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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성경 묵상

2012.02.08. 매일성경 묵상



오늘 본문은 누가복음 7장 18-28절까지입니다. 

   “오실 그 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19절)

세례 요한은 메시야의 길을 준비하러 왔던 사람이다. 그는 그 분의 길을 충실히 준비했고, 이제 그 소임을 다 마치고 역사의 뒷편으로 사라져 가야 한다. 요한은 자신의 짧은 일평생을 메시야의 길을 준비하기 위해 쏟아부었다. 그러니, 지금 그의 앞에 놓인 마지막 시간들은 얼마나 결정적인 시간이었겠는가? 이 때 요한의 마음을 흔드는 질문 하나가 떠올랐다. 그 동안은 의심치 않았던 내용에 대한 질문이었다. “혹시 예수가 메시야가 아니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제자들을 보내 그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한다. 예수님께서는 “그렇다, 아니다”라는 대답 대신에 이사야의 메시야 예언을 인용하시면서 자신의 사역 속에서 그 예언이 그대로 성취되고 있다고, 그런 일들을 목격한 요한의 제자들에게 그것을 요한에게 전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면서, “나로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덧붙이셨다. 요한에게는 그 질문이 떠오른 순간이 실족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정말 그 동안의 전체 삶이 허무해지고 무의미해지며 심지어는 믿음에 있어서 파산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가장 결정적인 시험은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찾아오게 마련이다. 그리고 어찌보면 예수님 때문에 생겨나는 시험은 항상 그렇게 결정적이게 마련이다. 그것은 구원과 영생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때 “나로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그 분은 어쩔 수 없이 실족거리를 제공하시는 분이시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언제나 그 실족거리들을 넘어서야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이 시험을 통과할 수 있는, 그래서 가장 복된 상태가 될 수 있는 ‘해답’도 함께 주셨다. 요한의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주신 대답이 그 시험을 통과할 수 있는 해답이었다. 이사야서에 기록되어 있는 메시야에 대한 약속, 지금 그 약속이 눈 앞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당연히 예수님께서는 “메시야시다” 생각할 필요도 없다. 그 증거를 통해 그 결론을 얻기만 하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례 요한을 비롯한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명확한 것이 아니었다. 왜 일까? 그것은 ‘자신의 기대’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메시야가 어떠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은 그 시대가 만들어 낸 산물이 었다. 그러나 메시야는 시대의 필요 때문에 오시는 분이 아니셨다. 그 분은 하나님의 때에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서 오시는 분이셨다. 그렇기 때문에 그 분은 사람이 바라는 모습이 아닌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가장 적합한 모습으로 오셔서 그 목적에 가장 적합한 방식으로 사역하셔야만 했다. 이 두 가지 사이의 갭, 그러니까 사람들이 기대하는 메시야의 모습과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의 모습 사이의 차이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시험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우리의 시각이 하나님의 시각과 맞아 떨어질 때, 우리의 시각은 우리에게 말할 수 없는 복된 기회가 되지만, 그 반대의 경우에는 가장 큰 시험거리가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께 기대하는 것까지도 잘 분별해야만 한다. 우리는 무엇을 원하든지 항상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기도를 잊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그런 분별력을 얻고 또 유지할 수 있을까? 그 방법은 바로 하나님의 약속, 그 분의 언약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그 분께서 약속하신 것이 약속하신 대로 이루어질 것을 구하고 또 기대하면 된다. 이사야의 예언은 그런 점에서 우리에게 신앙의 규준이 된다. 요한이 자신의 예수님에 대한 회의를 해결하기 위해 이사야의 예언이 기록하는 언약으로 돌아가서 그 언약이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보기만’하면 되었듯이 우리도 이미 우리에게 약속된 것이, 나의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식대로 성취될 것을 기대하며 ‘바라보기만’ 하면 된다. 

“여자가 낳은 자 중에서 요한보다 큰 이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28절)

청중들과 제자들은 예수님과 요한의 제자들 사이에서 오고 갔던 세례 요한에 대한 대화를 모두 들었다. 그것은 세례 요한에 대한 신뢰를 뒤흔들어 놓을 수 있었다. 엄밀하게 그것은 세례 요한의 믿음의 불완전함을 그대로 드러내는 대화였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그러한 오해와 평가절하의 가능성을 없애주신다. 그것은 세례 요한을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더더욱 청중들을 위한 것이었다. 위의 구절은 그 교정작업의 결론인 동시에 사람들을 위한 복의 선언이기도 했다. 세례 요한은 구속역사상 지금까지 가장 훌륭한 사람이다. 그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그 누구도 세례 요한처럼 직접적으로 메시야의 오심을 준비하는 영광스러운 과업을 맡은 사람도 없었고, 또 그는 과업을 자신의 전생애를 헌신하여 완수해 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세례 요한은 일반인들이 함부로 이렇다 저렇다 평가할 수 없는 ‘가장 큰’ 사람이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 땅에 도래한 하나님 나라의 입장에서 보면 세례 요한은 그 나라의 가장 작은 사람보다도 작은 사람일 수 밖에 없었다. 이것이 복음 이전과 복음 이후의 차이이다. 그는 옛 시대와 새 시대의 경계에서 새 시대를 향한 문을 열어준 사람이었지만 엄밀하게 말해 아직 옛 시대에 속한 사람이었다. 그렇게 판단할 수 있는 것은 그가 메시야에 대해서 불완전하게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복음의 안내자였으면서도 어느 정도는 아직도 그 시대에 속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복음으로 인해 훤히 드러난 하늘나라,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참 지식... 이런 입장에서 보면 세례 요한도 하늘나라의 가장 작은 사람보다 클 수가 없다. 그렇지만 오해해서는 안된다. 이것은 그가 이 땅에서 맡았던 그 영광스러운 역할을 감당하며 살아갔던 이 땅에서의 삶에 대한 평가이지 하늘나라에서도 그렇다는 이야기는 절대로 아니다. 땅 위에서의 삶과 복만을 놓고 본다면 복음 이후의 시대를 사는 우리가 세례 요한보다 훨씬 더 큰 복을 누리는 큰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우리가 믿고 있는 복음이 우리를 얼마나 큰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지, 얼마나 복된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지를 생각하면서 살아가야 한다. 우리가 지금 복음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이 삶은 예수 그리스도 이전에는 그 누구도 전혀 누리지 못했던 충만한 삶이다. 그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그 밝은 빛 가운데 우리는 살아가고 있고, 그들이 그토록 갈망하던 하늘나라를 우리는 이미 누리며(물론 아직은 부분적이지만) 살아가고 있다. 이것이 우리를 크게 하고 우리를 넉넉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 무엇으로도 큰 사람이 될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 저로 하여금 제가 이미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크고 놀라운 약속이 이미 이루어진 시대를 살아가고 있음을 항상 기억하게 해 주시옵소서. 내 생각과 내 기대에 가로 막혀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흔들리는 시험을 당할 때, 이미 이루어 주셨고 또 이루어 가실 하나님의 영원한 약속을 바라보게 하시고, 그 약속을 통하여 다시 온전한 신뢰를 회복하게 해 주시옵소서. 또한 내가 복음 안에 있는 것이 나에게 얼마나 크고 위대한 일인지, 나를 얼마나 복되게 하는 일인지를 깨달아 알게 하시고, 항상 그것을 알고 또 누리는 삶이 더욱 더 풍성해지고 온전해 지게 해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