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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성경 묵상

2012.02.13. 매일성경 묵상

오늘 본문은 누가복음 8장 40-56절입니다. 
     무척 급박한 상황에서, 그리고 예기치 못한 장애물을 만나 마지막 기회마저 상실한 상황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어떻게 신뢰할 수 있을까?
 또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는 믿음은 어떤 믿음일까?

“예수께서 돌아오시매 무리가 환영하니 이는 다 기다렸음이러라”

무리는 예수님을 기다렸다가 환영했다. 물론 아주 바람직한 반응이다. 그러나 이 기다림과 환영은 과연 주님 말씀하신 “열매”가 될까? 그 기다림과 환영은 언제나 그 이상의 것이 되어야 한다. 

“회당장인 야이로라 하는 사람이 와서 예수의 발 아래 엎드려 자기 집에 오시기를 간구하니 이는 자기에게 열두 살 먹은 외딸이 있어 죽어감이라”

회당장, 지역사회의 명망있는 지도자인 야이로가 갑자기 예수님의 발 아래 엎드렸다. 그러나, 이 순간은 야이로의 입장에서는 심장이 타들어가는 영원처럼 느껴지는 순간들 끝에 드디어 맞이하게 된 순간이었다. 그에게는 집에서 죽어가는 하나 밖에 없는 딸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예수님을 오매불망 기다렸고 드디어 그 분 앞에 엎드린 것이다. 가장 중요한 일(혹은 것)이 전혀 자기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상태에 놓일 때, 인간은 바로 거기서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 그 동안 이런 저런 껴입은 옷들 때문에 드러나지 않았고 또 드러낼 필요도 없었으며, 또 드러내고 싶지 않았던 자기 자신을 드러낸다. 그 ‘자신’은 바로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리는 ‘자신’이다. 그런 순간에 이럴 수 있는 것도 복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얼마나 좋을까? 실제로 한계상황 때문에 주님을 찾는 사람들 중에서는 다시 주님을 떠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것이 한계상황 때문에 주님을 찾는 일의 ‘부작용’이다. 그래서, 참 신앙은 여기서 시작될 수는 있어도 여기 머물러서는 안된다. 참 신앙은 곤경때문에 주님을 찾는 일을 포함하되 결국에는 주님을 주님으로 인정하고 가장 평안하고 만족한 상태에서도 기꺼이 기쁨으로 그 분께 무릎을 꿇을 수 있는 그런 신앙이 되어야 한다. 

“예수께서 가실 때에 무리가 옹위하더라”

엠뷸런스가 사이렌의 울리며 질주하면 앞서가던 차들은 길 가로 비켜선다. 그러나, 야이로와 예수님께서 그의 딸을 고치러 갈 때 사람들은 그렇게 해 주지 않았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만을 생각했다. 그저 이전처럼 예수님을 둘러쌌고 그렇게 예수님과 야이로의 진로를 방해했다. 

“이에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중에 아무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하던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옷가에 손을 대니 혈루증이 즉시 그쳤더라” 

여기까지는 별 일이 아니다. 그저 이 여인은 무리 중에 섞여서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댔을 뿐이니 그 여인이 추가적인 방해를 한 것은 아니었다. 이 여인은 그 자리에서 치료를 받았다. 열 두해 동안이나, 그것도 그 누구도 호전시키지 못했던 질병이 치료를 받게 되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게 손을 댄 자가 누구냐 하시니...”

이제 문제가 생겼다. 갑자기 예수님께서 멈춰선 것이다. 그 이유가 참 별 것 아니다.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댄 자가 누구인지가 궁금해서 였다. 질문을 들은 베드로도 기가 막혔다. 아니 세상에 수많은 사람들이 밀고 당기고 말 그대로 난리도 아닌데, 거기서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댄 사람을 찾으시다니 예수님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고, 그래서 그것을 말로 표현했다. 아마 모든 사람들이 마찬가지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다시 말씀하셨다.

“내게 손을 댄 자가 있도다”

누가 모르는가? 손을 댄 사람이 부지기수인데 말이다. 물론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옷을 만졌다. 아마 자신이 예수님을 만진지도 모르는 사람들도 꽤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자신을 그렇게 만지신 사람을 찾으시는 것이 아니었다. 그 모든 사람들과는 전혀 다르게 예수님의 손에 옷을 댄 사람을 찾으신 것이다. 

“여자가 스스로 숨기지 못할 줄을 알고 떨며 나아와 엎드리어 그 손 댄 연고와 곧 나은 것을 모든 사람 앞에서 고하니”

다른 사람들은 함부로 예수님께 손을 대면서도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그들은 얼마든지 예수님께 손을 댈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여인은 그렇지 않았다. 그 여인이 예수님께 손을 댈 때, 그 여인은 그런 행동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여인은 자신을 부정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 부정함의 해결을 위해서는 예수님 밖에 답이 없다고 ‘믿었기’ 때문에 자신의 판단과는 정반대의 행동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물론 믿음의 논리에서 본다면 당연한 일이지만 정말 굉장한 일이 일어났다. 예수님께 손을 대도 된다고 생각했던 사람들,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던 사람들에게는 그야 말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열광하며 애워싸며 밀려 난리법석을 부렸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의 부정함 때문에 예수님에게 손을 대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던 그 여인에게는 그 부정함이 일순간에 사라지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던 것이다. 은혜는 누구의 것인가? 누가 은혜가 일으키는 놀라운 일의 수혜자가 되는가?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자신의 온 몸과 영혼을 통해 아는 특혜는 누가 누리게 되는가? 그것은 역설적으로 자신이 결코 예수님께 가까이 갈수도 없고, 또 그 분을 만질수도 없다고 여기는 사람이다. 그러나, 믿음으로 주님께 손을 뻗는 사람이다. 

“딸아 내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그 동안 이 여인은 자신을 부정하게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도 다 그렇게 여겼다. 무언가 하나님 앞에서 문제가 있기 때문에 그런 고통을 당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그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 그가 병을 치유받은 사건은 그렇게 그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음을 증명하는 사건이었고, 예수님의 말씀은 그것을 공인해 주고 있었다. 병만 치료되었는가? 그렇지 않다. 그 여인은 그 손끝 하나로 병고침을 받았고, 믿음을 인정받았으며 평안함을 선물로 받았다. 또 그렇게 사람들 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무엇 때문인가? ‘믿음’ 때문이다. ‘손끝에 맺힌 믿음’때문이었다. 

“아직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이 와서 말하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선생을 더 괴롭게 마소서”

여인은 그렇게 자신이 원하는 치료도 받았고 거기다가 믿음도 인정받았지만 그러는 통에 정말 죽을 지경이 된 것은 회당장이었다. 딸이 언제 어떻게 될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일초가 급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사안적으로 볼 때 그냥 지나쳐도 될 ‘별 것 아닌 일’로 시간을 지체했다. 이제 가나 했더니 가장 들려와서는 안될 소식을 듣게 된다. 딸이 이미 죽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더 이상 예수님을 괴롭힐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상황종료다. 이제는 더 이상 무엇을 할 필요도, 할 수도 없게 되었다. 그런데, 회당장의 가슴이 내려 앉을 틈도 없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여인의 상황 속에서 믿음과 구원을 연결시키셨던 예수님은 다시 한 번 믿음과 구원을 연결시키신다. 예수님은 그 여인의 믿음을 회당장에게도 요구하시는 것이다. 주님은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고 하셨다. 믿음을 방해하는 것은 두려움이다. 상황을 통제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 오는 두려움이다. 이 두려움은 사람을 절망하게 하거나 다른 경우에는 전혀 근본적인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의 도움을 받으려 손을 다른 곳으로 뻗게 만든다. 그런데, 거기에는 구원이 없다. 두려움이 생기지만 두려움을 넘어서야 한다. 그 두려움과 싸워 이겨야 한다. 하나의 역설이 존재한다. 두려움이 주님을 신뢰하는 것을 방해하지만 그 두려움과 싸워 이기게 하는 것도 믿음이다. 바로 그런 믿음이 구원으로 이어지는 믿음이다. 이야기가 너무 길어지니 중간은 생략한다. 

“예수께서 돌아와 아이야 일어나라 하시니 그 영이 돌아와 아이가 곧 일어나거늘” 

회당장은 아마도 예수님의 말씀대로 했던 것 같다. 믿음으로 두려움을 이겼고, 그렇게 예수님을 신뢰하는 일에 성공했던 것 같다. 딸이 살아난 것을 보니 말이다. 여인도 구원을 받았다. 회당장의 딸도 구원을 받았다. 그리고 회당장도 구원을 받았다. 구원의 종류는 달라도 모두가 다 그것이 본인의 믿음을 통해서건 타인의 믿음을 통해서건 그 믿음을 통해서 구원을 얻었다.(복음서는 구원이라는 단어를 굉장히 광범위하게 사용한다. 영혼의 구원 뿐만 아니라 어쩔 수 없는 곤경이 해결된 것도 구원이라는 단어로 표현된다. 그러니 우리도 복음서를 읽을 때 구원이라는 단어를 너무 영혼에 대한 것이라고 한정하지 말자. 그러면 이야기가 굉장히 복잡해지고 풀리지 않는 문제들도 많이 생겨난다. 예수님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늘나라가 임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모든 회복을 구원이라고 말씀하신다) 

본문의 두 이야기는 “예수님은 누구신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그 분은 “믿음을 통해 구원하시는 분”이라고 말한다. 묶인 것이 무엇이건, 심지어는 죽음일지라도 믿음을 통해 충분히 풀어주시고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핵심인 것이 분명하지만 우리는 한 가지를 더 살펴보자. 그렇다면 그 믿음은 어떤 믿음을 말하는가? 

우리가 살다보면 상황이 굉장히 복잡하게 얽히고 섥혀서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 문제 하나로도 충분히 어려운데, 그 어려움을 더 힘들게 하는 예측하지 못했던 장애물이 끼어들고 그래서 도저히 손을 댈 수 없는 어려운 지경에 빠지게 된다. 아얘 우리의 손을 떠나버린다. 그 때 주님은 말씀하신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여기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믿음이란 바로 그런 상황 속에서도 예수님을 신뢰하는 그런 믿음을 말한다. 여인의 경우에는 12년 동안 손쓸 수 없이 악화되어 버린 질병을 손을 대기만 하면 고치실 수 있다고 믿는 믿음, 회당장의 경우에는 그 여인 때문에 방해를 받아 딸이 이미 죽었지만 어떻게든 예수님은 그것을 해결하실 것이라는 믿음 말이다. 

상황은 분명히 두려움을 만들어내기에 충분하다. 그래서 우리를 좌절시키기에 충분하다. 그래서 이제 더 이상 예수님을 괴롭힐 필요가 없다고 생각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그 때 믿음은 말한다. 그 때야 말로 예수님을 괴롭혀야 할 때라고, 믿음으로 그 분을 귀챦게 해드려야 할 때라고 말이다. 요약해 보자. 그 구원이 무엇이든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은 상황이 어떻든 상관없이 주님을 그 상황을 충분히 통제하실 수 있는 분으로 믿는 믿음이다. 그래서 언제든지 그 분을 괴롭힐 수 있는 믿음이다. 거꾸로 생각해 보면 모든 상황 속에서 두려움과 싸워 이기고 그 다음의 믿음에 이르게 할 수 있는 믿음은 바로 이런 종류의 믿음 밖에 없다. 

그런데, 복잡하고 힘든 상황 속에서의 구원만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를 영원히 구원(여기서 구원은 우리가 그렇게 좋아하는 영혼의 구원을 의미한다)하는 믿음도 마찬가지다. 우리 영혼을 구원하는 믿음은 우리의 죄가 얼마나 진하고 많든지 그리스도를 통해 모두 용서해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믿을 믿는 믿음이며, 그렇게 우리를 영적으로 죽은 우리를 다시 살리실 뿐만 아니라 육체적으로 죽은 자도 부활하게 하시는 분이심을 믿는 믿음, 그렇게 인간으로서는 ‘불가능’이라는 단어 밖에 떠오르는 것이 없는 상황을 넉넉히 통제하시고 해결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믿는 믿음이기 때문이다. 

이 믿음이 있는 자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구원을 얻을 수 있다. 그런 사람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을 괴롭힐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에게는 언제나 주님의 이런 말씀이 들려진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