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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성경 묵상

2012.02.07. 매일성경 묵상


오늘 본문은 누가복음 7장 1-17절입니다.

“어떤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변들어 죽게 되었더니...”(2절) ......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그 어미의 독자요 어미는 과부라”(12절)

이것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두 사건의 상황이다. 한 명은 죽을 수 밖에 없는 상태의 중병을 앓고 있었고 한 명은 이미 죽어서 장사지내러 가는 중이었다. 임박해 있는 죽음, 그리고 이미 닥쳐버린 죽음... 예수님께서는 이 두 사람을 살려주신다. 죽음... 그것도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은 그 어떤 일보다도 충격적이고 슬픈 일일 것이다. 그러면서도 정말 어쩔 수 없는, 그리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는 그런 일일 것이다. 그것은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에게뿐 아니라 그 죽음을 바라보는 사람에게도 가장 큰 한계가 되는 상황일 것이다. 그런데, 주님은 이 한계를 해결하셨다. 그 분이 생명의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부활의 주님이라는 사실을 증명해 내신 것이다. 그 분은 자신이 다시 사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다시 살게 하시는 분이시다. 

“유대인의 장로 몇을 보내어 ... 이에 저희가... 간절히 구하여 가로되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 저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3,4,5절)

백부장은 자기 종을 살리기 위해서 유대인의 장로 몇 명을 예수님에게로 보냈다. 그러나 이것은 억지가 아니었다. 유대인의 장로들이 이방인을 위해서 그것도 흔쾌히 나서고 또 그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것을 마땅한 일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장로들은 이렇게 말한다. “저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 단순히 정치적인 시혜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분명히 “경건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이방인으로서 유대교를 믿는 사람 말이다. 그가 얼마나 온전한 성품을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것은 “사랑하는 종”이라는 말 속에서 드러난다. 종은 사랑의 대상이 아니다. 당시 종은 물건이었고 노동력에 불과했다. 그런데, 그 백부장은 그런 종을 사랑했고, 그 사랑 때문에 장로들에게 예수님에게로 가 달라고 부탁할 정도였다. 또 그는 유대인들도 ‘사랑’했다. 주둔군의 장교로서 식민지의 백성들을 사랑했다는 것이다. 어쩌면 그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극단적으로 그것도 가장 깊은 진심에서 행했던 사람이었다. 종을 사랑하고, 식민지의 백성들도 사랑했다. 이 사랑의 진정성을 증명하는 증거는 그가 종을 위해서 장로들을 보냈고 그 장로들은 흔쾌히 그 부탁을 들어주었으며, 그 결과 예수님께 간절히 구했다는 사실이다. 

“백부장이 벗들을 보내어 가로되”(6절)

백부장이 급한 마음에 잊은 것이 있었다. 백부장은 장로들에게 예수님께서 직접 오실 필요는 없다는 말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자기 친구들을 보냈다. 직접 오실 필요가 없다는 말을 전하기 위해서 였다. 그런데 이 마음(정확하게는 믿음)을 표현하기 위해서 그가 한 말 속에는 정말 놀라운 이야기들이 들어 있었다.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 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치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6-7절)

여기서 그가 왜 장로들을 동원하고, 친구들을 동원하였는지가 드러난다. 그것은 자기 체면이나 혹은 귀챦아서가 아니었다. 백부장은 자신이 도저히 어떤 모양으로든 예수님 앞에 서지 못할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그의 ‘자의식’이었다. 그래서 두 번이나 다른 사람을 예수님께 보냈던 것이다. 이 자의식은 8절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거기서 그는 자신이 예수님 아래에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오라 가라할 자격이 없다고 이야기한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7절)

전반부가 백부장의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이었다면 후반부는 예수님에 대한 인식이었다.   그는 자기 자신은 도저히 하나님 앞에 설만한 사람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했던 반면에, 예수님은 말 한마디로 죽을 사람도  살리시는 분이심을 확신했던 것이다. 

신앙 속에는 이 두 가지가 다 존재한다. 자신에 대한 어쩌면 가장 극단적인 겸손함과 하나님에 대한 가장 극단적인 존중. 이 두 가지가 신앙의 핵심이다. 그런데, 이 두 가지는 자신과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에서 나온다. 하나님을 알고 그 하나님 앞의 자기 자신을 알 때, 사람은 그 두 가지의 태도를 모두 가질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가장 온전한 신앙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하시더라”(9절)

예수님께서는 백부장의 믿음을 극찬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우선적으로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영혼들에게로 보냄을 받으셨다. 그러나, 그 어디서도 어떤 의미에서 예수님을 만족시킬만한 믿음을 발견하지 못하셨다. 그러나, 그 분은 뜻 밖의 장소에서 뜻 밖의 사람 속에서 그 믿음을 보신다. 예수님도 놀랄만한 믿음을 발견하신다. 이방인, 그것도 백부장에게서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이스라엘 속에서 믿음을 보시기를 원하신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교회 안에서, 성도들 속에서 참된 믿음을 찾으신다. 오늘날 하나님은 오늘의 이스라엘 속에서 찾으시는 믿음을 보실까? 우리는 우리가 이스라엘에 속해 있다고 해서 우리 자신의 믿음에 대해서 너무 넋놓고 있는 것은 아닐까? 

“보내었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 보매 종이 이미 강건하여졌더라”(10절)

본문 속에는 예수님께서 그 종을 고치기 위해서 어떤 말씀을 하셨다는 이야기가 없다. 물론 말씀하시지 않으셨다고 해서 반드시 아무런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우리가 본문의 증언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그 종의 병은 그 병에 대한 예수님의 단 한 마디의 언급도 없이 고쳐진 것이 된다. 그는 예수님께서 백부장의 믿음을 인정하셨을 때, 그 인정받음으로 고침을 얻었던 것이다. 이것은 백부장의 믿음이 이례적인만큼 이례적인 일이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믿음에 대해서, 그 믿음과 예수님의 구원에 대해서 우리에게 이야기 해주는 것이 있다. 하나님께서 믿음을 인정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그 분의 구원을 이루신다는 것이다.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하시고”(13절)

이것이 나인성으로 가실 때, 도중에 그 성에서 나오는 과부의 아들의 장례행렬에서 과부를 보시고 하신 말씀이다. 이 구절 속에는 과부를 향한 예수님의 마음이 고스란히 들어있다. 예수님은 과부를 불쌍히 여기셨다. 지금부터 일어나는 일은 모두 그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 때문에 생겨날 사건이다. 

“가까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대시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죽었던 자가 일어 앉고 말도 하거늘...”(14-15절)

이미 죽었다. 이 경우는 백부장의 종의 경우보다 더 심각하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청년아!” 죽은 자는 나이를 막론하고 “고인”이라고 불릴 뿐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를 청년이라고 부르신다. 그렇다면 예수님께 청년은 죽은 사람이 아니다. 그저 다시 부르고 또 일으킬 수 있는 사람이다. 마치 누워있거나 잠들었거나 다른 방안에 있는 사람처럼 말이다. 예수님의 부르심으로 ‘죽은 자’는 ‘청년’으로 돌아왔다. 이것은 청년에게 뿐만 아니라 그의 어머니에게도 구원이었다. 그 부활은 어머니의 부활이기도 했다. 가장 깊은 절망 가운데서, 가장 짙은 슬픔 가운데서 그 어머니를 다시 ‘살게’한 사건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것은 적어도 그 장례행렬에 속한 사람들에게는 구원의 실마리가 될 수 있는 사건이기도 했다. 

“큰 선지가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보셨다 하더라”(16절)

이들의 고백은 아직 부족하다. 예수님을 그저 엘리야나 엘리사와 같은 큰 선지자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 사건만큼은 잘 이해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보셨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여전히 그 분의 백성을 긍휼히 여기고 계시며 그래서 구원을 베푸셨다고 고백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참된 믿음은 구원(영혼의 구원에 국한지을 필요가 없다. 질병의 고쳐짐도 구원이다. 구원의 한 국면이다)으로 이어진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거기서 죽은 자를 살리시는 구원을 베푸신다. 하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분이심을 믿을 때, 그 분은 죽은 자를 살리신다. 그러나, 구원은 무엇보다도 그 분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기 때문에 베푸시는 은혜다. 그저 일방적으로 불쌍히 여기시기 때문에 주시는 선물이다. 믿음 이전에 긍휼히 여기심이 먼저고 그것이 은혜를 주시는 가장 주된 이유이다.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사건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은혜를 주시는 일에 있어서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심의 우선성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주님이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 자를 있는 자로 부르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한다. 그 엄청난 믿음을 가져야 한다. 그 믿음이 우리를 구원하는 믿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믿음 속에는 주님의 긍휼히 여기심에 대한 겸손한 의존이 필수적이다. 백부장의 종의 사건 뒤에 이어진 나인성 과부의 아들 사건은 우리에게 그 균형을 잃지 말라고, 굳건하고 절대적인 믿음 과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에 대한 겸손한 신뢰의 균형을 유지하라고 말한다. 


하나님, 믿음이 있어도 겸손하게 하소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하나님 앞의 나는 어떤 존재인지 온전히 깨닫게 하셔서 겸손함을 잃어버리지 않게 하시고, 나를 구원하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것은 무엇보다도 나는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시는 선하심에 놓여있음을 잊지 않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