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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성경 묵상

2012.02.25. 매일성경 묵상

    오늘 본문은 마가복음 11장 37-44절입니다. 

    “잡수시기 전에 손 씻지 아니하심을 이 바리새인이 보고 이상히 여기는지라”

예수님께서는 ‘장로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으셨다. 왜 그러셨을까? 율법을 이루러 오신 분이 왜 장로들의 전통을 지키지 않으셨을까? 깜빡하신걸까? 그렇지 않다. 정황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일부러 그러신 것 같다. 그러니까 일부러 바리새인들의 마음에 의구심을 일으키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던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의 그런 행동을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은 정작 이상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있었다. 주님은 그것을 들추어 내시고 또 바로잡아 주시기 위해서 일부러 그 일을 행하신 것이었다.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인즉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어리석은 자들아 밖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손은 왜 닦는가? 그 관습은 왜 생겼는가? 그것은 혹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이 부정해 졌다면 그것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 손으로 음식을 먹어서 몸이 부정해 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그런데, 그 부정함이란 본질적으로 어떤 부정함을 말하는가? 그것은 속의 부정함이다. 하나님께서 형식적이고 외형적인 정결함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은 실은 속사람의 정결함이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시기 위해서 였다. 그런데, 시간이 흐려면서 모든 것은 그저 형식이 되고 외형이 되고 말았다. 외형적으로 정해진 행위만 한다면 속사람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하지 않았다. 그것으로 할 일을 다 했다고 여기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문제삼는 것은 외적이고 형식적인 정결함을 위해서 정해진 일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하는 것 밖에 없었다. 그릇을  씻고 손을 씻고... 물론 훌륭한 노력이지만 그런 노력들은 속사람도 그런 그릇들처럼 깨끗하게 해야한다는 것을 깨닫고, 주님 앞에서 그것을 위한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가치도 소용도 없는 것이다. 그릇은 씻었다. 그렇지만 마음 속에 있는 탐욕과 악독(사악함, 이것은 그 탐욕을 이루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선택하는 악을 말한다)은 그대로 두었다. 그러면서도 아무런 문제를 느끼지 못했다. 그것이 바리새인들, 그리고 바리새인을 닮은 행습을 가진 사람들의 문제였다. 

“어리석은 자들아 밖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밖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드셨다. 형식을 만드신 이는 내용도 만드셨고, 몸을 만드신 이는 속사람도 만드신 분이시다. 그 분이 무엇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실까? 둘 다 만드신 분이시라면 밖을, 형식을, 몸을 문제삼으실 때, 단지 그것만 문제 삼으실까? 그것만 중요하게 생각하실까? 그렇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바보다.’ 어리석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밖을, 형식을, 그리고 몸을 중요하게 생각하시고 그것을 깨끗이 하라고 말씀하셨다면 그 분은 속을, 내용을, 그리고 속사람은 더더욱 그러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그것을 알아듣지 못한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오직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

주님은 일견 알쏭달쏭한 말씀을 하신다.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 안에 있는 것이 무엇인가? ‘탐욕과 악독’이다. 그러면 주님은 그것으로 구제를 명하신 것인가? ‘탐욕과 악독’은 주로 소유때문에 생겨난다. 더 많이, 더 빨리 소유하고 쌓아놓기 위해서 탐욕을 부리고 악독을 행한다. 이것을 해결하는 방법은 이것의 방향을 자기 속이 아니라 자기 밖을 향하게 하는 것 밖에 없다. 쌓아놓는 것이 아니라 흩어버리는 일을 통해서 우리 주님의 어법으로 한다면 보물을 땅이 아니라 하늘에 쌓아놓는 일을 통해서 해결할 수 있다. 이것이 속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는 방법이다. 그런데, 주님은 그런 구제, 안을 향한 쌓아놓음이 아니라 바깥을 향한 쌓아놓음, 하늘에 쌓아놓음만이 ‘모든 것’을 깨끗하게 하는 방법이라고 말씀하신다. 자기를 위해 쌓아놓을 때, 그 모든 쌓아놓은 것들은 내 속사람을 탐욕과 악독으로 더럽힌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그렇게 쌓아놓으려면 결국 탐욕과 악독에 손을 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이들을 위해서 ‘구제’하고, 하늘에 쌓아놓음은 그 ‘모든 것’이 우리 속에 있는 죄를 자극하여 그것이 우리를 더럽히지 못하게 하는 방법이다.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아니하여야 하리라”

사람들은 형식과 본질 중에서 자꾸 본질만을 중요하게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다. 또 정반대로 형식만 갖추면 내용은 저절로 보장되는 것처럼 생각하기도 한다. 바리새인들은 뒤쪽에 해당될 것이다. 둘 다 건전하고 올바른 것은 아니다. 형식은 내용을 담는 그릇이므로 그 형식이 완전히 사라지게 되면 그 안에만 담길 수 있는 내용 또한 사라지거나 혹은 심각한 손상을 입게 되기 때문에, 적어도 인간에게는 형식이 반드시 필요하다. 주님은 형식만 갖추면 된다고 생각하는 바리새인들에게 그러한 형식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진실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일깨워 주신다. 그러나 주님은 내용만을 취하고 형식은 무시해도 좋다고 말씀하시지 않는다. 둘 다 중요하고 둘 다 버리거나 포기해서는 안된다고 말씀하신다. 우리 신앙은 본질적으로는 속사람의 문제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변화되고 온전해진 속사람이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는 없다. 그것은 그 변화된 본질을 담을 수 있는 적절한 그릇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십일조도 반드시 드려야 하고, 공의와 하나님을 향한 사랑도 반드시 거기 들어가 있어야 한다. 이 두 가지는 선택의 문제가 전혀 아니다. 둘 중의 어떤 것이라도 그것 하나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오류에 빠져서는 안될 것이다.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기뻐하는도다”

자기 높아짐의 본능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반드시 싸워야 하고 또 처리해 나가야 할 악덕이다. 누군가가 높여주고, 누군가의 대접을 받는 일은 교만한 인간에게는 무척이나 즐거운 일이다. 그러나, 그 즐거움은 그 사람을 살리고 또 온전하게 하는 즐거움이 아니라 그 존재를 망가뜨리는 그런 즐거움이다. 바리새인이라는 형식이, 남들보다 율법에 정통하고, 그 율법을 지키는 일에 열심이고 또 유리한 위치에 있다는 것은 자기 높임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더 온전히 하나님을 섬기기에 유리한 위치이며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신 특별한 선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도구가 인간을 높이기 위한 도구가 되어질 때, 아무리 선하고 거룩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가장 불경건한 것이 될 수 밖에 없고, 그러면 그런 일에 열심일수록 오히려 그 사람은 하나님과 점점 더 멀어질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지금 내가 지금 누리는 기쁨이 어떤 기쁨인지 점검해야 한다. 혹시 어떤 신앙적이고 종교적인 이유 때문에 ‘문안받고 인사받는 것’이 가져다 주는 기쁨이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만약 그런 기쁨이라면 오히려 나에게는 ‘화가 되는’ 기쁨이 될테니까 말이다. 

“화 있을진저 너희여 너희는 평토장한 무덤 같아서 그 위를 밟는 사람이 알지 못하느니라” 

이것이 형식만 갖추면, 그래서 사람들만 모르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경고다. 평토장한 무덤... 아무리 다지고 또 다져도 그 속에는 시체만이 들어있을 뿐이다. 생명이 아니라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 사람은 세상에서 살아갈 때 그 속에 무언가를 계속해서 담으면서 살아간다. 다른 사람들은 결코 그가 속에 무엇을 담으면서 살아가는지 모르니 그의 실체를 모를 수 밖에 없고, 사람들은 그렇게 들키지 않으면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속에 담긴 생명이 아닌 죽음은 어쩌랴. 그 죽음은 여전히 죽음이고 생명이 아니다. 그래서 언젠가 그 죽음이 자라나고 열매로 나타날 때 그는 생명이 아닌 죽음을 열매로 거두어 드릴 수 밖에 없다. 굳이 하나님께서 그들을 저주할 필요가 없다. 그냥 내버려 두어도 그는 그 죽음을 열매로 거두어 드릴테니까. 


하나님, 우리는 겉만 생각하느라고 속을 생각할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겉만 괜챦으면 속도 괜챦다고 생각하면서 열심히 겉모습만 갖추며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속보다 겉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우리들처럼 겉모습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을 정죄하며 무시할 때도 많습니다. 주님, 오늘 주님의 말씀을 듣기를 원합니다. 주님은 속사람의 어떠함을 통해서 표현된 형식과 변화된 겉모습을 원하시는 것을 배웁니다. 항상 이것도 취하고 저것도 버리지 않게 해주시고, 그 어떤 순간에도 거리와 시장에서 문안받고 인사받는 것을 즐기지 않게 하시고, 그렇게 평토장한 무덤, 그 속에 생명이 아닌 죽음만 가득찬 그런 인생이 되지 않게 해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