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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성경 묵상

2012.03.04. 매일성경 묵상

     오늘 본문은 누가복음 13장 18-35절입니다. 
 
     “그러므로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과 같을꼬 내가 무엇으로 비할꼬...”

‘그러므로’ 또 당황케 하는 단어가 등장이다. ‘그러므로’라는 말이 지금부터 나오는 내용이 앞에 나오는 내용의 결론이라는 이야기이니까 우리는 왜 그런지를 또 찾아야 한다. 때로 성경을 읽다가 보면 무슨 수수께끼를 푸는 것 같다. 연결점을 찾아내면 너무 은혜롭고 정말 주님의 지혜에 ‘기가 막힐 정도’이지만 찾을 때까지는 끙끙거려야 한다. 13장 처음에서 주님은 회개, 열매, 외식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그 마지막 부분에서는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허리가 굽은 여인을 고쳐주신 이야기가 나온다. 거기서 여인은 안식을 얻었고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일을 기뻐하였다. ‘그러므로’ 주님은 하늘나라를 비유로 말씀해 주신다. 

“마치 사람이 채전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 또 가라사대 내가 하나님 나라를 무엇으로 비할꼬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하셨더라”

주님은 하늘나라, 정확하게는 이미 이 땅에 임한 하늘나라를 겨자씨와 가루 속의 누룩으로 비유하신다. 겨자씨와 누룩의 특징은 무엇인가? 아주 작아서 눈에 보이지 않지만 생명력으로 충만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은 스스로 자라 ‘거대해’ 진다는 것이다. 사람들의 회개하지 않음으로, 열매맺지 않음으로, 그리고 위선으로 천국은 전혀 보이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천국은 주인과 과원지기의 기다림 속에서, 등 굽은 여인의 치유와 안식 속에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목격하는 일 속에서, 그리고 반대하는 자들의 부끄러움 속에서 이미 시작되어 있으며 자라나고 있다. 이미 겨자씨는 심겨졌고, 누룩은 넣어졌다.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볼 줄 아는 사람들의 눈에는 너무나 잘 보이며 또 점점 커다랗게 자라나고 있다. 

“혹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

이 세상에 이것보다 심각하고 중요한 문제가 어디있을까? 천국문은 넓은 문인가? 좁은 문인가? 그래서 들어가는 사람이 많은 문인가? 아니면 그 반대인가? 

“저희에게 이르시되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질문은 숫자에 대한 이야기였지만 대답은 숫자와는 상관이 없다. 주님은 그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말씀하실 뿐이다. 좁은 문, 문이 좁다고 들어갈 사람이 적다는 말은 아니다. 그렇지만 그 문이 좁기 때문에 그 문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 그리고 문이 좁기 때문에 그리고 들어가려고 애써야 한다. 내 몸집이 너무 크다면 다이어트라도 해야할 판이다.  입은 옷이 너무 많다면 옷이라도 벗어야 하고, 주렁 주렁 달린 것이 너무 많다면 그런 것들을 몸에서 떼어내야 할 판이다. 그렇게 애써야 한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당신이 그런 대답을 하는 이유가 다름 아니라 그리로 들어가기를 힘쓴다고 다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하신다. 그렇다고 이것이 선택받은 자들만이 들어갈 수 있다는 말씀은 아니다.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것은 그것이 요점이 아니다.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저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써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여기서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려고 애써도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말씀해 주신다. 그는 별다른 사람이 아니다. 그저 ‘늦은 자’이다. 문이 열려있을 때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 자이다. 우리는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 언제든지 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 문이 닫힐 때가 있다는 것이다. 그 ‘좁은 문’이 말이다. 그러니 이렇게 이해해야 한다. 구원의 문은 좁은 문이다. 그래서 그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고 애써야 들어갈 수 있다. 그렇지만 또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닫히기 전에, 기회가 있을 때 그 문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런데, 이상하다. 그들이 늦게 왔다면, 주인은 그들에게 늦어서 못들어간다고 대답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나는 너희가 어디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여기서 늦은 자들과 주님이 모르는 자들이 동일한 자들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 때에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 길거리에서 가르쳤나이다 하나 저가 너희에게 일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 하리라” 

늦게 온 자들의 항변은 자신들은 주님과 친밀한 관계가 있으며 또 자신들은 사람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쳤다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항변은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다. 주님은 그들을 모르고, 그런 그들을 향해서 ‘행악하는 자들’이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그들의 이야기는 거짓이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였을까? 이들은 무엇 때문에 이러한 낭패를 경험하게 된 것일까? 그들은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다고 말한다. 또 하나님의 뜻대로 사람들을 가르쳤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들은 늦었다. 좁은 문이 열려 있을 때 그리로 들어가기를 힘쓰지 않았고 문은 닫혔다. 그렇다면 그들의 잔치는, 그리고 그들의 가르치는 행위는 전혀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고 힘쓴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 된다. 그리고, 그들은 바로 그런 일들을 하느라고 늦었다는 뜻이 된다. 이들은 자기들 생각에는 전혀 문제될 것을 발견하지 못한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없었고, 또 자신들이 하는 일에 대해서도 그것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확신도 있었다. 그들은 이렇게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앞선 자’로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늦은 것이다. 문이 닫히고서야 도착했던 것이다. 스스로 앞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결코 서두르지 않는다. 힘쓰지 않는다. 현실적인 일들이야 어떨지 몰라도 영적인 일에서는 이것은 항상 진실이다. 영적인 특권의식에 빠져 있는 사람, 그래서 영적인 안일함에 빠져있는 사람은 결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힘쓰지 않게 되어 있다. 그러니 그 문이 닫힐 때까지 그 문을 통과하지 못한다. 그 나라에 대해서 긴장이 없다면 그 사람에게 그 문은 어쩌면 항상 닫혀있는 문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가 통과하기에는 한 없이 좁은 문인지도 모른다. 

“행악하는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 하리라”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주인’이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것이다. 그 분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지 않은 모든 일들은 악하다고 보시며 인정해 주시지 않는다. 그 분은 결국 그들을 버린다. ‘문 밖’에 영원히 두신다. 울며 이를 갈도록 말이다. 그렇다면 그 좁은 문이란 무엇일까? 그것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좁은 문이란 무엇일까? 주님께서 정확하게 말씀해 주시지 않으니 우리도 그저 그렇게만 생각해 보자. 그리고 그 문이 좁다는 것과 언젠가는 닫히는 문이라는 사실에 집중해 보자. 아마도 이것을 아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좁은 문은 영적인 특권의식과 안일함과는 정반대의 위치에 있는 문이라는 사실일 것이다.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 내가 귀신을 좇아 내며 병을 낫게 하다가 제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바리새인들이 헤롯에 예수님을 죽이라고 한다고 했을 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전체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맡기신 소명에 대한 확신에서 나온 말씀이지만 우리는 이 말씀을 자세히 묵상해 볼 필요가 있다. ‘제 삼일에는 완전하여 지리라” 부활을 말씀하시는 것 같지만 아니다. 우선은 시점이 맞지 않는다. ‘오늘과 내일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낫게 하다가 제 삼일에는 완전하여 지리라’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부활이전에 죽음이 있어야 한다. 삼일후가 부활을 가리키려고 한다면 죽음이 언급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제 삼일’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가리키는 날이다. 이것은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라는 말씀에서도 그것이 확실히 드러난다. ‘제 삼일’은 예수님께서 죽으시는 날이고,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그 죽음으로 완전하여 질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아무리 헤롯이 죽이려고 해도 그런 ‘제 삼일’이 오기 전에는 결코 죽을 수가 없고, 그것도 예루살렘에서가 아니면 죽을 수 없다고 대답하셨던 것이다. 

주님은 자신의 수난과 죽음을 통해 당신께서 ‘완전해지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죽기까지 순종하는 그 순종’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모든 소명을 이루는 그것이 자신을 완전하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혹시 이것이 앞에서 말씀하신 ‘좁은 문’이 아닐까? 죽음을 피해야 할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기 보다는 오히려 완전함을 위해서는 반드시 통과해야 할 문으로 생각하는 사고방식, 그리고 그 사고방식에 따라 살아가는 그 삶이 혹시 ‘좁은 문’으로 가는 삶, 그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는 삶이 아닐까? 충분히 개연성이 있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도 그런 문으로 들어가려고 힘쓰셨고, 그런 삶은 적어도 바리새인들의 삶의 방식과는 정반대의 삶이니까 말이다. 

또 한 가지 곁들여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소명’이라는 단어이다. 주님께서 죽음 앞에서도 전혀 굴하지 않으시고 당당하실 수 있으셨던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자신이 가는 길에 대한 확신이었다. 부르심과 그 부르심을 이루는 삶에 대한 확신이 그 분을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흔들림이 없게 했다. 두려운가? 삶이 자주 흔들리는가? 그렇다면 나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분명히 해야 한다. 그리고 그 소명 가운데 거하며 살아가야 한다. 그러면 그 소명이 나를 세울 것이다. 나를 견고하게 하고 담대하게 할 것이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버린 바되는 이유는 자기 자신에게 있다. 주님께서 모으려고 하실 때, 그 모으심을 거부하고 흩어지려고만 할 때, 그 모으심을 끝까지 원치 않고 끝까지 자기 마음대로 흩어진 삶을 살려고 한다면 남는 것은 ‘황폐하여 버린 바’ 되는 것 밖에 없다. 그건 형벌이 아니다. 단지 그 분의 날개 아래 거하지 않는 삶이 가져오는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그 분의 보호와 돌보심이 없다면 결국 모든 풍성함과 단절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게 해 주시옵소서. 그 나라는 이 문으로 들어가려고 애쓰는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는 나라라는 사실을 잊지 않게 해 주시옵소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처럼 넓은 길에 있으면서 그 길이 주는 안전함과 편안함을 즐기느라고 그 문으로 들어가는 일에 늦지 않게 해 주시옵소서. 우리를 완전하게 하는 것은 넓은 길의 편안함과 안이함이 아니라 오히려 좁은 문으로 가는 일이 주는 ‘죽음’임을 잊지 않게 해 주시옵소서. 힘들고 어렵지만 사는 방법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죽는 방법으로 살아가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연합하여 그 분이 부활에도 참여하게 해 주시옵소서. 땅의 잔치가 아니라 하늘의 영원한 잔치에 참여하는 진실로 복된 인생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