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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성경 묵상

2012.03.05. 매일성경 묵상

     오늘 본문은 누가복음 14장 1-14절입니다. 그제 올려야 했는데 이제서야 올립니다. 
 

    “안식일에 예수께서 한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떡 잡수시러 들어가시니 그들이 엿보고 있더라 주의 앞에 수종병 든 한 사람이 있는지라”

안식일이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옳아매려고 덫을 설치했다. 식사교제를 빙자해서, 그 자리에 수종병 든 사람을 그 미끼로 던져놓고 말이다. 이것이 안식일을 방어하려는 사람들의 모습인가? 안식일을 지켜내려고 사수하는 사람들의 태도인가? 과연 그들이 하는 일은 안식일을 지키는 일이었는가?

“예수께서 대답하여 율법교사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병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 그들이 잠잠하거늘 예수께서 그 사람을 데려다가 고쳐 보내시고”

질문도 없는데 대답이 나온다. 그렇다면 숨겨진 질문은 무엇이었을까? 무지와 맹목에 빠지면 의당 물어야 할 것이 있는데도 묻지 못한다. 그럴 때 반드시 해야하는 질문은 그 무지와 맹목 때문에 가려지는 법이다. 그러나 지혜는 그 무지와 맹목에 가려진 질문을 보고 거기에 대해서 온전한 대답을 제공하는 법이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나 안 고치시나, 그렇게 금지되어 있는 일을 하시나 하시지 않나를 궁금해 할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원하는 대답을 얻기 위해서 그렇게 상황을 악하게 조작할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마땅히 물어야 할 질문은 따로 있었다. 그 질문은 ‘과연 안식일은 어떤 날인가? 진실로 무엇을 해야하는 날이며, 어떤 일이 일어나야 하는 날인가?’라는 질문이어야 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질문 속에 대답까지 담아서 바리새인들에게 반문하셨다. 그들은 그 질문, 아니 그 대답을 듣고는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자신들이 놓은 덫에 자신들이 꼼짝없이 걸려들고 말았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의 질문에 대해 대답하지 못함으로서 오히려 정확한 답을 얻는다. 안식일은 누군가를 옭아매기 위해서 덫을 설치하는 날이 아니라, 무언가에 묶여 있는 사람들을, 그리고 피조물들을 풀어주어야 하는 날이라는 답을 말이다. 우리는 어떤 것이 옳다고 철썩같이 믿기 때문에 그것과 관계된 진짜 던져야 할 질문을 하지 않을 때가 많다. 그 맹목이 우리의 질문을 봉쇄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질문하지 않는다고 해서 주님이 질문하지 않으시는 것은 아니다. 주님은 언젠가 그것을 문제삼으실 것이다. 그것에 대해서 무엇이 진실로 옳은지를 물으실 것이다. 여기서 묻지 않으신다면 분명히 마지막 날에 물으실 것이다. 그 때 우리는 그것에 대해서 할 말이 있어야 할 것이다. 대답할 것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 날 주님의 질문에 그 어떤 대답도 드리지 못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여기서 사는 동안 그것에 대해서 질문해 보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항상 물어야 한다. 지금 내가 옳다고 여기는 것이 왜, 어떻게 해서 옳은 것이며, 또 그것은 원래 그것을 주신 하나님 보시기에도 옳은지 말이다. 이런 질문이 없을 때, 우리는 그것을 지켜내려고 하다가 그것을 망가뜨려 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할 수 있다. 그 때 안식일을 목숨처럼 지키려 하다가 오히려 안식일을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렸던 바리새인들처럼 말이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리라”

우리는 내가 생각하는 나 자신보다 낮게 살아가야 한다. 모든 면에서 그렇게 하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선택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내가 나를 높여야 다른 사람도 내가 높다고 인정해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항상 스스로가 스스로를 높이려고 한다. 문제는 이러한 노력이 원래의 나의 ‘높이’보다 나를 더 높은 곳에다 가져다 놓으려는 노력이 될 때가 많다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뭐가 문제일까? 내가 나를 원래의 나보다 높이려고 하고, 또 그렇게 높이게 될 때, 스스로는 자신이 그렇게 높다고 확신하지만, 그 누구도 그 사람이 높다고 인정해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시라. 자기 높이보다 높아진 사람을 보면서 아름답다고 여긴 적이 있는지, 스스로를 원래의 자신보다 높이려고 안깐힘을 쓰는 사람을 보면서 바람직하거나 존경스럽다고 생각한 적이 있는지 말이다. 아마도 거꾸로 눈살을 찌푸리며 혀를 찼을 것이다. 그런데, 왜 나는 여전히 그 일을 하고 있는가? 그렇게 스스로를 높이려고 하고 또 그렇게 높은 곳에 놓으려고 하는가? 남이 그렇게 할 때는 그렇게 불쾌해 하면서도 왜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내가 그 ‘짓’을 하고 있는가? 내가 그 ‘짓’을 하고 있는 한 다른 모든 사람들은 그들의 마음 속에서 계속해서 나의 높이를 낮추게 될 것이다. 100에서 80으로, 80에서 50으로... 그리고 마이너스로...(마이너스! 아주 심각하다.숙제, 누군가가 나를 마이너스로 평가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얼굴은 당신을 높일지 몰라도 마음으로는 이미 당신을 저 밑으로 내려보냈을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만 나를 보고 있다면 별 문제는 없을 것이다. 뭐 남이야 어떻게 생각하든 그 일을 통해 나 스스로는 만족을 누릴 수 있을테니까. 그리고 사람들의 평가야 금방 지나가는 것이고, 또 그 사람들은 다시 보지 않으면 되니까 말이다. 그렇지만 어떤가? 우리는 사람들 앞에서만 사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모습은 사람들만 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저 위엣 분이 보고 계신다. 그리고 그 분의 행동은 영원한 결과를 초래한다. 우리가 높이고 그 분이 낮추신다면 그 낮춤은 영원한 낮춤이 된다. 이게 걱정되지 않는다면?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그러나 이게 걱정된다면?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언제 높아지고 언제 낮아져야 할지, 그리고 얼마나 오랫동안 낮아지고 얼마나 오랫동안 높아질지를 결정해야 한다. 잠시 높아지고 영원히 낮아지기를 원한다면 그럴 수 있는 방법으로 살아가면 될 것이고, 잠시 낮아지고 영원히 높아지기를 원한다면 그럴 수 있는 방법으로 살아가면 된다. 

“그리하면 저희가 갚을 것이 없는 고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갚음을 받겠음이니라”

인생을 계산적으로 사는 사람들이 많다. 그게 지혜로운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일견 그런 것 같다. 주면 받아야 하니까, 될 수 있는대로 많이 받으면 더 좋으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거래를 한다. 돈을 거래하고, 친절과 호의를 거래하고 또 영광을 거래한다. 그러나, 땅에서 주고 받으면 그것으로 끝이다. 순간은 순간으로 갚아질 뿐 더 이상 이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삶의 방식에는 이런 방법만 있는 것이 아니다. 진짜 계산적인, 정말 ‘머리좋은’ 계산방식은 따로 있다. 그것은 바로 순간을 영원을 위한 밑천으로 삼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그 방법을 가르쳐 주신다. 그 방법은 절대로 갚을 수 없는 사람들에게 베푸는 것이다. 그러면 땅에서는 돌려받을 길이 없어진다. 그럼 손해본다고? 천만에 그렇지가 않다. 어리석게 지금 당장만, 그리고 땅위만 생각하면 그럴 것이다. 그렇지만 하늘을 생각한다면 결과는 정반대가 된다. 여기서 돌려받지 못하니 거기서 돌려받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돌려받는 것은 순간이나(길어봐야 결국 조금 긴 순간이나) 거기서 돌려받는 것은 무엇이든 영원히 지속된다. 

위선이란 내용은 없으면서 껍데기만 그럴 듯하게 꾸미는 것이다. 그것은 내용은 갖추지 않은 채로 껍데기만으로 내용이 있는 것과 같은, 그것보다 더 큰 효과를 보려고 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삶의 태도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나라야 말로 그 위선의 가장 효과적인 치료제가 된다. 두 가지 점에서 그렇다. 첫째는 천국은 결코 겉모습만으로 어째볼 수 없는 나라이기 때문이고, 둘째는 천국은 이 땅에서 성급한 그리고 설익은 열매를 거두려는 삶의 태도를 지양하게 해 주기 때문이다. 내용은 하늘나라가 실재의 나라이며, 또 영원한 나라라는 것을 생각하며 살아갈 때 비로소 추구할 수 있게 되고, 또 그래서 채워넣을 수 있게 된다. 

위선의 반대인 진실함은 진실로 하늘을 바라보면서 길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미덕이다. 그 반대편에 서 있는 사람들은 위선의 유혹을 벗어날 수 없다. 위선은 땅 위에서 속성의 열매를 보장해 주니까 말이다. 그래서 주로 땅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위선의 담장을 뛰어넘지 못한다. 우리는 누가 우리를 높여주기를 원하며, 또한 얼마나 길게 높여진 영광을 누리기를 원하고 살아가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실로 우리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할 만한 결정적인 대답이 될 것이다. 


“하나님, 진실하게 해 주시옵소서. 하늘에서 하나님의 온전하시고 영원하신 높여주심을 바라보며 삶으로써 이 땅에서 진실하게 하옵소서. 그 진실만이 하늘에서 가치있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영원히 인정해 주시는 것임을 잊지 않게 해 주시옵소서. 지혜로운 자 같으나 천박하고 어리석은 자로 살지 않도록 우리의 눈을 붙들어 당신의 나라에 고정되게 해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