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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성경 묵상

2012.02.14. 매일성경 설교



      오늘 본문은 누가복음 9장 1-17절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직접 복음 사역에 필요한 은사와 능력을 주시고 사역의 원칙과 실제를 보여주시는 내용이다. 특히 오병이어 사건을 단순한 이적이나 하늘나라의 표적이 아니라 아니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삶의 방식에 대한 가장 극적인 증거요 성취로서 읽어보시기를 바란다. 하나님만 의지하며 살며 또 일하는 삶에 대한 이보다 더 온전하고 생생하며 풍성한 가르침이 어디 있을까?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모으사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세를 주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앓는 자를 고치게 하려고 보내시며”

이 모든 일에 있어서 주도권을 가지며, 사역에 필요한 은사와 능력의 원천이 되는 것은 예수님 자신이시다. 제자들은 그저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다. 그래서 그들의 이름이 “사도”가 아니던가?(사도는 원래 헬라어에서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이다) 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부여하신 능력은 곧바로 그들이 해야할 일과 직결되어 있다. 이것은 그들의 사역이 예수님이 하게 하시는 일을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이것은 어떤 형태로든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기억해야 할, 그리고 순종해야할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준다. 우리는 그저 ‘하는 사람들’이다. 그 분이 부르시고 보내시기 때문에 그리고 그 분이 주신 능력으로, 그 분이 하기를 원하시고 그래서 우리에게 맡기시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 그 이상은 절대 아니다. 이것은 우리가 머물러야 할 자리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역으로 우리가 이러한 우리의 자리를 잘 지키고 그 안에서 일할 때, 그 때 주님이 의도하신 사역의 역사와 열매들이 일어나게 된다는 이야기도 된다. 그 분의 주도권과 원천되심을 기억하며 거기 의지하여 사역할 때, 그 일은 우리의 일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그 분의 일이 될 것이다. 그래서, 그만큼 더 크고 놀라운 복음의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이다. 

“여행을 위하여 아무것도 가지지 말라 지팡이나 주머니나 양식이나 돈이나 두 벌 옷을 가지지 말며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거기서 유하다가 거기서 떠나라”

이것은 과연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듯이 ‘청빈의 의무’를 말씀하시는 것일까? ‘가난의 미덕’을 장려하시는 말씀일까? 그리고 복음의 사역을 하려면 항상 그만큼 가난해야 한다는 뜻일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음과 같은 점에서 그렇다. 주님께서 요구하신 이런 삶의 양식은 그 자체가 하나의 훈련이며 기회이다. 어떤 훈련이며 또 기회일까?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이 조건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없음’이며 ‘부족함’이다. 그런 삶을 선택한다는 것은 거기 의존하지 않겠다는 의미이다. 이런 조건이 제시된다면 그런 것에 의존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된다. 그렇다면 그는 무엇을 의지해서 살며 또 사역해야할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그에게 공급해 주실 것들이다. 그런데, 이미 주어져 있는 것도 아니고, 주실 것에 의지해서 살아가기 위해서, 그러면서도 근심과 두려움이 없이 사역하려면 이런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믿음’이다. 하나님께 대한 신뢰가 필요하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요구하신 것은 가난이나 청빈이 아니라 실제로 삶 속에서 증명되는 하나님께 대한 신뢰였다고 할 수 있다. 제자들은 삶에서나 사역에서나 하나님께서 ‘주실 것’을 신뢰해야 한다. 그런데, 그 ‘주실 것’을 신뢰한다는 말의 참된 의미는 그렇게 하나님께서 ‘주실 것’이 나의 미래를 위해 가장 적절하고도 충분하다고 믿고 살아간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주실 것이 적절하고 충분할 것을 신뢰하지 못한다면 그는 결코 그런 삶의 양식을 취할 수 없다. 만약 그런 삶을 양식을 취한다고 하더라도 그 안에서 그는 평안하지 못할 것이며, 견고하지 못할 것이다. 대신에 불만과 불신, 그리고 두려움과 근심 속에서 살아갈 것이고, 그렇게 해서 그의 사역 또한 온전히 행해지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왜 주님은 굳이 제자들에게 이런 삶을 연습시키시려고 하시며, 또 그런 삶을 요구하신 것일까? 그것은 이런 양식의 삶이야 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복음을 증명하는 삶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원래 복음은 우리로 하여금 ‘제 자리로 돌아올 것’을 명령한다. 하나님이 아닌 자기 자신을 의지하며 살았던 삶에서 돌이켜서 하나님을 의지하여 살아가는 자리, 태초에 아담과 하와가 머물렀던 그 자리로 돌아올 것을 요구한다. 그래서 복음에 순종한다는 것은 그렇게 하나님만 의지하며 신뢰하며 살아가는 그런 자리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을 하면서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요구하신 그런 삶을 사는 것 보다 더 복음의 명령에 부합하는 삶의 양식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런 삶이야 말로 그들이 전할 복음을 몸으로 선포하는 그런 모습이 될 것이다. 기존의 삶의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께만 의존하며 그 분을 신뢰하는 삶으로 충분함을 증명하는 가장 명확한 증거가 될 것이다. 만약 이 방법으로 살며 또 일하고 나서 그들이 부족함 없이 돌아올 수 있다면 그것이야 말로 복음이 말하는 바 ‘하나님으로 충분하다’는 선포가 틀림없는 진리임을 증명하는 증거가 될 것이다. 

또한 이러한 삶의 양식은 단순히 실습을 위해서 주어진 것만이 아니었다. 그러한 삶의 양식은 앞으로도 제자들이 계속해서 취해야 할 삶의 양식, 그것도 가장 확실하고 풍성한 삶의 양식이었다. 그것은 그러한 삶이 삶의 모든 것을 내 손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에 맡고 의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복음은 ‘하나님 한 분으로 모든 것이 충분하다’고 말한다. 구원도, 일상생활도, 영생도... 그 분 한 분으로 가장 완전하며 충분하다고 선언한다. 그 믿음에 의지해서 살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이 복음을 복음답게 믿는 사람의 삶이라고 말한다. 제자들은 그대로 따랐다. 일부러 그런 형태의 삶을 택했고 그리고 그런 형태의 삶이 얼마나 풍성하고 능력있을 수 있는지를 증명해 냈다. 복음이 옳다는 것을 증명해 냈던 것이다. 개인적이인고백을 좀 하겠다. 요즘 나는 이런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 하나님 한 분 만으로 충분함을 믿으며, 그런 믿음으로 살아가려는 싸움 말이다. 언젠가 그런 깨달음을 얻었다. 이게 안되면 나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목회자가 될 수는 없다는 절박한 깨달음, 이게 안되면 필시 언젠가는 보이는 것의 심각한 시험에 노출될 수 밖에 없고, 또 쉽게 넘어질 수 밖에 없다는 깨달음 말이다. 그러나, 이 싸움은 억지로 싸우는 것이 아니다. 이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이 가장 풍성하며 가장 능력있는 삶이 될 것을 알기에 기꺼이 싸우고 있다. 물론 그래도 쉽지 않다. 목표가 거기이지 내가 이미 거기에 도착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얼마전까지 나는 삶의 최소한의 필요는 하나님 앞에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도 못했다. 그런데, 얼마전부터 진심으로 그런 기도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스스로 정한 삶의 최소한의 필요에 대한 정의와 집착까지도 다 하나님께 맡기게 해 달라고 기도하게 되었다. 나 뿐만 아니라 우리 가족 모두에게 그런 믿음을 주셔서 이 세상에서 복음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면서 살아갈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게 되었다. 물론 아직 나서서 그렇게 할만한 용기가 없다. 그러나, 그런 기도가 시작된 만큼의 자유는 나에게 주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계속 기도할 것이다. 어쩌면 내 삶에서 진정으로 하나님만으로 만족하는 삶을 실현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싸움이니 계속 기도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언젠가 이 기도를 ‘반드시’ 들어주실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왜냐하면 이 기도는 내 욕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드리는 기도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기도가 응답되었을 때, 나는 그 누구보다도 이 기도응답의 혜택을 크게 누리는 사람이 될 것이다. 일석이조 아닌가? 난 큰 은혜를 알게 되고,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얻으시니 말이다. 복음 안에 하나님의 가장 큰 영광이 드러나 있다는 말 속에는 아마 이런 의미도 포함되어 있는 것 같다. 한 가지 더, 주님은 복음을 들은 사람이 그 복음을 거부하면 집착하지 말고 어찌보면 냉정하게 그 곳을 떠나라고 말씀하신다. 왜 일까? 그 중요한 복음을 전하여 사람을 구하는 일을 하면서 왜 구원받는 사람들이 생겨날 때까지 기다리거나 붙들고 설득하라고 하시는 대신에 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 그것은 이 일에서까지 하나님만으로 만족하라는 의미이다. 제자들은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지 그 복음의 열매를 만들어 내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먼저 배울 필요가 있었다. 복음 사역의 주도권이 예수님께 있듯이 그 사역의 열매는 결국 하나님의 소관이라는 사실을 배워야 했던 것이다. 복음 전도자에게는 영혼을 구원해야 한다는 긴박성도 필요하지만 그 보다는 하나님께 대한 신뢰가 더 필요하다. 예수님의 마지막 당부는 바로 그것을 위해서 주신 것이었다.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무리 앞에 놓게 하시니 먹고 다 베불렀더라 그 남은 조각 열두 바구니를 거두니라”

오병이어 이적의 결론이다. 사역 도중에 일어난 일이었다. 5천 명이 훨씬 넘는 사람들이 계속 예수님을 좇아와서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그들 모두를 먹여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라로 말씀하셨다. 불가능하다는 것을 아시면서도 그렇게 하셨다. 이것은 그들을 향한 요구가 아니라 시험문제였다. 예수님께서 풀어주심으로써 앞으로 따를 모범답안을 주시기 위해서 내신 문제였다. 말도 안되는 일이라고 항변하는 제자들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물고기 다섯 마리와 보리떡 두 개를 앞에 놓고 기도하신다. 그런데 그 기도는 감사기도였다. 5천명대 오병이어. 감사기도가 나올 상황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감사를 드렸다. “오늘도 일용할 양식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이런 기도가 아니었을까? 기도가 끝나자 정말 정말 말되 안되는 일이 일어났다. 그 오병이어가 끝도 없이 한도 없이 늘어나고 불어났다. 한 그릇을 옮기고 나면 거기 또 한 그릇이 있었다. 그런 식으로 거기 모인 모든 사람이 다 먹었는데도 전혀 부족함이 없었다. 오히려 열 두 광주리, 그러니까 처음 원재료가 되었던 오병이어의 아마 적어도 몇 십배가 ‘남았던 것’이다. 

이 사건은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래서 참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 충분하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언제나 충분할 것이라는 믿음의 진리를 증명해 주는 증거였다. 앞으로 언젠가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예수님이 아니라 제자들이 주어야 할 때가 올 것이다. 그 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없다고, 또 부족하다고 전전긍긍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해야 한다. 예수님은 그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사역보고를 마친 제자들을 다시 벳세다라는 고을로 데리고 가셨던 것이다. 우리는 그 자리가 사역의 자리이든, 개인적인 삶의 자리이든 거기에는 언제나 ‘부족’ 그것도 ‘턱없는 부족’이라는 상황이 닥쳐온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 어떻게 하는 것이 복음을 믿고 또 전하는 사람의 올바른 반응일까? 바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드렸던 기도는 신뢰의 표시였다. 상황이 어떠하든지 하나님께서 그 상황을 가장 선하고 온전하게 이끌어 가실 것이며 결국 그 부족함을 어떤 방식으로든 해결하실 것이라는 것을 신뢰하는 신뢰의 표시였다. 제자도란 ‘오병이어’의 상황에서도 진실로 하나님의 충분하심을 신뢰하며 살아가는 신뢰를 위한 싸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 분의 충분하심을 드러내는 증명을 위한 싸움이라고 할 수 있다. 

제자들은 이제 이러한 제자도를 위한 모든 준비를 마친 셈이었다. 진실로 하나님의 충분하심을 믿고 살며 사역할 때, 그 충분하심이 그들의 삶과 사역에 어떤 모양으로 나타날 수 있는지를 말씀과 자신의 삶, 그리고 예수님의 이적을 통해 모두 배웠기 때문이다. (누가복음의 속편인 사도행전은 바로 성령 안에서 이런 믿음으로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 ‘하나님 한 분 만으로 충분하다’고 외치는 복음을 믿고 그 복음을 따라 살게 해 주시옵소서. 내가 내 삶을 붙들고 내 힘으로 그 필요를 채우는 삶이 아니라, 내가 내 사역을 붙들고 그 열매를 책임지려고 바둥거리는 사역이 아니라, 삶과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 한 분만으로 충분함’을 증명하고 경험하는 넉넉하고 풍성한 제자로 살게 해 주시옵소서. 그 지극한 복, 하나님의 충분하심으로 충분해지는 복을 누리게 해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