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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교회 설교/설교듣기

2012.03.14. 새벽예배 -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본문 : 누가복음 17장 11-19절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이 여행은 예수님 생애의 마지막 여행이었습니다. 골고다의 십자가, 그러니까 세상 모든 사람들을 위한 번제단에 자신를 제물로 드리기 위해서 가시는 여행이었었습니다. 그만큼 비장한 여행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여행을 일부러 빙 둘러가시는 여행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사마리아와 갈릴리의 경계를 따라 동서로 가로질러 여행하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치유와 회복이 필요한 사람들을 될 수 있는대로 더 많이 만나 그들을 구해주시고, 또 될 수 있는대로 많은 사람들에게 하늘나라의 복음을 전해주시려고 그러셨던 것같습니다. 그 여행 중에 예수님은 한 작은 마을에 들어가셨습니다. 그 때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님을 만나려고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 가까이까지 오지 못했습니다. 그저 멀리 서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라고 소리칠 뿐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그들을 바라보시고 그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제사장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문둥병자들은 결코 자신의 몸을 보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남에게, 그것도 제사장에게 몸을 보일 수 있을 때는 단 한 가지 경우, 그러니까 그들의 병이 나은 경우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 이 말씀은 그들의 병이 치료되었다는 뜻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변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들의 겉모습은 예전 그대로 입니다. 말씀과 현실은 전혀 달랐습니다. 그러나, 열 사람은 그 말씀대로 따르기 시작합니다. 자기들의 몸을 보이기 위해서 제사장에게로 갑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예수님을 향한 믿음의 표현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대로 자신들의 병이 치료될 것을 믿었던 믿음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정말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제사장에게로 가는 도중에 그 독한 문둥병이 스스르 사라지고 만 것입니다. 열 명의 문둥병자는 기뻐서 펄쩍 펄쩍 뛰었습니다. 터벅 터벅 걷던 걸음은 점점 빨라졌고 드디어는 전력질주로 변했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에 다른 아홉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달려가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아홉 명은 제사장에게로, 가족에게로, 친구에게로 그리고 이전의 자기 삶으로 돌아가고 있었지만 단 한 사람은 병이 치유되기 시작한 출발지점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로 달려갑니다. 달려가면서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예수님의 발 아래 엎드려서 예수님께 감사에 감사를 드립니다. 누가는 우리에게 그 사람이 ‘사마리아인’이었다고 알려 줍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예수님께 감사드리는 사람을 앞에 놓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예수님께서는 아홉 명을 찾으셨습니다. 열 사람이 치료를 받았는데 왜 한 명만 왔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아홉 명은 마땅히 보여야할 반응, 당연히 해야할 행동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예수님께 참된 감사를 드리는 일은 열 명 모두가 당연히 해야할 일들이었지만 단 한 명만 그 당연한 일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한 사람을 이상하게 부릅니다. 이 사람을 ‘이방인’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사람이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사실을 모르셔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누구보다도 예수님께서는 그가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데도, 그를 부르시면서 이 단어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사실 이 단어는 예수님의 생각보다는 그 자리에 있었던 제자들, 그리고 앞으로 그 이야기를 전해듣는 유대인들의 생각을 표현한 단어였습니다. 당시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들로부터 천대를 받았습니다. 거의 ‘개취급’을 받았습니다. 게다가 그 사람은 ‘문둥병자’ 그러니까 저주받은 죄인이고 가장 불결한 사람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의 기준에서 볼 때, 이 사람보다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이방인’ 그러니까 하나님과 가장 상관없는 사람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이방인’ 밖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사람이 없다고 하셨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사람이 사마리아인이고 문둥병자였기 때문에 이 사람에게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 사람은 안돼!”라는 꼬리표를 붙였습니다. 회복불가라는 낙인을 찍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사람, 그러니까 문둥병이 치료되는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고, 예수님을 통해 거기 임한 하나님 나라를 본 사람, 그래서 그에 걸맞는 영광을 돌린 사람은, 그러니까 참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놀랍게도 너희들이 이방인라고 낙인찍은 이 사람 밖에 없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거기 덧붙여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구원’은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장 바라는 복이었습니다. 그들은 메시야를 기다렸고, 그 메시야가 가져오는 구원을 소망했습니다. 그런데, 그 구원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는 ‘이방인’,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 사람은 안돼!’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는 바로 그 사람에게 주어졌던 것입니다. 이 사람을 제외한 다른 아홉 명에게도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제사장에게 가는 도중 그들의 병이 치료되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경험한 것은 ‘구원’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병고침의 은혜였습니다. 병이 고쳐지는 작은 은혜는 경험했지만 막상 진짜로 받아야 할 구원은 받지 못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진지하게 질문해 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 사마리아인과 다른 아홉 명이 가지고 있었던 믿음이 어떻게 다른가, 사마리아인을 구원받게 했던 믿음은 어떤 믿음이어야 하는가 하고 말입니다. 우선 우리는 이 믿음이 단순히 기적을 믿는 믿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나머지 아홉 명이 그것을 말해 줍니다. 그들은 문둥병이 고쳐질 것을 믿었고 그런 은혜를 경험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구원을 받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물론 어떤 경우에는 이 두 가지가 일치되고 겹쳐지는 경우도 있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 은혜를 경험하는 것 자체가 아니라 그 은혜에 대한 우리의 반응입니다. 그 기적이라는 은혜가 주어진 후에 그 은혜를 받은 사람이 거기에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 하는 것이 진짜로 중요합니다. 주님이 바라시는 반응을 포함하는 믿음만이 그 사람을 구원하기에 충분한 믿음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다시 물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 반응이라는 것이 어떤 반응을 말하는 것인가 하고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과연 우리는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에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까요? 그리고 그 반응은 왜 구원얻는 믿음의 증거가 될까요? 하나씩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라고 말씀하신 후에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두 말씀을 종합해 보면 “구원얻게 하는 믿음이란 곧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믿음”이라는 결론을 얻게 됩니다. 이것이 다른 아홉 명과 이 사마리아인의 단 한가지 차이였습니다. 아홉 명은  자신의 병이 고쳐진 것을 기뻐하며 그저 자기 삶으로 돌아갔습니다. 그저 그런 놀라운 자기에게 일이 일어나고, 자신에게 그런 은혜가 주어진 것만을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한 명은 달랐습니다. 그는 나머지 아홉 명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이 아닌 예수님께로 돌아왔고 예수님께 감사를 드리며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예수님으로 인해 자신의 병이 치유되는 사건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돌아왔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무릎을 꿇었던 것입니다. 

처음에 우리의 믿음은 우리의 필요, 특히 우리의 절실한 필요로 부터 시작될 수 있습니다. 열 명의 문둥병자들의 믿음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우리의 곤경에서 건져 주실 수 있다는 믿음에서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우리가 느끼는 가장 절실한 구원을 가져다 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분이시니 그런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은혜가, 이 기적이 곧 구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왜 우리에게 기적같은 은혜를 베푸셔서 우리를 곤경에서 건져 주시는지 그 진짜 이유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고통을 끝내시는 것, 우리를 곤경으로 부터 자유케 하시는 것, 그것도 은혜가 가지는 큰 목적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목적은 그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진짜 목적은 우리가 그 은혜를 통해 그 분의 영광을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 앞에 무릎을 꿇고 그 분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 속에는 반드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 분의 영광에 무릎을 꿇게하는 그런 믿음이 포함되어야 합니다. 그 영광에 이끌려 자기 중심의 삶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을 살기 위해서 뱡항을 돌이키게 하는 그런 믿음이 포함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우리 삶에서 이런 기적이 일어나게 할 때, 다른 아홉 명과는 다른 방향으로 달려가는 기적이 일어나게 할 때, 비로소 우리의 믿음은 우리를 구원하는 믿음이 될 수 있습니다. 사실 이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구원을 얻은 사람일 수가 없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구원이란 바로 이것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중심으로, 자기의 유익과 편리함만을 추구하며 살던 사람이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처음 하나님께서 지으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이야 말로 그에게 이미 그러한 구원을 얻게하는 믿음이 있음을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믿음 속에 이런 모습들이 보여지기 시작할 때, 비로소 우리의 믿음은 우리를 구원하는 능력있는 믿음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는, 그리고 한국 교회는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였으면서도 여전히 아홉 명처럼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자기 자신만 생각하며 살아가는 ‘작은 믿음’ 그리고 ‘부족한 믿음’에서 돌이킬 때가 되었습니다. 과거에 경험한 그 기적같은 은혜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그 영광을 향하여 달려가야할 때가 충분히 지났습니다. 경험한 기적을 기뻐하고, 그 기적을 자랑하는 것만으로는 너무나 부족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며, 그 분의 영광을 큰 소리로 드러내는 그 사마리아인의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될 때, 우리의 믿음은 우리를 구원하기에 충분한 증거를 지닌 믿음이 될 것입니다. 

이제 이 사마리아인의 믿음, 이 이방인의 믿음을 소망하시기 바랍니다. 혹시 이 믿음이 부족하거든 제자들처럼 믿음없음을 도와달라고 간절히 구하시기 바랍니다. 아직 이 믿음을 모르신다면 그 믿음을 알려달라고,  세상의 희미한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온전한 영광을 보여주셔서 내가 그 믿음을 가질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시며 믿음의 경주를 계속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실 때 그 말씀을 듣고 기뻐하는 영광스러운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