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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성경 묵상

2012.02.16. 매일성경 묵상


     오늘 본문은 누가복음 9장 28-36절입니다. 

     ‘변화산 사건’이라고 불리는 이 일은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이 말씀을 하신 후 팔 일쯤 되어...”

나는 오늘 본문을 푸는 열쇠가 여기에 있다고 본다. 누가는 이 사건이 예수님이 바로 앞의 본문에서 말씀하신 후에 있었던 사건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어제 본문으로 돌아가야 한다. 어제 본문은 예수님의 정체성과 십자가, 그리고 제자도에 대한 말씀이었다. 그리고 그 마지막에는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셨고, 오늘 사건은 바로 그 말씀을 하신 후 8일쯤 있다가 일어난 일이었다고 설명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은 그 모든 것과 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정체성, 십자가, 그리고 하늘나라와 연관지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이 부분에서는 예수님의 기도와 영광이 연관지어지고 있다. 그런데, 어디서 본 듯한 광경이다. 그렇다. 이것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 돌판을 받을 때의 사건과 많아 닮아있다. 그렇다면 이 사건은 예수님을 유대인들이 기다리던 ‘모세와 같은 그 선지자’라고 말하고 있는 것일까?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한 것 같다.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새”

영광 중에 두 사람, 그러니까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났다. 모세는 율법을 대표하는 인물이고 엘리야는 선지자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이들이 나타나서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구약은 전체로 오실 예수님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두 사람은 그 구약을 대변하는 사람이다. 이들의 입에서 예수님의 수난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온다는 것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으로 말미암아 모든 율법과 선지서들의 약속이 성취될 것임을 언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되 자기의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 

본문은 베드로의 이 말이 자기도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면서 한 말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이 말 속에는 모든 인간들의 본심이 들어있다고 할 수 있다. 사람은 누구나 예상치 못했던 영광스러운 경험을 하거나 커다란 은혜를 경험하면 그 순간이 영원히 지속되기를 소망한다. 베드로는 그러한 인지상정을 대변했던 것이다. 만약 무슨 소리인지도 모르면서 한 이야기라면 이 이야기가 전혀 중요한 이야기가 될 수 없고, 그렇다면 이 귀한 성경의 지면을 장식할 가치가 없을텐데 굳이 하나님께서 이 아무 뜻 없는 베드로의 이야기를 여기 기록해 놓으신 이유는 “그렇지만 그건 제자도가 아니다”라고 말씀하시고자 함이었다. 이는 뒤에 이어지는 말씀과 어제 본문 중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됨에 대해서 말씀해 주신 내용은 이러한 해석이 정당함을 뒷받침해 준다. 제자도는 죽음으로써 사는, 그럼으로써 생명을 얻게 되는 그런 삶의 길이다. 때로 하나님의 영광도 보아야 하고 압도적인 은혜도 체험해야 하지만 그것은 단지 제자도의 길을 가기 위한 에너지원이지 그게 제자도의 본질이 아니다. 

“이 말 할 즈음에 구름이 와서 저희를 덮는지라 구름 속으로 들어갈 때에 저희가 무서워하더니”

베드로가 제 정신이 아닐 때, 그 때 하나님은 그들을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구름) 안으로 인도하셨다. 당연히 제자들은 두려워 하였다. 누가 하나님 임재 앞에 머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랴? 실제로 여기에는 ‘초막 셋을 짓고 거기 머무는 일’이 실제로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 같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거하는 것이며, 그것은 거룩한 두려움 가운데 살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무거운 것이다. 그 가운데 거하려고 하는 자는 그 무거움을 감당해 낼 준비를 해야 한다. 물론 하나님의 영광은 지극히 좋은 것이지만 죄인인 우리가 이 땅에서 그 영광 가운데 머문다는 것은 굉장히 두렵고 버거우며 조심스러운 일이 될 것이다.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고 소리가 그치매 오직 예수만 보이시더라”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사람이었다면 예수님은 직접 말씀하시는 자이다. 하나님의 아들로 하나님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분이시다. 그러니 그 분이야 말로 모세가 가리켰던 진짜 모세다. 이제 새로운 이스라엘인 제자들은 모세가 아닌 그 분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직접 그 분의 입을 통해서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순종해야 한다. 구름 속에서 들려온 말씀은 “여기 영원히 머물라”는 말이 아니었다. 그 대신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는 말만 들려왔다.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한 자들이 해야할 일이 무엇인가? 그것은 그 경험의 자리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이다. 

“오직 예수만 보이시더라”

이것이 제자도의 ‘현실’이며, 현실 속의 제자도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그림이다. 땅 위에서 우리에게는 오직 예수 밖에 없다. 우리는 그 분만을 바라보아야 한다. 산을 내려가야 하며 예수님만을 바라보며 그 분이 우리에게 주신 삶을 살아가야 한다. 또 우리가 그 분이 말씀하신 삶을 살아가려면 오직 예수만을 바라보아야 한다. 다른 것을 보아서는 안된다. 그 분은 말할 수 없이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렇지만 동시에 예루살렘에서 죽임을 당해야만 하는 분이시다. 이 두 가지 사실의 모순과 역설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때, 우리는 비로소 이 땅에서 그 분처럼, 그 분의 제자로 살아갈 수 있게 된다. 영광과 고난은 동전의 양면이다. 우리가 현재의 영광을 내려놓고 고난으로 다가갈 때 그 고난은 우리에게 영원한 영광의 이유가 된다. 

“제자들이 잠잠하여 그 본 것을 무엇이든지 그 때에는 아무에게도 이르지 아니하니라”

고난을 알기 전에 영광을 아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그것을 보기 전에 그리스도의 영광부터 보게 된다면 사람들은 결국 예수님의 길에 대해서, 그리고 제자의 길과 신앙의 길에 대해서 오해하게 될 것이다. 예수님을 알아야 하고, 예수님만을 보아야 하고, 산 아래에서 살아가야 한다. 그것이 제자도이고 유일하게 영광을 얻게 되는 길일 것이다. 영광은 약속되어 있는 것이지만 그것은 예수님을 바라보며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며 ‘살아갔던’ 자에게 주어질 선물이다. 


하나님, 우리가 우리에게 약속된 하늘의 영광을 아는 지식에 이를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확실히 알고 믿게 하시며 그래서 그 분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며 눈으로는 그 분만을 바라보게 해 주시옵소서. 땅에서는 영광이 아니라 십자가가 있지만 그 십자가를 통해 영광을 보며 우리에게 맡기신 삶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사람들로 살게 해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