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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성경 묵상

2012.03.02. 매일성경 묵상

     오늘 본문은 누가복음 12장 49-59절입니다. 할 일이 많아서 많이 늦었습니다.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케 하려 함이로라”

예수님은 길이고 진리고 생명이다. 그러나 단 하나뿐인 길이고 단 하나뿐인 진리이며 단 하나뿐인 생명이시다. 그래서 문제다. 여러 길 중의 하나라면, 여러 진리 중의 하나라면 여러 생명 중의 하나라면 그 분은 결코 갈등을 일으킬 필요가 없다. 그저 그들 속에 섞여 있으면서 그들과 잘 어울려 지내면 그 뿐이니까. 그러나 그 분은 모든 면에서 ‘유일하신 분이기 때문에 갈등의 이유가 된다. 그 분은 그 유일성 때문에 다른 길, 다른 진리, 다른 생명을 허용하실 수가 없다. 그래서 그 분은 항상 그 분을 중심으로 나누는 역할을 하신다. 그런 점에서 그 분은 만물을, 모든 사람들을, 그리고 하나님과 사람을 화평케 하시려고 오셨지만 동시에 화평을 깨뜨리러 오시기도 하신 것이다. 그 분이 깨뜨리고자 하시는 화평은 진리를 근거로 하지 않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지 않은, 하나님 없는 ‘거짓 화평’이다. 이 거짓 화평이 깨지지 않는 한, 참된 화평은 없다. 우리는 그 분이 없는, 그 분을 중심으로 하지 않은 화평, 그래서 그 분이 인정하지 않는 화평은 화평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심지어는 그것은 분쟁보다도 훨씬 못한 것임을 알게 된다. 분쟁은 항상 나쁜 것이 아니다. 그 분쟁이 진리를 향해 가는 것이고, 그리스도를 향해 가는 것이라면, 그런 분쟁은 필요한 것이고 심지어는 가치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기꺼이 분쟁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은 참된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이며, 참된 진리를 원치 않는 사람인지도 모른다.(그러나 오해하지 마시길 바란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일으키는 모든 분쟁이 그런 종류의 고상하고 가치있는 분쟁은 아니니까 말이다. 예수님께서는 형제, 자매, 가족들보다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늘나라에 적합하지 않다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평상시에는 그렇지 않지만 꼭 필요한 경우라면 가장 가까운 사람들보다 진리를 사랑하는 것을 선택해야 한다. 이렇게 될 때, 내 가족보다 진리를 더 사랑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분쟁이 될 때, 이럴 때만 그 분쟁은 진리 때문에 생겨난 가치있고 고상한 분쟁이 된다. 그러니 내가 일으키는 분쟁을 신앙으로 합리화하기 전에 그 분쟁이 진짜 그래서 일어나는 피할 수 없는, 피해서는 안되는 분쟁인지를 확실히 해야 한다.)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변할 줄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변치 못하느냐 또 어찌하여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치 아니하느냐”

이런 분별이 결국은 위에서 말씀하신 분쟁의 이유가 되니 이 말씀은 위의 말씀과 연결된다. 위에서 말씀하신 분쟁이란 그러니까 결국 진리를 분별하고 그 진리 편에 서는 일 때문에 생겨나는 분쟁이 되는 셈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구절에서 외식자의 특징을 발견하게 된다. 외식하는 사람의 특징은 그가 비본질적인 일에는 지나친 관심을 가지고 그 일에는 큰 가치를 두지만 본질적인 일에는 별반 관심과 가치를 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주님은 시대를 분별해야 하고 옳은 것을 판단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그렇게 하지 않는 자는 외식하는 자라고 말씀하신다. 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이 그 시대를 제대로 평가하는 것은 참 쉽지 않은 일이다. 왜냐하면 그 시대를 사는 사람은 그 ‘시대의 아들’이 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시대를 평가한다는 것은 곧 자기 부모와 같은, 가장 익숙해져 있고 그래서 가장 편안하게 느끼는 일들을 평가한다는 것을 뜻한다. 물론 우리는 얼마든지 이 시대를 평가할 수 있다. 사실 누구나 그렇게 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분별, 성경에서 말하는 평가는 단순히 철학적이고 학문적이며 문화적인 평가가 아니다. 그 평가는 하나님의 기준으로 그 분이 보시는 대로 이 세상과 시대를 바라보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마치 한국 사람이면서 한국 사람이 아니어야 하며, 우리 가문 사람이면서 우리 가문 사람이 아니어야 하고, 대구사람이면서 대구사람이 아니어야 하는 것과 같다. 그렇게 익숙해져 있는 시대로 부터 한 걸음 물러서지 않으면 안되고 그렇게 익숙해져 있는 기준을 하나님의 기준으로 대치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니 이게 얼마나 어렵겠는가? 실제로 그것은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일을 의미한다. 우리가 사는 시대만큼 옳고 그름의 기준이 모호해진 시대는 없었다. 모든 것이 ‘차이’와 ‘다양성’이라는 말로 표현되며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는 것이 이해력과 관대함이라고 여겨지는 시대가 지금 이 시대이다. 그러나, 시대상이 어떠하든지 주님은 우리가 옳고 그름을 가려야 하며, 옳은 것은 취하고 그릇된 것은 떠나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핑계댈 수 없는 위선이라고 말씀하신다. 게다가 주님은 그것을 ‘스스로’ 판단하라고 하신다. 밤하늘의 달무리를 보면서 “내일 날씨는 맑겠는 걸.”하고 이야기하듯이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일단 날씨를 읽는 방법을 배웠던 것처럼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배우지 않고는 알 수가 없다. 흔히 ‘영적인 분별력’이라는 것을 무언가 신비하고 아주 영적인(조금 치우친 개념에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성경 어디를 보아도 영적인 분별력을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곳은 발견할 수가 없다. 성경에서 영적인 분별력이란 어떤 결정이나 사고방식이 하나님에게 속한 것인지 아니면 사탄에게 속한 것인지를 분별해 내는 것이다. 그것을 분별하는 것이 쉽지 않으니 영적인 분별력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우선 배워야 한다. 성경을 배우고 정직하게 읽고 묵상해야 한다. 그래서 성경이 무엇이 옳다고 하는지, 무엇을 옳지 않다고 하는지 그 기준을 분명히 해야 하며, 그 다음에는 그 기준을 사용해서 무언가를 평가하는 방법을 연습해야 한다. 그리고, 그 평가에 ‘순종’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 이것이 쉽지 않은 일이고 때로는 주변과 분쟁하는 일이 되기도 하지만 위선자가 되고 그 위선자가 처해지는 운명에 처해지지 않으려면 피할 수 없는 우리의 개인적인 소명이며 책임이기도 하다. 

“네가 너를 고소하는 자와 함께 법관에게 갈 때에 길에서 화해하기를 힘쓰라 저가 너를 재판관에게 끌고 가고 재판장이 너를 관속에게 넘겨 주어 관속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우리는 이 말씀도 ‘분별’해야 한다. 도대체 무슨 뜻인지 말이다. 갑자기 왜 재판이야기를 꺼내시는 것일까? 또 우리를 재판장에게 끌고가는 사람은 누구이고, 또 재판관은 누구인가? 위의 말씀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위선이 있다면 우리는 재판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증인이자 고소자와 함께 재판관 앞으로 가고 있는 중이다. 이 증인, 이 고소자는 누굴까? 우리가 화해해야할 이 고소자는 누구일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다. 우리의 위선은 그 분 앞에 다 드러나 있다. 그 분이 증인이고 고소자이다. 재판을 피하려면 이 고소자와 화해해야 한다. 지금까지의 위선을 내려놓고 그 분과 화해해야 한다. 거듭 말하거니와 그 분은 길이고 진리이고 생명이다. 그것도 단 하나 밖에 없는 길과 진리 그리고 생명이다. 이런 예수님과 화해하는 길은 예수님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받아들이고 그 분을 따르는 것 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 이제 그 분을 모든 것을 분별하는 분별의 기준으로 사용할 수 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안된다. 이미 재판을 받고 형에 처해지면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갚지 아니하여서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우리는 위선자입니다. 시대와 옳고 그름을 분별하며 그 분별을 따르는 일에 게으른, 그러면서도 작고 중요하지 않은 일에는 크게 무게를 두는 위선자입니다. 이제 우리가 주님과 화해하게 해 주시옵소서. 이제는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로서 치러야 할 대가, 그 ‘분쟁’이라는 대가를 치르고 재판관에게 가는 길에서 서둘로 그리스도와 화해하는 사람들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