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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성경 묵상

2012.02.15. 매일성경 묵상

       오늘 본문은 누가복음 9장 18-27절입니다. 
      
      오늘 본문은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는지를 묻고 그 대답을 듣는 부분, 그리고 그에 대한 예수님 자신의 정의, 그리고 그런 자신을 따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가르쳐 주시는 부분이다. 

“무리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제자들이 처음 “저가 뉘기에?”라고 묻고나서 한참이 지났다. 그 동안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두 보여주셨다. 아마 그 모든 일들이 주는 메시지를 간파했다면 제자들은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라는 대답에 이르렀을 것이다. 오랜 시간의 ‘강의’와 ‘실습’까지 마치고 예수님은 이제 제자들에게 그 질문을 되돌려 주신다. 그러나 처음 그 질문은 직접적인 질문은 아니었다. 먼저 예수님은 “무리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는 질문부터 하신다. 그리고 이런 저런 보고를 들으셨다. 그 다음에 직접적인 질문이 주어진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것이 중요한 질문이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누구라고 생각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제자들 자신이 예수님을 누구라고 생각하고 있느냐 하는 것, 지금까지 예수님에 대해서 무엇을 배우고 확신하게 되었는지가 중요하다. 예수님이 직접 두 번째 질문으로 들어가지 않으신 것은 예수님에 대한 무리의 지식과 제자들의 지식은 달라야 한다고 여기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과정은 어떤 의미에서 예수님이 누구이신가를 배우며, 그것을 알고 또 확신하게 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차원이 우리의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믿음의 주”이시기 때문이다. 그 분이 유일한 믿음의 대상이며, 내용이시다. 그 분이 믿음에 있어서 결정적이다. 감정이나 경험은 도움은 되지만 그것이 본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내가 그 분을 어떻게 생각하고 아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 분이 자신에 대해 가지고 계신 생각과 우리의 지식과 믿음이 어떻게 일치하느냐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듣고 싶으셨던 대답을 들으셨다.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이것은 아주 정확한 정답이기는 해도 아직은 들어있어야 할 내용이 없는 정답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거기다 이렇게 덧붙이신다. ‘하나님의 그리스도’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진짜 의미, 그 속에 포함되어야만 하는 진의를 말씀해 주신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이것이 예수님께서 알고 계신 “하나님의 그리스도”라는 말이 가져야만 하는 충분한 의미였다. 고난, 죽음, 부활...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됨을 구성하는 반드시 필요한 내용이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고백한다는 의미는 바로 예수님을 이런 분으로 믿고 고백한다는 뜻이 된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메시야로서 일하시는 방식이며, 구원을 이루시는 방식이라는 것을 알고 또 믿는 것이 그 분을 그 분으로 ‘아는 것’이다. 굉장히 단순하지만 그렇지가 않다. 왜냐하면 이것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믿음, 그러니까 우리 자신을 위한 것으로 믿는 믿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단순히 그렇게 하심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시며, 우리가 그 ‘구원’이라는 혜택을 입는다는 의미에서 그러할까? 그렇지가 않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그렇다면 십자가는 우리의 구원말고 또 어디에 유익할까? 그 해답은 위의 구절에 드러나 있다. 십자가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을 위해서도 필수적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고난과 죽음을 말씀하신 후에, 우리를 향해서 누구든지 예수님을 따르려거든(이것이 믿음이라는 말이 가지는 가장 중요한 의미라는 것을 알겠는가?)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십자가를 지고 자신을 따르라고 하셨다. 그 분은 우리에게 그 분을 따르는 삶을 요구하신다. 그런데, 그 삶이라는 것이 바로 ‘날마다 죽음으로써 사는 것’을 의미한다. 엄청난 역설이다. 우리가 사는 길은 바로 죽는 것, 그러니까 죽듯이 살아가는 것 밖에 없음을, 그리고 그것은 자기부인이라는 죽음으로 나타나야 한다니 그것보다 더 큰 역설이 어디있겠는가? 그런데, 이 역설은 결코 역설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자신을 죽게 내어주심으로써 “제 삼일에 살아나셨다” 이것은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라는 말씀의 명백한 증명이었다. 그 분은 죽으심으로써 다시 사셨다. 실제로 다시 사는 일은 죽음이 없으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 분의 죽음, 그 십자가의 죽음은 자신을 구원하고자 하는 자, 진실로 살고자 하는 자를 위해서 그가 그 일을 위해서 마땅히 어떤 길을 가야하는지를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 부활을 얻고자 하는 자, 진실로 살고자 하는 자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자신의 삶의 방식으로 취해야 한다. 그렇지만 이것을 안다고 해서 십자가를 취하는 것, 십자가가 지시하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이 쉬워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알고 믿는 믿음이 그 길로 가야 할 이유와 동기를 제공해 주기는 하지만 아직 장애물이 제거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장애물을 무엇인가? 무엇이 우리가 십자가를 선택하지 못하게 막는가? 그것은 바로 ‘온 천하’다. 우리가 ‘온 천하’로 상징되는 세상에 속한 것들에 묶여 있기 때문에 십자가를 선택할 수가 없는 것이다. 천하를 얻으려 한다면 우리는 결코 십자가가 지시하는 삶의 양식을 취할 수가 없다. 살면서 죽어야 하는, 자기를 부인하는 방식으로 사는 삶을 선택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온 천하를 신경쓰는 삶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과는 정반대가 되는 삶이기 때문이다. 적극적으로는 욕심이라고 표현할 수 있지만 소극적으로는 생활에 대한 근심과 걱정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 근심, 걱정이 가지는 무서움은 그것이 그것에서 끝나지 않고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을 부끄러워하는 것”으로 이어지기가 쉽다는데 있다. 사람이 무언가를 부인하거나 피하는 이유는 그것을 인정하고 취하는 것을 부끄러워 하기 때문이다. 역으로 생각하면 그 반대편에 있는 것을 자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십자가, 그리고 그 십자가가 가리키는 삶을 부인하고 피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을 부끄러워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지 몰라도 주님은 그것을 그렇게 보신다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온 천하’를 얻으려고 할 때, 그 ‘온 천하’에 묶여서 십자가를 선택하지 못할 때, 그 때 우리는 주님과 주님의 말씀을 부끄러워 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우리가 진실로 십자가와 십자가에 대한 주님의 말씀을 자랑스러워 한다면, 우리는 기꺼이 그 십자가를 취하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이 부끄러움이 하나님이 우리를 부끄러워하시는 부끄러움과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끄러워한다는 개념은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다. 익숙하지 않을 뿐더러 불쾌하기까지 한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말씀에 대한 우리의 감정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 분이 부끄러워하시는 상태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이다. 

요약해 보자. 예수님은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다. 이 말의 중심에는 십자가가 있다. 십자가가 바로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말해주는 중심이라는 뜻이다. 그 십자가를 통해서 그 분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 그리고 그 분의 영광과 그 분의 구원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생각할 때, 십자가를 생각하고 그 십자가를 중심으로 그 분을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을 알고 믿는 믿음은 반드시 그 십자가가 지시하는 삶으로 이어지고 드러나야 한다. 우리를 그 자리로 인도할 수 있는 믿음이라야 자기 목숨을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있는 종류의 믿음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기부인을 통해 날마다 자기를 죽일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가 그 분의 죽음에 참여했으니 그 분의 부활에도 참여하게 될 것을 확신하게 될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할  것이요”라고 말씀하신 그 약속을 믿는 믿음으로 부터 말미암는다. 우리가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과 그 주님의 이 약속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으로 부터 말미암는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느니라” 

“하나님의 나라” 이것이 우리가 십가자를 져야할 진짜 동기이다. 그 나라를 보려면, 영광가운데 기쁨으로 바라보려면 우리는 십자가가 지시하는 삶, 그러니까 ‘온 천하’에 묶여 예수님과 그 분의 말씀을 부끄러워하는 삶이 아니라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는, 그렇게 죽음으로써 오전히 살게 되는 그런 삶의 방식을 선택해야 한다. 제자란 그 확신 가운데 힘들지만 기꺼이 그런 형식의 삶을 선택하며 그를 통해 ‘온 천하’가 아닌 자기 영혼을, 그리고 영원한 하늘나라를 상속받는 그런 사람이다. 


하나님, 온 천하가 우리 눈에 들어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천하를 얻고 싶은 욕망이 빠집니다. 그 누구라서 좋은 것이 좋은 것인 줄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것 때문에 주님과 주님의 말씀을 부끄러워하는 삶을 살아서는 자기 영혼마저도 잃어버릴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압니다. 우리는 이 둘 사이에 끼어서 살아갑니다. 그 끼어있음이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주님, 주님의 그리스도되심을 확실히 알게 해 주시옵소서. 그리고 주님의 그리스도되심의 중심에 십자가가 있음을 알게 해 주시옵소서. 그리고 그 십자가는 우리의 영혼 뿐만 아니라 몸도, 그 몸으로 살아가는 삶도 구속하는 은혜임을 잊지 말게 해 주시옵소서. 항상 보이는 세상보다는 보이지 않는 하늘나라를 더 확실하고 분명한 실재로 여기는 분별력과 지식을 허락하셔서 천하를 얻으려다가 자기 영혼마저 잃어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게 해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