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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성경 묵상

2012.02.17. 매일성경 묵상

   
    오늘 본문은 누가복음 9장 38-50절입니다. 

    오늘 본문은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귀신들린 아이를 고치신 사건과 제자들의 누가 큰 자인가에 대한 논쟁, 그리고 요한의 보고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이 그것이다. 누가복음은 분명히 이 세 이야기를 한 덩어리로 취급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오늘 본문 전체는 바로 앞의 본문과 또 뒤에 나오는 본문과는 확연하게 단락이 구분되기 때문이다. 이 세 단락을 하나로 묶어 보자.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너희를 참으리요 네 아들을 이리로 데리고 오라”

귀신들린 아들을 가진 아버지의 보고를 듣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그런데, 이 말씀은 사실 제대로 이해하기가 그렇게 쉽지 않은 말씀인 것 같다. 성경은 이것이 아이의 아버지의 보고에 대한 대답이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겉으로 보기에는 아이에게 들렸던 귀신 하나 내어쫓지 못한 제자들에 대한 꾸짖음 같지만 그 의미는 분명히 액면가 이상이다.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에도 드러난다.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라는 말씀은 그 당시의 모든 사람들을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경은 이것이 예수님의 대답이었다고 말한다. 무엇이 질문이었던가? 질문은 없다. 그저 예수님을 향한 치료의 요청과 그렇게 요청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대한 보고 밖에 없었다. 그런데, 주님은 대답하신다. 그렇다면, 질문은 그 상황 속에 감추어져 있었다. 그 상황 속에는 당시 사람들로서는 도저히 풀 수 없는 문제가 숨겨져 있었다. 그것은 그 광경을 지켜보던 사람들과 제자들은 물론이고 사실 그 세대 전체가 가지고 있던 문제였다. 

“귀신이 저를 잡아 졸지에 부르짖게 하고 경련을 일으켜 거품을 흘리게 하며 심히 상하게 하고야 겨우 떠나가니이다” 

이것이 간헐적으로 귀신에 들리게 되는 어린아이의 상태였다. 어린 아이가 이런 상태가 된다. 그런데, 그 누구도 손도 대지 못한다. 제자들도 마찬가지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에 대한 대답이었다. 그 세대는 귀신들린 세대다. 어린아이까지 귀신에 들릴 수 밖에 없는 악한 세대다. 그 귀신(악령)은 그 세대를 마음대로 한다. 들어오고 싶을 때 들어오고 나가고 싶을 때 나간다. 언제 또 들어올지 모른다. 들어오고 나가는 것이 자기 마음대로라면 이미 그 세대는 그 귀신에게 사로잡힌 세대라고 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한 번 들어오면 그야 말로 자기 마음대로 ‘가지고 논다’ 아무리 악화된 상태로 몰고가도 그 누구하나 그것을 저지하거나 막아서지 못한다. 그저 거기 휘둘릴 뿐이다. 그 아이가 처해있는 상태는 그 귀신이 행하는 일들이 과연 어떤 종류의 일인지를 알려준다. 그건 파괴와 왜곡이다. 악화와 불안이다. 세대 전체가 이런 고통과 무너짐에 그저 자신을 내어 맡기고 있을 뿐이다. 달리 방법이 없으니 그럴 밖에 다른 수가 없다.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이것이 이러한 세대를 향한 예수님의 평가였다. 예수님의 진단은 두 가지다. 첫째 믿음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패역했다(twisted) 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보자. 귀신이 문제인가? 아니다. 그러면 아이가 문제인가? 그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세대가 문제다. 그 세대가 믿음이 없는 세대이고 꼬이고 뒤틀린 세대라는게 문제다. 그렇게 하나님과의 관계와 그 분 앞에서의 태도가 일그러지고 망가진 세대라는 게 문제다. 우리는 여기서 매우 심각한 도전 하나를 받는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할 때, 우리는 우리 삶 속에 악을 끌어들이게 되고 그것이 가져오는 파괴와 고통에 휘둘리고 만다. 그러면서도 속수무책이 되고 만다. 그것을 당연한 ‘현실’로 생각하게 된다.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너희를 참으리요”

그 동안 예수님은 계속해서 그들과 함께 있으면서 하나님을 향한 그 세대의 믿음을 일깨우시려고 애쓰셨다. 그러나, 이 세대는 여전하다. 그저 이적을 구경하며 놀라고만 있을 뿐 그것을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연결시키지 못하고 있다. 이제 예수님께서 함께 계시면서 직접 그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직접 함께 하시면서 직접 해결자가 되어주시지 않을 때에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그 일을 대신해야 한다. 그런데, 아직도 그 세대 안에는 그런 믿음이 발견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 아이를 불쌍히 여기신 예수님께서는 그 세대를 꾸짖듯이 귀신을 꾸짖으시고 내어쫓아주신다. 바라던 구원을 허락해 주신다. 구원은 믿음이 일으키는 사건이지만 그 이전에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이 더 직접적인 원인이 되는 사건이다. 구원은 그 분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기 때문에 견딜 수 없는 마음으로 베푸시는 은혜다. 

“이 말을 너희 귀에 담아두라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우리라”

아이를 고치시는 것을 보고 놀라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다시 자신의 고난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그 때는 놀라기만 할 때가 아니었다. 예수님께서 떠나시는 것을, 그래서 더 이상 자신들과 함께 있을 수 없게 되는 상황을 준비해야만 하는 때였다. 이제는 믿음을 준비해야 할 때였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더 놀라게 되고 절망하게 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제자 중에서 누가 크냐 하는 변론이 일어나니”

믿음이 없으면 자기에게 집중하게 된다. 내가 얼마나 크고 얼마나 큰 힘을 가지고 있느냐, 그러한 나의 힘은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얼마나 크냐.... 이런 것들 때문에 싸우게 된다. 이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하나님이 없는 사람에게는 자기 자신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아직 제자들에게는 믿음이 없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이 전부였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수난에 대해서 말씀하시며, 그렇게 당신의 부재상황을 준비하라고 하시지만 그 말씀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 말씀의 심각성과 무게와는 정반대의 가장 경박하고 불신앙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너희 모든 사람 중에서 가장 작은 그 이가 가장 큰 자니라”

누가 가장 큰 자인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영접하는 자이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접해 드리는 사람이 하나님께 가장 큰 사람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접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중간 내용은 건너뛰고 말한다면 바로 “누구든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것”을 통해 가능하다. 당시 어린 아이는 실제로 사람취급을 받지 못했다. 어린아이는 영접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래서 어린아이를 영접한다는 말은 그 당시에는 상식적인 말이 아니었다. 상식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들지만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 분 때문에, 그 분의 이름 안에서 어린아이를 영접해야 한다. 그 분은 하나님이셨지만 인간이 되셨고 기꺼이 사람들을, 죄인들마저도 영접하셨다. 그렇게 낮아지셨다. 그래서 그 분의 이름은 가장 크게 높임을 받으신 분이시다. 그래서 진정으로 높아지려면 그 분이 가신 길을 가야한다. 그렇게 스스로 낮아져서 낮은 자를 영접해야 한다.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이가 큰 자니라”

진정으로 높아지려고 하는 자가 알아야 할 사실이 이것이다 “가장 작은 사람이 가장 큰 사람이다” 왜 그럴까? 이 말씀은 가장 낮아져야 가장 높아진다는 말씀과는 다른 의미를 가진다. 가장 작은 자가 가장 큰 자가 되는 이유는 그 가장 작은 자가 바로 모든 사람의 크기를 결정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가장 작은 자를 향한 우리의 태도를 보고 그 분 앞에서의 우리의 크기를 결정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니 그는 그 누구보다도 큰 자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가장 작은 자를 가장 크게 여길 줄 아는 사람이야 말로 자신을 높이게 되는 것이다. 진실로, 그리고 영원히 높아지고 커지기를 원하는 사람은 이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요한이 작은 자를 대하는 태도를 통해 큰 자가 되는 이치를 가르쳐 주셨더니 요한은 제자들과 함께하지 않은 자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쫓는 것을 금하였다고 보고했다. 이것은 요한이 아직도 ‘불신앙’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고, 뜻을 알았을지는 모르지만 결코 거기 순종하지 못했다. 요한의 이야기 속에는 아직도 자신들을 자신들이 생각하기에 작은 자라고 여겨지는 자들과는 함께 할 수 없는 큰 자라는 특권의식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극명하게 드러내 준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와 함께 따르지 않으므로...”

제자들은 예수님의 선택을 받고 예수님을 따르는 일을 ‘독점적인 권력’으로 이해했다. 물론 그것은 특권이었다. 누구나 누릴 수 없는 특권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 특권 밖에 있는 사람들을 제외시키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 특권은 받을 자격이 없는 자가 받은 정말 최고의 은혜였다. 그 은혜를 안다면 그 앞에서 자신을 낮출 수 밖에 없는 그런 종류의 특권이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작은 자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했다. 그렇지만 그들은 그런 식으로 움직여 가지 않았다. 그들은 그것을 자기들만의 권력으로 이해했고, 그것으로 자신들의 ‘크기’를 부풀렸다. 그래서 ‘큰 자’가 되었으며 그 큰 자의 지위를 누리기 위해서 ‘작은 자’로 여겨지는 제자들과 함께 하지 않는 자들을 금지시켰다. 그렇게 은혜를 권력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우리가 누리는 은혜 중에서 우리가 받을 자격이 있어서 받아 누리는 것은 하나도 없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귀신들린 세대’같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베푸시는 긍휼의 은혜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원 안’의 사람들이 되려고 애쓰며, 그 원 안에 들어가서는 높은 자로서의 권력을 누리려고 애쓴다. 그것이 하늘에서는 가장 작은 자가 되는 지름길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일까? 자신을 높이는 길이 아니라 영원히 낮추는 길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일까? 

“금하지 말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

금해서는 안된다. 누군가 우리의 원 안에 들어와 우리처럼 되는 일을 금해서는 안된다. 그것을 금하려고 할 때, 우리는 원 안에 있는 은혜를 권력으로 만들고자 하는 유혹에 넘어가게 된다. 그러면 우리는 그 순간 가장 작은 자가 되고 만다. 그것도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말이다. 금하지 말고 ‘영접’해야 한다. 그 작은 자들을 ‘영접’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그 원을 좁히지 말고 넓혀야 한다. 그 일은 우리가 스스로를 낮추고 낮고 작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을 기꺼이 영접하는 일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이다. 

‘귀신들린 세대’, ‘믿음이 없는 뒤틀린 세대’는 하나님이 없는 세대이기 때문이 자기 밖에 모르는 세대이다. 그러니 더 커지려고만 하고 자신의 크기를 지키기 위해서 원을 닫아버린다. 그런데, 그 순간 그 원은 은혜가 아니라 악(귀신)으로 돌변해 버린다. 그 때부터 그 원 안에 있음은 그들을 큰 자가 아니라 작은 자, 가장 작은 자로 만들기 시작한다. 그렇게 그 귀신(망령)에 사로잡혀 그 귀신에 휘둘리고 만다. 높은 자라는 착각이 주는 거짓 만족 속에서 자신이 망가져 가는 것도 모르고 말이다. 

때로 우리에게는 힘도 주어지고 특권도 주어질 때가 있다. 원하든 원치않든 ‘원 안’에 들어갈 때가 있다. 현실 속에서는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그 때 나의 크기를 크게 하기 위해서 낮은 자를 제외시키고 나의 크기를 고정시키기 위해서 원을 닫지 말자. 그 때 ‘작은 자’를 보자. 그 ‘작은 자’를 우리의 시금석으로 삼자. 내가 진정 큰 자가 되고 있는지, 아니면 더욱 작아지고 있는지를 판단하는 시금석 말이다. ‘작은 자’가 가장 큰 자다. 가장 작은 자가 하늘에서 나의 영원한 크기를 결정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우리는 귀신들린 세대, 믿음 없는 뒤틀린 세대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오히려 믿음보다는 세속적인 기준으로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나 밖에 모릅니다. 나 밖에 없는 삶을 살면서 나의 크기를 부풀리고 그 크기를 고정시키기 위해서 버둥거릴 때가 많습니다. 용서해 주시고 더 이상 그 길로 치닫지 않게 해 주시옵소서. 그 ‘귀신’에 휘둘리지 않게 하소서. ‘불신앙’에 휘둘리지 않게 하소서. 우리의 눈이 내가 아니라 작은 자를 향하게 해 주시옵시고, 나의 크기를 그 작은 자를 크게 해 주는 일에 사용하게 해 주시옵소서. 그래서 하늘에서 큰 자, 하나님 보시기에 영원히 큰 자로 살게 해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