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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성경 묵상

2012.02.04. 매일성경 묵상

    오늘 본문은 누가복음 6장 12-26절입니다. 

    수많은 제자들 가운데서 사도들을 선택하시고, 제자들에게 제자의 복과 제자의 길을 가르치시는 내용 중 서론이다.
 

“이 때에 예수께서 산으로 가사 밤이 맞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이 때에...’ 언제인가?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안식일 답게 회복하시고 안식일의 주인됨을 증명하신 후에, 그것 때문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공모하기 시작한 후에다. 이제 예수님과 종교지도자들 사이의 갈등과 긴장은 한계를 넘어서고 있다. ‘이 때’ 주님은 산으로 가셨고 거기서 밤이 새도록 기도하셨다. 이 위협과 압박을 넘어설 수 있는 힘과 담대함이 필요했던 것이 분명하다. 그 저항을 뚫고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을 행하기 위해서는 다시 한 번 하나님을 대면하고 그 분의 위로와 공급을 받으셔야만 했다.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예수를 파는 자 될 가룟 유다라”

기도를 마치신 후 가장 먼저 하신 일이 불특정 다수의 제자들 중에서 열 두 명의 사도를, 수제자를 뽑는 일이었다. 이 일이 그만큼 중요했던 것이다. 이제 시시각각 예수님을 향한 위협은 구체적이고 노골적이 되어져 갈 것이다. 그만큼 예수님께 남은 시간도 없다. 이제 예수님은 본격적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처럼 믿고, 예수님처럼 사는 것”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가르쳐 주실 필요가 있으셨다. 그런데, 제한된 시간에 모두에게 그것을 가르치실 수는 없으셨다. 아뭏든 제자들도 예수님도 ‘인간’이었으니까 말이다. 열 두 명의 사도, 그들은 새로운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의 시작이었다. 이제 드디어 그 분이 그 분의 친 백성들을 만드시기 시작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열 두 명을 선택하신 것은 그 ‘시작’을 견고하고 분명하게 하시고자 함이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열 두 명의 사도들을 ‘택하셨다.’ 직접 그들을 뽑으셨다. 우리가 기준을 알 수는 없다. 가룟 유다가 속해 있는 것을 보면 그 기준은 우리가 섣불리 추측할 수 없는 것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것이 이제 땅 위에 다시 세워지는 하나님 나라의 시작이었다는 것이다. 만약 이것이 이 땅 위의 하늘나라의 시작이었다면, 이것은 아직 불완전한 상태의 땅위의 하늘나라가 어떠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청사진이 아니었을까? 가룟 유다를 선택하신 이유는 이 땅의 교회가 때로는 가룟 유다까지도 그 안에 두어야 하는 그런 불완전함을 감수해야 하며, 함부로 가룟 유다를 골라내려는 시도를 해서는 안된다고 말씀해 주시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교회로 하여금 때로는 불완전하고 때로는 부족한 것을 스스로의 힘으로 완전하게 하려는 ‘교만함’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말이다. 

또 한 가지 이것은 예수님의 선택이 선택받은 자의 영적인 마지막 운명까지를 결정해 주는 것은 아님을 보여주는 것 같다. 우리는 누구나 의인의 자리가 아니라 죄인의 자리에서 부름을 받는다. 예수님의 원수요, 배반자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백성의 자리, 믿음의 자리로 부름을 받는다. 그러면 끝일까? 아니다. 그 다음에는 그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물론 그 또한 은혜지만 그것은 수동적으로 기다려야할 은혜가 아니라 능동적으로 추구하고 따라가야 할 은혜다. 모두 동시에 부름을 받았지만 다른 제자들이 조금씩이라도 제자의 모습을 갖추어 가고 있을 때, 가룟 유다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정반대의 방향으로 갔던 것 같다. 그러다라 결국에는 예수님을 파는 자리에 까지 갔던 것이다. 

“예수께서 저희와 함께 내려오사 평지에 서시니... 예수의 말씀도 듣고 병고침을 얻으려고 ... 온 많은 백성도 있더라” 

예수님께서는 “산 위”에서 밤새도록 기도하셨다. 그렇지만 기도를 마치고는 “산 아래(평지)”로 내려오셨다. 그리고는 이런 저런 이유로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시며 그들 속에 계셨다. 그리고 나서 제자들(사도들이 아니다)에게 굉장히 긴 말씀을 전하신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부분은 그 서론이며 또 가장 중요한 부분인 4복과 4저주이다. 이 모든 것이 다 제자들을 부르시는 일과 연관되어 있다면, 우리는 이 모든 것이 전부 다 단순히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일들의 나열이 아니라 일련의 가르침이라고 볼 수 있다. 적어도 누가가 깨달은 바에 의하면 그렇다고 볼 수 있다. 

제자도는 하나님을 대면하여 얻은 능력과 위로를 가지고 땅 위에서 행해지는 것이다. 사람들 틈에서 그들이 필요로 하는 가르침과 회복을 제공하는 것이다. 이것이 산 위에서 열 두 사도를 선택하시고 그들을 데리고 평지로 내려와서 그들 앞에서 행하신 첫번째 일이 가지는 의미이다. 목회도 일종의 제자도에 대한 실천이요, 순종이라고 한다면 목회에 대한 생각도 이와 같아야 할 것이다. 산 위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 대면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얻은 힘과 위로, 능력을 평지의 사람들을 가르치고 회복시키는 일에 사용해야 할 것이다. 

4복과 4저주는 자세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저 오늘은 큰 틀에서 생각해 보고 싶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해서 왜 이 이야기로 말문을 여셨을까? 이들이 새 이스라엘이라면 예수님의 복과 저주의 선언은 새로운 언약이다. 실제로 이 복과 저주의 선언은 약속의 형태로 되어 있다. 그런 복과 그런 저주가 어떤 대상에게 주어질 것이라는 언급이기 때문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4가지 복을 받는 사람은 이 땅 위에서는 아직 복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전혀 복된 사람들이라고 여겨지지 않는 그런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결국에는 복을 받을 사람들, 하늘에서는 크나큰 복을 받을 사람들이다. 이 복의 처음과 마지막에 ‘하늘나라’가 포진하고 있는 것을 볼 때, 복의 대상이 되는 모든 상태는 분명히 수동적이고 일반적인 가난과 고난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하늘나라와 관계된 것이며 나아가서 적극적인 것임에 분명하다. 그러니까 그냥 가난하고 그냥 배고프고 그냥 우는 사람들이 무조건 복을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는 하늘나라 때문에 그런 상태가 되는 사람들이 복을 얻게 될 것이고, 적어도 그런 상태에서 하늘나라를 소망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의미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배고픈 사람이 얻게 될 것은 빵이지 하늘나라가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복의 선언은 이런 이야기가 될 것이다. 그 때의 만족, 그 때의 기쁨, 그 때의 웃음을 위해서 지금 여기서의 배고픔, 지금 여기서의 슬픔, 지금 여기서의 울음을 감내할 수 있는 사람들이 “그 때 거기서” 그 나라를 가질 것이고, 그래서 만족할 것이고, 웃을 것이다. ‘그 날 거기서’ 거두기 위해서 ‘지금 여기서’ 뿌리는 사람들이 영원한 추수의 즐거움을 누리게 될 것이다.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가 기쁨으로 단을 거둔다고 하시지 않으셨던가!

네 가지 저주는 저주가 아니라 경고일 것이다. 이 말씀이 제자들을 향해서 주어진 것이라면 그것은 영원한 기쁨과 만족, 즐거움, 그리고 나아가서 영원한 나라를 소유하기 위해서 피해야만 하는 삶의 유형을 말해 준 것일 것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만약 제자들이 아닌 실제로 현재 그런 상태를 추구하며 그런 상태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향해서 주신 말씀이라면 이는 그 저주로 그들의 저주받은 상태를 고착시키기 위해서 하신 말씀이 아니라, 그 ‘외인’들을 ‘내부인’들이 되게 하시기 위해서 내민 강력한 초청장이었을 것이다. 물론 그 초청을 받아들여야만 앞의 복을 얻을 수 있게 되겠지만 말이다. 

제자도, 제자훈련.... 많은 이야기를 하지만 실제로 이 땅 위에서 예수님을 흉내내는 제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굉장히 쉽지 않은 일이다. 아뭏든 여기서 가난해야 하며 여기서 배고 고파야 하며 여기서 기꺼이 울어야 하고 때로는 예수님 때문에 미움과 핍박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은 희생이 아니다. 투자다. 이것을 이 악물고 치러야 할 희생이 아니라 영원하고 무한한 하늘의 만족과 기쁨을 거두어 들이기 위한 가장 확실한 투자로 여긴다면, 그럴 수 있을 만큼 그 나라와 그 나라의 영광의 가치를 아는 참된 지식만 있다면 피하려 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렇게 하고 싶어서 안달을 낼 그런 종류의 투자이다. 

제자도는 투자다. 그런 고상한 희생이나 거룩한 손해이기도 하지만, 실은 그것 자체로 가치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얻게 될 것을 위해서 뿌려져야 할 씨앗이며 투자이다. 하늘나라를 이해하고, 하늘나라를 위해 투자하는 자들, 그들이 제자이고 사도들이다. 제자와 사도들은 바로 그러한 삶에 초대받은 것이다. 그러니 ‘닥치고’ 기뻐 뛰놀 수 있다. 


하나님, 제자가 되어 제자로 사는 일의 영광됨을 알게 하소서. 그 일 자체가 가치있어서가 아니라 그 일이 우리에게 가져다 줄 영원한 나라와 그 나라의 영광 때문에 그 일이 영광됨을 확실히 알게 하소서. 그래서 이 땅에서 제자로 살아가는 것이 고통과 손해를 가져올 지라도 기뻐하며 뛰놀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그렇게 주님께서 주신 가벼운 명예를 질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