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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성경 묵상

2012.02.20. 매일성경 묵상

      오늘 본문은 10장 17-24절입니다. 
     
      실습나갔던 칠십 명의 제자들이 돌아왔다. 그들을 흥분해 있었다.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사실이었다. 주님의 이름으로 사역했을 때, 정말 귀신들도 제자들에게 항복했다. 그런 일은 이전에는 없었던 일들이었다. 이전에 귀신은 두려움의 대상이었지 감히 대적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역했을 때, 그 귀신들이 오히려 제자들에게 항복하는 일이 일어났던 것이다. 제자들이 흥분해서 무의식적으로 말한 것이지만 이 짧은 한 마디 속에는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이 결코 잊어서는 안되는 ‘능력있는 사역’의 원리가 들어 있다. “주의 이름으로...” 이것이 모든 사역자들이 항상 기억하고 그 안에 머물러야 하는 능력있는 사역의 원리이다. 물론 “주의 이름으로....”라는 말의 의미는 그저 입으로 주님의 이름을 외치라는 것이 아니다.(아, 물론 그렇게 해도 때로는 많은 능력이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엄밀하게 그리 좋은 일은 아닌 것 같다. 거기에는 그리스도에 대한 인격적인 헌신과 의존이 없으니까 말이다) 이 말은 모든 사역이 언제나 그리스도께 의존되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우리는 “주님을 위하여!” 일한다. 그런데 이 구호에 흥분하는 만큼 “주님께 의지하여!”라는 원리는 많이 생각하지 못하도 또 그렇게 하려고 애쓰지도 않는것 같다. 언제 하나님께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받으실까? 우리가 큰 일을 할 때? 큰 성과를 남길 때? 우리 생각에는 그럴 것 같은데 전혀 그렇지가 않다. 주님은 우리가 주님 한 분만으로 충분함을 진실로 깨닫고 거기만 의지하여 살고 또 일할 때, 그런 삶의 태도를 통해서 가장 큰 영광을 받으신다. 거듭 말하거니와 그것만큼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온전하게 인정해 드리는 일은 없으니까 말이다. “주의 이름으로...”라는 말은 그래서 “주님 한 분만으로 모든 일에 충분함을 믿고 의지하며...”라는 뜻이다. 칠십명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했을 때, 그 때 악령조차도 그들에게 굴복했다. 우리 삶에서도 이런 일들이 일어나기를 진심으로 간구한다. 우리가 그 분 한 분만으로 충분하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그래서 그 분께만 의지하고 살아갈 때, 그 때 우리 앞에 귀신까지도 무릎을 꿇게 되는 이런 일들이 이 곳 저 곳에서 일어나게 되기를 소원하며 기도드린다.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이것이 제자들의 사역에 대한 예수님의 ‘해석’이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굴복시켰을 때, 그 때 사단은 하늘에서 번개같이 떨어져 내렸다. 사단은 원래 ‘공중의 권세 잡은 자’라고 불린다. 그런 그가 하늘, 그러니까 공중에서 떨어져 내렸다. 이것은 그가 그 권력을 상실했고 영향력을 잃어버리는 사건이 일어났다는 뜻이다. 그는 왕자에서 내려올 수 밖에 없었다. 언제? 제자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했을 때이다.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그러나, 그 모든 능력은 원래 제자들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들에게 ‘부여된 것’이었고, ‘위임된 것’이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주어진 것이었다. 이것은 제자들이 항상 기억해야만 하는 ‘능력의 원리’였다. 자신에게는 아무런 능력이 없으나 그리스도께 의지할 때 그 분의 능력이 그 분의 이름으로 자신들과 함께 한다. 무슨 능력을 행하든, 얼마나 놀라운 일을 경험하든 그 모든 것은 스스로가 일으킨 일들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또 그래서 스스로의 힘으로 하려고 해서도 안된다. 그럴 때, 우리는 더 이상 ‘그 분의 이름’ 안에 머물지 못하고 그 밖으로 벗어나 또다시 자신의 힘에 의지하는 ‘사탄적인 삶의 양식’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다. 그러면 능력도 줄어들 뿐더러 교만해 질 수 밖에 없고, 주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도 실제적인 존재와 삶은 정반대 방향으로 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그러나” 정작 기뻐해야 할 이유는 그들이 귀신을 내쫓고 기적을 행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해야 한다. 그것이 주님의 충고였다. 실제로 그 모든 일들이 일어날 수 있었던 이유는 이미 그들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하늘에 속하 사람들이기에 그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가는 곳마다 거기에 하늘나라가 그 모습과 능력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주님이 주시고자 하신 기쁨은 바로 이런 기쁨이다. 이 땅에서 무언가 보이는 일이 일어나고 그 일을 일으키는 당사자가 되고... 이런 경험되는 놀라움으로 인한 기쁨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자의 기쁨을 주시려고 하셨다. 현상에 집착하고 또 매료되다 보면 그 근원을 놓치기가 쉽다. 그런데, 그 근원을 놓치면 결국 그 현상마저도 희미해 지고, 그러면 사람들은 그 현상을 유지하려고 무리수를 두게 된다. 이것이 ‘은혜지상주의’라고 불리는 것이 보이는 폐해다. 은혜의 근원을 찾기 보다는 ‘은혜’라는 실제로는 ‘은혜스러운 느낌’을 준다고 여겨지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가리지 않고 붙드는 행태가 생겨나는 것이다. 모든 좋은 것의 근원은 하늘에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 있다. 우리가 진실로 하늘에 속해 있고 하나님과 온전히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면, 그것을 묵상하고 경험하며 더욱 풍성하게 해 나간다면 때로 현상이 나타나지 않아도 불안해 하거나 무리수를 두지 않게 된다.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는 정말 엄청나게 놀라운 것이고 선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보다 우리를 더욱 더 기쁘게 해야 할 것은 우리가 하늘에 속한 사람이라는 것, 하나님께서 우리 아버지라는 사실이다. 나는 지금 무엇으로 기뻐하고 있는가? 하늘에 속한,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기쁨이 가장 큰 기쁨이 아니라면 우리는 그 기쁨을 회복해야 한다. 그것이 다른 것은 차치하더라도 가장 크고 지속적인 기쁨을 얻는 방법이니까.

“이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사”

예수님께서도 성령 안에서, 성령님께서 주시는 기쁨을 누리셨다. 우리는 이것이 우리 기쁨의 또 하나의 원형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기쁨을 누리고자 한다면 성령님 안에 거해야 하며, 성령충만해야 한다. 성령충만함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해야한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성령충만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그 분의 약속이므로 그 약속은 분명히 이루어질 것이다. 이 약속은 믿는 자 모두에게 열려진 약속이다. 그러니, 충분히 ‘성령충만해야 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성령충만을 위해서 기도하며 열망하자. 그 분의 영으로 우리 존재와 삶이 가득 채워지기를 간구하자. 그 분의 약속이니 그 분이 분명 들어주실 것이다. 그러면 그 때가 되면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누리셨던 기쁨이 무엇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귀신이 제자들에게 굴복한 사건, 그리고 제자들이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된 것은 모두가 다 하나님께서 ‘천지의 주재’이시기 때문이다. 그 분이 온 세상을 소유하고 계시며, 그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그런데 ‘이것’이 무엇일까? 갑자기 등장한 이 단어는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한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셨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셨다고 말씀하시며 그것을 감사하고 계신다. 그렇다면 ‘이것’이 무엇인지 어린아이들은 알고 있다는 뜻이다. 어린아이들이라면 이 수수께끼의 정답을 알고 있다는 뜻이 된다. 그리고 어린아이가 아니라면 알 수가 없다는 뜻이 된다. 그렇다면 어린아이가 누구일까? 우리는 복음서를 통해 어린이이와 관련한 많은 이야기를 만나게 된다. 어린아이들은 그 이야기들 속에서 항상 하늘나라의 주인공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리고 어린아이들은 작은 자, 힘없는 자, 하늘나라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며 기뻐하는 자, 그리고 전적으로 하나님에 대해서 의존적인 사람들을 대표하는 존재다. 이제 ‘이것’이 무엇인지 드러난다. ‘이것’은 바로 ‘하늘나라’다. ‘하늘나라의 복’이며, 그 나라가 이 땅에서 일으키는 일들이다. 본문에서는 칠십명의 제자들이 바로 ‘어린아이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결코 자신의 힘을 의지하지 않았다. 그저 예수님의 이름을 의지했다. 이미 주어진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 이름을 의지하여 일했다. 그 결과 그들이 가는 곳에는 ‘하늘나라’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하늘나라의 능력, 기쁨, 회복이 확실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그들이 하늘에 속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들(어린아이들)이기 때문에 ‘나타난’ 일이었다. 그들이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복을 누리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들이었다. 그렇다면 ‘이것’이란 하늘나라다. 이 땅 위에 드러나기 시작한 하늘나라이며, 그 나라에 속하는 복이다. ‘이것’은 지혜롭고 슬기있는자(진짜로는 그저 자신을 그렇게 생각하며, 그래서 자신의 지혜와 슬기에 의존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말한다)들에게는 나타나고 알려질 수가 없다. 그들은 그렇게 겸손하고 절대적으로 하늘나라를 환영하고 의존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것’은 그 반대편의 사람들, 그러니까 ‘어린아이들’에게만 드러나고 알려질 수 밖에 없다. 그런데, 그렇게 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다. 그렇게 된 것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것을 뜻한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성령님 안에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 안에서 그토록 기뻐하고 계신 것이다. 하늘나라를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 숨기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 그 분의 계획이었다. 그리고 그 계획은 완벽하게 성취되었다. 이것은 하늘나라를 하나님만 기뻐하고 하나님만으로 만족하며 하나님만 의지하는 사람들로 채우시기 위한 하나님의 지혜였다. 그 나라에서 그 반대편의 사람들, 그러니까 자신을 의지하고 자신을 믿으며, 자기 힘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그렇게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을 제외시키시 위한 하나님의 지혜였던 것이다. 하늘나라가 은혜의 나라인 이유는 그 나라가 아무에게나 열려져 있는 만만한 나라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은혜에 의지하지 않고는 들어갈 수 없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군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군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 

인간의 측면에서 본다면 ‘이 것’의 가치를 알아보고 그것을 전폭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어린아이(혹은 어린아이 같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본다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께 주신 사람들이고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드러내시는 사람들이 된다. 이것이 구원의 신비다. 도대체 어디까지가 사람이 해야할 일들이고 또 어디까지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인지 파악이 되질 않는다. 물론 큰 틀에서 그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다. 어떤 사람이 어른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어른들로 들끓는 이 세상에서 어린아이로 남아있다면 그는 그것만으로도 아주 특별한 은혜를 누리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가 어린아이로 남아있다는 것은 그가 지금까지 어린아이로 남아있는 싸움을 싸웠다는 뜻도 된다.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과 인간이 해야할 일의 경계를 나누는 일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무의미하다. 구원은, 하늘나라를 알고 보며 또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인 동시에 그 은혜에 대한 바른 반응이 만들어 내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백번 양보해서 ‘어린아이’가 되는 것을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고 치더라도, 그 조건자체를 정하신 것 또한 하나님이시며,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을 위해서 그런 조건을 허락하셨다는 것 자체가 정말 기적같은 은혜이기에 구원은 결국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인간의 역할이 있다손 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은혜 안에서의 일이지 은혜와 상관없는 ‘조건(?)’이란 있을 수가 없다. 

“너희의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 듣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

복이다. 복 중에서도 가장 큰 복이다. 하늘나라를 받아들이고 그 나라의 열쇠를 찾게되는 것은 복이라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복이다. 그것은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그들의 모든 영성과 권력으로 보고 또 들으려고 애썼지만 결코 그렇게 확실하게 보고 듣지 못했던 그렇게 보배로운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알고 있는 그리스도가, 내가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는 복음이, 따놓은 당상으로 생각하는 하늘나라가 인간의 노력으로는 결코 들을수도 볼 수도 없었던, 그렇게 귀하고 또 귀한 것이었다. ‘너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었다’는 말씀을 들을 때, 내 속에는 어떤 기쁨과 만족이 있는가? 어린아이같은 기쁨이 있는가? 이 기쁨이, 이 만족이 이것이 아닌 다른 복들을 받았을 때 느껴지는 그것보다 더 작다면 우리는 다시 어린아이로 돌아가야 한다. 그래서 그 복의 복됨을 회복해야 하고, 그래서 그 복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리스도로 인하여 우리 힘으로는 절대로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는 것들을 너무나 쉽게 듣게 하시고, 또 그것의 가치를 알아보고 어린아이처럼 기쁘게 그것을 받아들이게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어른들의 세상에서 어린아이로 살아가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것이 그 어떤 것보다 큰 복인 줄 알게 하시고, 그것을 놓치지 않게 해 주시옵소서. 어린아이의 복을 허락해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