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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성경 묵상

2012.03.01. 매일성경 묵상

    오늘 본문은 누가복음 12장 35-48절입니다. 

    본문에서는 ‘그 나라를 구하는’ 삶을 살아가는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그 나라를 구하는 삶이란 주인이 아닌 종으로 사는 삶을 말한다.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 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주인을 섬기는 종의 기본은 긴장과 기다림이다. 주인은 언제 올지 모른다. 그러니 항상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주인이 올 것을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 주인이 오는 시간이 정확하지는 않지만 주인은 반드시 돌아온다고 약속했고, 주인의 성품으로 볼 때 그 약속은 분명히 지킬 것이다. 종이라는 신분과 그에 따르는 주인을 섬기는 역할은 변하지 않고 결국 주인의 평가를 받게 되는 것도 변할 수 없다. 만약 주인이 부재중에도 오히려 더 긴장하고 더 성실하게 할 일을 하고 또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면 그에게는 큰 상이 주어질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들리라 주인이 혹 이경에나 혹 삼경에 이르러서도 종들이 이같이 하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이것이 성실한 종, 주인의 약속을 믿고 항상 주인을 기다렸던 종들이 받게 되는 상은 ‘주인의 섬김’이다. 이러한 상을 받고자 하는 자는 ‘성실하고 신실한 종’으로 살아가야 한다. 주인이 언제 올지 모르지만, 그래서 마음에 의심이 생기고 긴장감이 사라져 가지만 그래도 등불을 켜고 허리에 띠를 띠고 서서 기다리며 살아가야 한다. 주님의 섬김을 받게 되는 것. 이것이 복으로, 정말 사모하고 소망할만한 복으로 여겨지지 않는다면 하는 수 없다. 그에게는 더 이상 동기부여를 할 것이 남아있지 않다. 오신다던 주인의 섬김을 받는 일, 영광스러운 성자 하나님의 섬김을 받게 되는 일... 이것이 복이라고 이것이 가장 큰 영광이라고 여겨지지 않는다면 정말 어쩔 수가 없다. 땅에서의 기다림과 섬김, 종으로 살아감... 이 모든 것의 상급은 그 나라에서 그 분의 섬김을 받는 것이다. 주님께서 제자들의 마음 속에 그려주신 이 그림이 ‘최후의 사실’이라면 마지막 날 그 분은 기꺼이 종의 자리로 내려와 이 땅에서 종으로 수고했던, 깨어서 기다리며 살았던, 등불을 꺼뜨리지 않았던 그 종들을 손수 섬겨주실 것이다. 그 때 주님의 얼굴에 보이는 그 환하고 기쁜 미소, 우리로 인해 만족하시는 그 분의 미소를 생각해 보라. 그리고 그 미소에 대한 응답으로 우리 얼굴에 눈물과 함께 뜨겁게 새겨질 그 환한 미소를 생각해 보라. 모든 섬김과 기다림, 그리고 신실한 섬김이 뭍어 있는 그 완전히 아름다운 미소를 생각해 보라. 그 때 그 자리는 주님의 섬김도, 우리가 그 분의 섬김을 받는 일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가장 평안하고 풍성한 자리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기쁨과 만족, 그 충만함은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이것을 이 땅의 편안함과 잠시의 반짝거림과 바꿀 것인가? 그것을 ‘지혜’라고 생각할 것인가? 오! 어리석은 자들이여. 완전함과 불안전함, 영원과 순간의 무게를 생각하라. 비록 이 땅에서 종으로 살아가는 일이 이경이나 삼경까지 깨어 있음을 의미할지라도 그 수고는 비교할 바 없는 영원한 영광으로 되갚아 질 것이다. 

“너희도 아는 바니 집 주인이 만일 도적이 어느 때에 이를 줄 알았더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하시니라” 

주님과 도적의 공통점은 언제 올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닥쳐서 준비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또 한가지 공통점은 그래서 대비하지 못한다면 주님과 도적 모두 그 사람에게는 치명적인 해를 입힌다는 것이다. 그러나, 둘 사이의 가장 큰 차이점은 도적으로 인한 피해는 언제든 만해가능하지만 주님으로 인한 ‘피해’는 영원히 계속된다는 것이다. 예비하고 있어야 할 시간이, 깨이 었어야 할 시간이, 등불을 켜고 있어야 할 시간이 70년이나 80년인들 그것이 무엇이 대수랴. 영원에 비하면 그 경성함의 상급을 누릴 영원에 비하면 그 긴 시간은 단시 한 순간에 불과할 것을....

“베드로가 여짜오되 주께서 이 비유를 우리에게 하심이니까 모든 사람에게 하심이니이까”

베드로는 이 비유를 누가 들어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누구를 향해 말씀하시는지를 물었다. 그러나 주님은 대답해 주시지 않으셨다. 누가 들어야 할까? 누구에게 말씀하신 것일까? 그것은 언제나 그렇듯이 ‘들을 귀 있는 자들’이다. 자신이 그 비유를 들어야 할 사람임을 아는 사람들, 그리고 자신이 주인이 아니라 종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사람들, 그래서 섬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섬겨야 할 사람임을 아는 사람들이다. 모두가 들어야 하지만 이 사람들만 들을 수 있다. 그래서 모두에게 하신 말씀이기도 하지만 결국 이 사람들에게만 하신 말씀이다. 씨앗은 그렇게 땅을 가리지 않고 뿌려졌다. 그렇지만 또 다시 좋은 땅만이, 스스로 그 열매를 받아들여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사실을 아는 좋은 땅만이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지혜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주인이 이를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저에게 맡기리라”

주님은 주님을 섬기는 자들이 지혜있고 진실한 사람들이 되기를 바라신다. 지혜와 진실함(혹은 신실함)은 주님을 섬기는 자들이 반드시 갖추어야 할 미덕이다. 지혜는 주인의 마음을 헤아리는데서 나온다. 자신에게 맡기신 일을 통해서 주인이 바라는 것임 무엇인지를 아는 것, 그것을 헤아려야만 한다. 이것은 때로는 명확하기도 하지만 또 때로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분별하기가 쉽지 않지만, 그래서 마음을 헤아려야 한다. 주인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 뜻을 따르는 일에는 신실함이 필요하다. 주인에 대한 충성, 주인의 영광을 위하는 변함없는 마음과 성실함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 사람은 다시 ‘주인’이 아니라 ‘청지기’ 그러니까 ‘맡은 자’가 되어야 한다. 주인이 없다고(아니, 없다고 생각된다고) 자신이 주인이 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맡겨진 것들을 자신의 유익이 아니라 맡기신 분을 위해서 사용하고 관리해야 한다. 예수님은 그러한 청지기의 역할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주는 일”로 정의하셨다. 나눠주는 일을 잘 하는 사람은 그만큼 맡겨진 것은 항상 맡겨진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사는 사람이다. 쌓아놓고 움켜쥐는 것이 아니라 잘 분배하고 나눠주는 것이 자신의 본분임을 잊지 않고 항상 그 일에 충실한 사람이다.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저에게 맡기리라”

잘 맡았던 자에게 더 많은 것을 맡기는 것은 상식에 속하는 일이다. 맡겼는데 자기 것으로 여기고 마음대로 사용하고 자기의 유익만을 추구하는데 사용했다면 주인은 그 다음에는 더 큰 것을 맡기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미 맡고 있던 것도 박탈할 것이며, 그 월권과 배임에 대한 책임을 물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는 세상이나 하늘나라나 그 원리가 같다. 우리는 그것을 인식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늘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주시는 사람, 그렇게 엄청난 승진을 허락하시는 사람은 바로 이 땅에서 맡았던 ‘작은 것’-이것은 하늘의 것에 비하면 작은 것이기도 하지만 맡은 사람의 입장에서는 이것을 중하게 여기지 않고 마음대로 다루었기 때문에 작은 것이기도 하다-을 잘 관리했던 사람이다. 그 분은 그런 사람에게 그 분의 모든 소유, 그 나라 전부를 맡기실 것이다. 그렇지만 그 반대편에 있었던 사람들에게는 그에 맞는 응분의 보상이 있다. 기대하시라!

“엄히 때리고 신실치 아니한 자의 받는 율에 처하리니...”

‘신실치 않는 자의 받는 율.’ 땅에서 맡은 것을 맡은 줄 모르고 자기 것처럼 여기며 살았던 사람들을 다루는 하늘의 법이 있다. 그들에게는 그 법이 적용될 것이다. 우리는 그 법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도 횡령자에 대한 법이 있고 그 법이 정하는 처벌이 있듯이 하늘에서도 하나님의 것을 ‘횡령’한 사람들에게 적용할 법이 있고 그 법은 한치 오차도 없이 적용될 것이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예비치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치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는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이것이 그 나라의 법, 그러니까 ‘신실한 자의 받는 율’이다. 많이 아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다. 많이 아는 자는 많이 행해야 한다. 주인의 뜻을 아는 것은 결코 그 사람에게는 자랑거리가 될 수 없다. 정확하게 아는 만큼 정확하게 행해야 한다. 그는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핑계를 댈 수가 없게 된다. 그러니 가르치는 사람들이 이런 점에서는 훨씬 불리하다. 그렇지만 적게 알거나 혹은 몰랐던 자라고 해서 책임이 완전히 면제되지는 않는다. 그러니까 정상참작은 있어도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는 일에 대한 완전한 사면은 없다는 것이다. 아뭏든 언젠가 주인 앞에서 책임을 져야 할 때가 온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 때가 언제인지는 그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반드시 한 번은 그 분 앞에 서야 할 때가 온다는 것이다. 개인의 종말은 그 사람에게는 곧 우주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니까. 


“하나님, 우리가 주인이 되지 않게 하소서. 주인의 약속과 상급을 믿고 기대하며 기꺼이 종과 청지기로 살아가게 하소서. 주인은 반드시 오실 것이고, 그러면 그 동안의 모든 행함과 태도들이 정확하게 평가될 것이며, 그에 걸맞는 상벌이 주어질 것임을 알게 하소서. 우리는 벌에 대해서는 도통 관심이 없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저 상급만 생각하며 사는 세대에 속해 있습니다. 상급의 반대편에는 항상 ‘신실치 아니한 자가 받는 율’이 있음을 인식하게 하소서. 그래서 이 땅에서 마음껏 살다가 하늘나라에서 국외자가 되지 않게 하시고, 땅에서는 종으로 살더라도 하늘에서는 영원한 다스림에 참여하는 삶의 방식을 취하는 지혜로운 종이 되게 해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