 주인이시고 참 안식을 주시는 주님을 모시고 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의 안식일이, 그리고 우리의 삶이 그러한 주님으로 인해 안식을 얻게 하시고, 그 안식을 나눠주는 날들이 되게 하소서. 우리가 만들어낸 규칙이 본질을 가로막지 않게 하시고, 우리의 삶에서 규칙이 본질을 앞서는 일이 생겨나지 않도록 우리를 언제나 자유케 해 주소서. 그러나 본질 때문에 겸손함을 잊지 말게 하시고, 바리새인들처럼 스스로를 본질의 수호자로 자처하지 않게 하소서. 그저 주신 안식 누리게 하시고, 그 안식을 나눠주는 자들로만 살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