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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성경 묵상

2012.02.21. 매일성경 묵상


오늘 본문은 누가복음 10장 25-42절입니다. 

갑자기 무대가 바뀐다. 그러나 주제는 동일하게 흘러가고 있는 것 같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 던진 질문이다. 질문의 동기도 그렇지만 질문의 내용도 문제다. 이것이 진짜 이 사실을 몰라서 묻는 것이었다면 괜찮았겠지만, 이미 자기 나름대로의 옳다고 여기는 대답을 가지고 있었고, 오히려 예수님께서 그 ‘정답’을 맞추시는지를 보려고 한 질문이었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또한 이 질문은 영생을 위하여 무엇을 ‘하여야’하는지를 묻는 질문이기 때문에 더 문제가 된다. 영생은 선물이지 일해서 얻는 삯이 아니다. 그런데, 당시의 유대교인들은 모두가 다 이 영생의 문제를 무엇을 하고 그 댓가로 얻는 문제로 여겼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시 물으신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질문자가 율법사이니 그의 전문분야를 끌어들이셔서 말씀하신다. 율법사는 율법사 답게 대답한다. 

“네 마음을 다하여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율법사의 대답은 정답이었다. 그는 자기 질문에 대해서 너무나 잘 대답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신다.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행함”에 대한 질문이었으니 “행함”으로 답변하신다. 영생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이미 아는대로 행하면 된다. 마음, 목숨, 힘,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면’ 된다. 그리고 자기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면’ 된다. 그것이 ‘행함’을 통해 영생을 얻는 유일한 길이다. 그 누가 이 두 가지를 완벽하게 행하여서 영생을 얻을 자격을 획득할 수 있을 것인가? 영생의 문제를 ‘행함’과 연결지어 해답을 얻으려고 한다면 그 해답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정해진 답은 있지만 인간에게는 그것을 ‘행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그렇게 인간을 사랑하는 것은 죄인인 인간에게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율법사가 자기가 한 대답을 진실로 이해하고 있었다면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는 아마도 충격을 받고 절망했을 것이다. 그리고 은혜를 구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스스로 ‘영생’이라는 선물에서 멀어진 것이다. 그 이유는 그 다음 구절에 나와있다.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자기 옳음’, 그러니까 ‘자기 의’가 이 사람의 문제였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고 그 옳음을 드러내려고 하는 것. 이것이 이 율법사의 문제였고 그는 여기 걸려 넘어졌다. 그가 이런 문제-그 자신은 그것이 문제라고 생각하지 못했겠지만-를 가지고 있다는 증거는 그가 한 말 속에 이미 들어있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율법사의 질문을 가만히 보자. 무엇이 빠져 있는가? 그가 이미 대답했던 내용 중에서 무엇에 대한 이야기가 빠져있는가? 그렇다. 바로 하나님이다. 그는 하나님에 대해서는 묻고 있지 않다.(물론 이웃에 대한 질문도 제대로 된 질문은 아니었다) 왜 그랬을까? 그는 자신이 하나님을 섬기는데 있어서는 아무런 문제도, 부족함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대해서는 물어볼 일이 아무 것도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그가 이웃사랑에 대해서 무언가 부족함을 느끼고 궁금한 것을 가지고 있었던 것도 아니다. 이웃에 대해서 질문한 이유도 자기 기준에서 이미 그 이웃을 충분히 사랑하고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그는 이웃을 이미 사랑하고 있었다. 아니, 그가 이웃이라고 규정한 사람을 사랑하고 있었다. 우선 죄인은 안된다. 부정한 자도 안된다. 또 이방인도 안된다. 나중에 등장하지만 사마리아인은 더더욱 안된다. 이 사람들을 제외한 ‘이웃’을 그는 이미 충분히 사랑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그렇다면, 그는 왜 이웃이 누구냐고 물었던 것일까? 논리적으로 볼 때, 그는 예수님의 입에서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의 이웃의 정의가 흘러나오기를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나는 이미 이웃을 충분히 사랑하고 있습니다”라고 의기양양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고, 그러면 그는 하나님 뿐 아니라 이웃도 사랑하는, 그래서 영생의 자격을 갖춘 사람으로 여겨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항상 그렇지만 이 세상일은 마음대로 안된다. 게다가 뒤집기의 명수이신 예수님께 걸렸으니, 사람의 생각마저 다 아시는 그 분을 만났으니 그가 상대를 완전히 잘못 고른 셈이었다. 예수님은 대답대신에 이야기 하나를 들려주신다. 바로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다가 강도만난 사람의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는 너무 잘 알려진 이야기이니 요점만 간단히 살펴보자. 이 이야기의 요점은 일반적인 사람의 생각을 뒤집는다. 특히 당시의 유대인들은 누가 ‘내 이웃’의 자격이 있는지에 대해서 굉장히 민감하고 날카로웠다. 그래서 그들은 내가 어떻게 이웃이 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도통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런 식으로 ‘누가 내 이웃이냐?’고 묻는 그 율법사에게 오히려 이웃을 찾지 말고 이웃이 되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니까 내가 사랑해야 할 사람, 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을 갖춘 사람이 아니라 ‘사랑하는(loving)’ 사람이 이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바로 그 이웃이 되라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이 비유 속에는 또 한 종류의 이웃이 등장한다. 그는 바로 어떤 사람을 참 이웃이 되게 해 주는 그런 이웃, 그래서 이 사람이 없으면 결코 그 어떤 사람도 이웃이 될 수 없는 그런 이웃이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율법사 같은 사람들에게는 결코 상황적으로 볼 때 이웃이 될 수 없는 그런 사람이었다. 왜냐하면 비록 강도를 만나기는 했지만 피를 흘리고 있었기 때문이고, 그래서 그에게 접촉해서 그가 필요로 하는 도움을 준다면 그 사람은 정결함을 상실해 버릴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종교적인 정결함을 목숨처럼 생각했고 그것을 유지하는 일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이런 부류의 사람들로서는, 특히 바로 몇 시간 후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야 하는 상황에 있는 이런 부류의 사람들로서는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행하기 위해서 그 ‘이웃’을 모른 채 해야만 했다. 그런데, 여기에 아주 묘한 역설이 존재한다. 원래 제사란 죄를 처리하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법이다.  사람을 더럽힌 죄를 처리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들은 그렇게 죄를 처리하러 가기 위해서, 또 다른 죄를 범한다. 율법이 정한 대로 곤경에 처한, 그것도 죽어가는 사람을 돕지 않고 나몰라라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깨끗한가? 정결한가? 대답할 필요조차 없다. 예식을 위한 정결함을 유지하기 위해서 또 다른 죄를 짓고 있다. 율법을 어김으로써 불순종하고 있다. 그들을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라고 믿었지만 실은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도, 또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도 실패한 것이었다. 실제로 이것은 놀랍게도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이 상식으로 생각하던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식이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그들의 일그러지고 어리석은 하나님 사랑에 대한 사고방식을 들추어 내신 것이었다. 이야기를 마치신 예수님은 이렇게 물으셨다.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이 질문은 이런 질문이었다. “누가 이웃의 이웃이 되어줌으로써 참 이웃이라고 할 수 있느냐? 답은 너무나 명확했다.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당연히 그 강도만난 사람을 돕고 보살펴준 사람, 유대인들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웃의 자격이 없는 사람인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이것은 아마도 율법사가 가장 하기 싫었던 대답이었을 것이다. 그에게 사마리아 사람들이란 이웃이 아니라 ‘개만도 못한 존재’였으니까 말이다. 그런 사마리아인을 지칭해서 그가 참 이웃이라고 말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한 율법사는 얼마나 화가 났었을까? 그래서 이렇게 말한다. 

“자비를 배푼 자니이다.”

율법사는 절대로 사마리아인이 이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도저히 그렇게 말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애써 둘러댄다. “자비를 배푼 자”라고. 그런데, 주님은 거기다 이렇게 덧붙이신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자비를 배푼 자가 이웃이라고? 사마리아인이 이웃이라고? 그러면 그 사마리아 사람처럼 해라. 이것이 예수님의 말씀의 진의였다. 참된 이웃이 누구인지 알고 싶고, 참된 이웃이 되기를 원한다면 비록 그가 사마리아인이라고 하더라도 그를 본받아야 한다. 이것은 이웃됨은 결코 외부적이 조건에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사마리아인도 참 이웃이 될 수 있지만, 제사장일지라도 참 이웃이 될 수 없기도 하다. 참 이웃의 자격은 이웃이 되어주어야만 하는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말이다. 그렇게 했을 때, 진실로 그가 의로운(옳은)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을 뿐이니까 말이다. 

이 이야기는 전체적으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가르치신 것이다. 그 사마리아 사람이야말로 누가 나의 이웃이 될 자격이 있는가를 생각하지 않았고, 그저 이웃이 되어 주어야 할 사람의 필요를, 제 몸처럼 생각하고 채워줌으로써 사랑한 사람이었다.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의 의미에 대해서 이런 저런 궤변에 가까운 주장들이 있지만 그 해답은 바로 이 비유 속에 다 들어있다. 이 이야기야 말로 그 계명의 반쪽에 대한 가장 완벽한 설명인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율법을 만드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니까.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는 위의 이야기와는 조금 다른 주제를 가지고 있으므로 오늘은 생략하겠다. 다만 분명히 해 두어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마르다를 나무라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 묵상하고 해석하는 것은 각자의 몫으로 남겨둔다. 


하나님, 스스로 옳지 않게 하소서. 스스로 의롭지 않게 하소서. 항상 ‘마음과 목숨, 힘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기준, 또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기준에 비하면 우리의 사랑은 한없이 초라하며, 또 때로는 이 사랑을 위하여 저 사랑을 포기할 수 밖에 없는 불완전한 것임을 생각하며 항상 주님 앞에 부족한 자로 서게 해 주시옵소서. 우리의 이웃이 되어주신 주님에 비한다면 우리의 이웃됨은 언제나 불의하고 자기 중심적임을 잊지않게 해 주시옵소서. 그 어떤 순간에도 영생을 위하여 “무엇을 하여야...”라고 묻지 않게 하시고, 그 엄청난 선물을 그저 받아들이며 기뻐하게 해 주시옵소서. 그 어떤 것보다도 내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어 있는 그것으로 기뻐하는 사람들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 추신 : 늦어서 죄송합니다. 이것도 매일하기가 굉장히 힘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