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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성경 묵상

2012.03.30. 매일성경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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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누가복음 22장 1-13절

“유월절이라 하는 무교절이 가까우매...”

유월절은 구원의 절기이다. 이스라엘이 이집트의 압제로부터 벗어나서 약속의 땅으로 출발한 날이 유월절이다. 예수님은 유월절의 주인이시다. 유월절 자체가 예수님으로 인한 구원을 가리키는 날이고, 그 날에 행하는 예식, 그리고 그 날에 먹는 음식들 모두가 다 예수님을 향해 있다. 특히 예수님은 그 날의 흠 없는 어린양이고 또 무교병이시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무슨 방책으로 죽일꼬 연구하니 이는 저희가 백성을 두려워함이더라”

그런 기쁘고 즐거운 절기가 다가오는데,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정당하게’ 죽일 수 있을지만 연구하고 있다. 그 구원의 절기, 그 기쁨의 절기에 이들은 또다른 악, 그것도 한 생명을 죽일 악을 효과적으로 행할 방법을 찾고 있었다. 그것도 모두가 모여서 말이다. 물론 이들의 이러한 악한 마음과 논의는 결과적으로 보면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언약이 온전하게 성취되게 하는 도구가 된다. 이것이 사탄과 하나님 사이의 수준차이다. 사탄은 자기 편에 서 있는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는 것을 막고 방해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방해를 오히려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완전하게 성취하는 결정적인 도구가 되게 하신다. 악은 여전히 악이다. 그렇다고 악이 선이 될 수 없다. 결과가 좋은데 왜 그 행동을 비난하는가?라는 질문은 성경적인 사고를 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질문이다. 성경이 문제삼는 것은 항상 결과가 아니라 동기이다. 그리고 일의 결과는 동기와 수단과는 상관없이 언제나 하나님의 몫이다. 악이 선을 이룬다고 해서 악이 선을 이루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요소라는 뜻은 아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그 악이 악하게 작용하지 못하도록 무력화시키고 오히려 하나님의 선을 위한 도구로 사용되도록 한 것에 불과하다. 악이 선을 이루는 도구가 되었다고 해도, 그 악은 여전히 악으로 남는다. 그래서 악을 행한 사람의 악행은 절대로 정당화될 수 없다. 그러니 우리는 항상 생각해야 한다. 선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도 악을 선택해서는 안되며, 악은 항상 악일 수 밖에 없다는 것, 그 악한 편에 속한 죄책은 고스란히 우리 자신의 몫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열 둘 중에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가니”

말을 물가로 끌고 갈 수는 있어도 말에게 억지로 물을 먹일 수는 없다. 이것은 죄와 우리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완전한 사실이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판 것은 일차적으로는 사단이 그에게로 들어갔기 때문이다.(물론 이 일조차 예수님의 사역을 온전히 이루는 도구가 되었지만, 그렇다고 이 행동이 정당화 될 수 없다. 그 이유는 위에서 이미 설명했다.) 그러나, 사탄은 우리를 억지로 움직일 수는 없다. 아무리 강한 유혹과 영향력을 미치더라도 결국 마지막에 사탄의 요구를 선택하고 따르는 것은 우리 자신이다. 그러니 사탄의 유혹 때문에 죄를 짓게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죄를 선택해서 죄를 짓게 되는 것이다. 유혹을 받는 것 자체는 죄가 아니다. 그러나 그 유혹에 넘어가는 것은 우리의 잘못이다. 그렇게 하기로 결정한 것은 우리의 생각과 의지의 선택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가니”라는 말을 오해해서는 안된다. 이 말은 그래서 유다에게는 책임이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모든 악과 악행의 근본적인 이유가 사탄에게 있다는 이야기이다. 우리는 오히려 이 구절을 우리를 위한 경고로 생각해야 한다. 우리 또한 언제든지 사탄의 치명적인 유혹에 노출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준비해야 한다. 유혹을 받되 그 유혹에 자신을 양도하지 않도록 말이다. 기억하시기 바란다. 결코 사탄은 우리에게 억지로 죄를 짓게 하지는 못한다. 그래서 죄를 짓는 것은 우리자신의 책임이다. 

“유월절 양을 잡을 무교절이 이른지라”

이제 정말로 때가 되었다. 예수님께서 유월절의 어린양이 되셔야만 하는 정확한 때가 이르렀다. 그 분이 유월절의 어린 양과 우리를 위한 떡이 되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구원을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 분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며 그 분의 풍성하고 온전하신 생명에 참여하는 일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여짜오되 어디서 예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저희가 나가 그 하시던 말씀대로 만나 유월절을 예비하니라” 

유월절은 철저히 백성들을 위한 날이었지만, 주님은 이 마지막 유월절을 위해서 필요한 모든 것을 스스로 준비하신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유월절 만찬을 위한 모든 것을 물었고, 예수님은 모든 것을 세밀하게 말씀해 주셨다. 그리고, 그 모든 준비는 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착오없이 진행되었다. 이 유월절 식사는 후에 예수님께서 후에 잡히시고 또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그리고 그 후에 성도들이 그 십자가를 생각할 때, 제자들과 성도들이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예수님은 유월절 어린 양으로 십자가에 달리셨다. 자신의 살과 피를 영원한 양식으로 내어주신 것이다. 우리를 다시 살게하고 또 영원히 살게 하며, 또 온전히 자유케 하기 위해서 말이다. 제자라면, 그리고 성도라면 십자가를 그저 감정적으로만 생각하고 또 바라보아서는 안된다. 마치 예수님의 지시와 예언하심을 통해 그 날 유월절 식사가 한치의 오차도 없이 준비되고 또 이루어졌듯이 십자가로 가는 모든 과정 하나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의 성취였다.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일들이 다 이렇게 이루어질 것을 믿어야 한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다. 그것을 방해하고 벗어나는 듯이 보이는 것들도 결국 그 계획을 돕고 섬기는 도구가 될 수 밖에 없다. 애초에 그렇게 계획되어서가 아니라 그 계획이 전지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의해서 그 성취를 향해 나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팔아넘겨 십자가에 죽게 한 것도, 또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를 알려주는 유월절 식사를 준비한 것도 모두 예수님의 제자에 의해서 행해진 일들이다. 그 누구도 한 편에 처음부터 그리고 결코 변함없이 서 있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에게는 무언가를 선택하라는 요구가 끊임없이 주어진다. 크게 보면 하나님의 선한 일을 위해 순종하라는 요구와 악한 일을 통해 그 일을 방해하라는 요구말이다. 우리가 무슨 이유에서 무슨 선택을 하던, 결국 이루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될 것이다. 그것은 틀림없고 변함없는 이치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적극적으로 그 분의 뜻을 이루는 편에 설 것인가? 사탄의 목소리에 순종하여 그 뜻을 방해하는 편에 설 것인가? 어느 편이 이득이 되고 지혜로울 것인가는 너무나 분명하다. 항상 성취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임을 명심하시기 바란다. 그 뜻이 이루어졌을 때, 우리는 우리가 그 과정에서 맡았던, 그리고 기꺼이 선택했던 그 역할에 따라서 상을 얻고 또 벌을 받게 될 것이다. 그것도 영원한 상과 벌을 말이다. 

“하나님, 우리로 하여금 이 변함없는 이치를 깨닫게 해 주시옵소서. 모든 것은 주님의 뜻대로 되어질 수 밖에 없음을 명심하며 살아가게 해 주시옵소서. 지금 내가 선택하는 것이 영원한 나의 자리를 결정함을 알게 하시고, 항상 하나님의 뜻이 원하는 곳에 있게 해 주시옵소서. 유혹이 있을지라도 선택의 책임과 결과는 내가 감당해야 함을 잊지 않게 해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