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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성경 묵상

2012.02.19. 매일성경 묵상

    오늘 본문은 누가복음 10장 1-16절입니다. 
    ‘전도실습’이 12명(9:1-6)에서 70명으로 확대된다. 그러나 지침과 원리는 같다. 이 실습은 단지 전도를 위한 실습이 아니라, 앞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고 살아감에 있어서 어떤 삶의 형식을 취해야 하는지에 대한 실습이다.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이것이 전도실습을 나가는 70명에게 첫번째로 하신 말씀이라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요약하면 기도하라고 하신 것이고, 그 기도의 내용은 부족한 일꾼을 채워달라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일꾼들은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항상 일꾼을 더 보내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그렇게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이 부족함 없이 채워질 것을 기도하며 그 일을 해야 한다. 이러한 기도는 현실적인 부족함을 채워달라는 기도도 되겠지만, 자신의 사역으로는 충분치 못하다는 겸손한 인식과 ‘추수할 것’은 항상 더 많다는 긴급함에 대한 인식을 갖게 해 준다. 아무리 ‘위대하게’(세상에 위대하게 일하는 사람이 있겠냐마는...) 일한다고 해도 나는 그 일부분만을 감당할 뿐이다. 나로는 부족하다. 충분치 못하다. ‘우리’로도 충분치 못하다. 우리는 항상 우리의 부족함과 부분적임을 생각하며 나머지 ‘대부분’을 채워 줄 다른 일꾼들을 요청해야 한다. 

“갈지어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주님은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낸다. ‘이리 가운데 어린 양.’ 이것은 이 세상에 계실 때 예수님의 모습이다. 제자는 스승과 같은 양식으로 세상에 존재하게 마련이다. 제자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려면 그래야 한다. 예수님을 따르는 예수님의 제자는 자신이 ‘양’으로 존재하고 또 살아가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4절부터 8절까지 이어지는 내용이 이 말씀 바로 뒤에 나온다는 것은 그것이 바로 이리같은 이 세상에서 양으로 살아가는 구체적인 모습과 지침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구체적인 내용은 12제자의 경우와 겹치니 생략하기로 한다. 다만 여기서는 이것이 ‘양’으로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라는 것만을 염두에 두자. 양과 이리는 삶의 양식이 다르다. 이리는 독립적이다. 그래서 자신이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하며,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필요를 모두 채워야 한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힘’을 사용하는 것이며, 그 힘으로 자기보다 약한 것들의 ‘생명’을 해치며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은 그들의 생존방식이 ‘악’에 의존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혼자 힘으로 살아남고 또 살아가려면 악에 의존하는 수 밖에 없다. 다른 자원이 없으니 힘을 축적하고 그 축적한 힘으로 자신이 필요한 것을 투쟁을 통해 얻으며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리들의 탐욕은 불안함과 두려움에서 나오는 것이다. 언젠가 자기 힘이 약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함, 그러면 더 이상 그 힘을 통해 필요를 채우는 일이 불가능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그 때가 되면 자기보다 ‘힘센 놈’이 이전에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을 헤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말이다. 그러나 양들은 독립적이지 않다. 사실 양들은 약해서 그렇지 양들에게는 걱정이 없다.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필요를 채워야 할 절박함이 없으니 걱정이 없다. 단지 잠깐의 부족함과 배고픔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것도 목자가 다시 채워줄 것이다. 양들은 경험으로 그것을 잘 안다. 두려움도 마찬가지다. 자기 힘으로 자기 안전을 책임질 필요가 없다. 그렇다는 것은 자기 것을 지키려고 바둥거릴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다. 항상 목자가 안전을 지켜주고 필요를 채워주니까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 사실 그냥 목자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는 이러한 불안함과 두려움이 해결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목자가 어떤 목자냐 하는 것이다. 제자라고 불리는 양들의 목자는 전지하시고 전능하신 그들의 아버지이시다. 모든 필요를 아시고, 그 필요를 가장 적절한 시기에 채워주실 능력이 있는 하나님이, 그들을 자녀로 사랑하시는 아버지가 그들의 목자다. 그 아버지와 동등하신 성자 하나님이 그들의 목자다. 그러니 무슨 불안함과 두려움이 있겠는가? 물론 문제는 있다. 그 목자는 보이지 않는 분이시니 우리에게는 우리의 목자를 그런 분으로 믿는 ‘믿음과 신뢰’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믿음이 없다면 하나님의 양이 되어서 그 분을 목자삼고 살아가는 이러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전도실습을 보내신 것은 사실 전도라는 ‘일’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이렇게 양으로 사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며 또 풍성하고 능력있기까지 하다는 것을 몸으로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주시기 위해서 였다. 살아보지 않으면 절대로 알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은 모두가 다 이리로 살아가는 세상에서 양으로 살아가는 일이 충분히 가능하며 또 풍성하기까지 하다는 사실이다. 삶의 양식은 삶으로 경험함으로써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70명을 그렇게 보내신 것이다. 이리가운데 양으로 사는 것이 결코 고통스럽거나 어렵기만 한 것이 아니라는 ‘믿음의 실재’를 생생하게 배우라고 말이다. 그 배움이 이후의 제자로서의 삶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 하라 만일 평안을 받을 사람이 거기 있으면 너희 빈 평안이 그에게 머물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어디 가든지 평안을 빌어야 한다. 이리가 아니라 양이니 싸워서는 안된다. 양임을 인식하면 싸우지 않게 된다. 내 필요를 내가 채울 필요가 없고, 내 자리를 내가 차지해야 할 필요가 없으니 싸우지 않게 된다. 심지어는 복음을 전한 후에, 그것의 열매를 내가 거둬야 할 필요도 없어진다. 그것을 위해서 애는 쓰지만 집착할 필요가 없다. 

“그 집에 유하며 주는 것을 먹고 마시라 일꾼이 그 삯을 얻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 집 저 집으로 옮기지 말라”

이것이 ‘양’이며 ‘일꾼’인 제자들이 취해야할 삶의 방식을 대변해 준다. 일꾼의 필요를 사람들이 채우지만 그것은 사람들이 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주인이신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다. 그러니 기죽고 비굴해질 필요가 없다. 그저 주어지는 것으로 살아가면서 맡겨진 일을 감당하면 된다. 그리고, 부족하다고 이 집에 가고 더 얻으려고 저 집으로 가서도 안된다. 그런 ‘동가식 서가숙’은 하나님이 공급해 주시고 채워주심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 하라”... “그러나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라하라” 

“하나님 나라가 이미 너희 가까이에 와 있다” 이것은 사람들이 제자들을 받아들이나 거부하나 상관없이 언제나 전해져야 할 소식이다. 이 소식은 모두에게 필요하다. 한 쪽은 그 하늘나라를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서, 한 쪽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퍅한 마음으로 그 나라를 거부하고 있음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말이다.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세다야...”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하늘나라를 거부한 사람들에게 저주와 경고를 퍼 부으신다. 그러나 알아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이 저주와 경고를 하는 일은 우리가 아니라 주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는 것이다. 복음 앞에서 사람들이 스스로를 높인다고 해서, 그것에 마음이 흔들려서는 안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실 일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낮추실 것이다. 또 우리는 이 저주와 경고를 단정지어 생각해서는 안된다. 이 저주와 경고가 그대로 이루어질지 오히려 그것이 그들이 회개하고 돌이키는 이유가 될지 우리로서는 알 길이 없기 때문이다.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 나를 저버리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저버리는 것이니라” 

복음을 전하고, 복음이 지시하는 삶을 살아갈 때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진리가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아니다. 우리의 말은 우리의 말이 아니다. 우리를 거부하든 우리 말을 거부하든 엄밀하게 말해 우리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진리를 말하는 자, 진리를 살아가는 자들이 반드시 기억해야 하고 잊지 말아야 할 그 일에 대한 진리, 그렇게 잊지 않을 때 우리를 견고하고 여유있게 할 진리가 바로 이것이다. 물론 우리는 내가 진실로 주님이 지시하신 그런 삶을 살고 있는지, 정말 겸손하게 그 분의 말씀을 전하고 있는지를 면밀하게 ‘조사’해야 한다. 스스로를 검증할 양심과 분별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복음적인 삶을 사는 것이 틀림 없을 때,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전하는 것이 복음일 때 그 때는 그로 인한 반응에서 자유로워야 한다. 심지어는 긍정적인 반응도 마찬가지다. 나를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며 내 메세지에 열광하더라도 그건 나에게 열광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그로 인해 그 메시지를 전하는 나도 더불어 환영과 사랑을 받는 일은 말할 수 없는 복이며 은혜다. 그러나, 그것은 항상 엄밀하게 나와 구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항상 우리의 삶과 메세지를 환영받고 대접받는 방식이 되게 하고 싶은 유혹을 당할 것이고, 우리는 그 시험에 걸려 넘어지게 될 것이다. 철저히 스스로를 일꾼으로 인식하면서 겸손하게 양처럼 의존적인 삶을 살아가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참된 제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자유롭고 풍성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일꾼과 양. 이 이중의 정체성이 바로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의 자기 인식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양의 삶의 방식을 가지고 양으로 살아가야 하는 이리 가운데 거하는 하나님의 일꾼들임을 잊지 말게 해 주시옵소서. 양으로 살아서 양다운 삶의 방식만이 가져올 수 있는 풍성함과 든든함을 알게 하시고 하나님이 일꾼으로서 일꾼만이 알 수 있는 자유 가운데 일하게 해 주시옵소서. 항상 삶과 일 속에서 ‘나’에 집착하지 않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께 집중하게 해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