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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성경 묵상

2012.04.06. 매일성경 묵상



눅2326to43.pdf


본문 : 누가복음 23장 26-43절

고난 주간이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수난을 그저 고통 중심으로 이해하고 눈물만 흘리는 감성적인 반응으로는 오히려 예수님의 수난을 평가절하하는 셈이 될 수 있다. 예수님의 수난은 위대한 승리였다. 그 죽음이 바로 이 세상에 들어온 모든 죽음을 무력화한 죽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 분의 고난에 동참하려면 그저 한 주간 조금 시무룩하게 지내고 슬픈 기색을 띠는 것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오히려 이 기간 동안 그 분의 수난이 참으로 의미하는 바를 열심히 묵상하며, 십자가에 대한 의미있는 책을 한 권 읽어보는 것이 더 유익할 것이며, ‘복음을 위해 고난 받는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고민하고 또 결단하는 일, 그리고 그런 삶의 참되고 영원한 영광에 대해서 묵상하는 일이 훨씬 더 유익할 듯하다. 잠시의 슬픔은 오히려 그 분의 죽음을 가볍게 만들어 버릴 심산이 크다. 

“저희가 예수를 끌고 갈 때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로서 오는 것을 잡아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좇게 하더라”

시몬은 영문도 모르는 채로 볼 일이 있어 예루살렘에 왔다가 붙들려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게 된다. 그러나 이 일은 그에게 엄청난 유익이 되었다. 성경에 나오는 알렉산더와 루포가 나중에 예수님을 믿고 초대교회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이 된다. 그들이 어떻게 예수님을 믿고 헌신하게 되었을까? 아버지 시몬을 통해 미리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나중에 복음을 들었을 때 그들에게 그런 복이 주어지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우리가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힘들어도 기쁘게 지려고 한다면, 이유를 알고 가치를 알고서 그렇게 한다면, 그 일이 우리 자신과 자신들, 그리고 주변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유익을 끼칠 수 있을까? 이것은 법칙이라할 수는 없고, 그저 가능성에 불과한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그렇게 하지 않는 것보다는 훨씬 더 큰 유익을 더 효과적으로 가족과 지인들에게 선물할 수 있는 길이 될 수 있다.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예수님의 수난을 지켜보던 수많은 사람들이 가슴을 치며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다. 본 구절은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일견 매우 냉정하게 보여지지만 이것은 우리가 새겨들어야 할 말씀이기도 하다. 그 분의 수난과 죽음은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위해서 울게 하기 위해서 있는 사건이 아니다. 그 일은 우리가 우리 자녀들을 위하여, 나 자신을 위하여 울게 하려고 일어난 일이다. 왜냐하면 그 분의 수난은 분명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닫혀진 문을 활짝 연 사건이었지만 반대의 측면에서는 이제 그 문이 돌이킬 수 없이 열려졌기에 그 문으로 들어갈 마지막 기회가 주어진 것이고, 그래서 반드시 그 문으로 들어가야만 하는 절박함을 가지지 않으면 안되게 만든 사건이기도 했다. 이 절박함을 안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우리의 ‘자녀’를 위해서 울어야 한다.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예수님께서 못 박히신 곳은 ‘해골’이었다. 죽음, 그 폭군이 쓸고 지나간 황량하고 매마른 흔적만 남은 그 곳... 예수님은 거기에 못 박히셨다. 그리고 거기서 보혈을 흘리셨고, 거기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셨다. 거기서 ‘죽기까지 순종’하셨다. 죽음은 불순종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죽음이 임하는 곳에는 항상 해골, 그 매마름, 비존재만이 남겨진다. 주님은 바로 그 불순종의 자리, 죽음의 자리, 그 죽음의 흔적만 남은 그 자리에서 죽음으로써 순종하신다. 그렇게 해서 해골의 정수리[각주:1]로부터 생수가 터져나왔고 그래서 거기서부터 다시 생명의 강이 흐르기 시작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죽음의 순간, 가장 고통스러운 절명의 순간에도 예수님은 ‘소명’을 잊지 않으신다. 그 분은 해골의 언덕으로부터 생명의 강이 흘러가도록 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고, 그 분의 기도는 바로 그 소명과 완전하게 일치한다.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죄 용서만이 생명을 가능하게 한다. 죄사함만이 죽음에 속한 자들을 생명으로 옮겨지게 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비록 자신을 죽이는 자들이었지만 그들에게도 용서의 은총이 부어지기를 소망하며 중보하신다. 

“유대인의 왕이라 쓴 패가 있더라”

예수님의 죄명, 그 분에 대한 가장 큰 모욕. “유대인의 왕” 그러나 이 이름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공식적으로 받으신 그 분의 가장 정확한 이름이 된다. 하나님의 뜻은 이런 식으로도 이루어진다. 그 분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이 땅에 유대인의 왕으로 오셨고 또 그렇게 유대인의 왕으로 돌아가셨다. 그 십자가를 보는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볼 수 있었다. 문제는 그 모습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인간의 악함과 완악함이란 어디까지 치달을 수 있을까? 이 행악자는 예수님과 같은 처지였다. 똑같이 십자가에 못 박혀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 순간만이라도 정직해 질 수 있지 않았을까? 좀더 뚜렷한 시각으로 예수님을 볼 수 있었고, 또 적어도 예수님의 고통을 그 누구보다도 잘 헤아리는 그런 자리에 있지 않았을까? 그러나, 그는 죽어가면서도 함께 죽어가는 ‘사람’을 비방하고 비웃는다. 그러나, 예수님은 바로 인간이 이렇기 때문에, 이렇게 뼈속까지 악해서 스스로의 힘으로는 결코 구원을 이룰 수 없기 때문에 이 땅에 오셨고, 또 그렇게 돌아가셨다. 구경하고 조롱하는 자들을 용서하시기 위해, 또 같은 처지에 있으면서도 동병상련의 정을 느낄 인간적인 마음마저 상실한 그런 사람들을 용서하시기 위해서 말이다.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던 또 한 사람은, 자신의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영원을 복되게 할 그런 복을 얻게 된다. 그는 예수님을 비난하는 사람을 꾸짖었으며, 예수님의 죄없음과 의로우심을 고백했고, 또 예수님께 하늘나라에 임하실 때,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그 이전의 삶이 어떠했든지 간에 그에게 주어진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고, 그 예수님께 대한 부족하지만 정확하고 정직한 신앙고백을 하게 된다. 그 옆의 다른 죄수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일이 인생 전체를 통틀어서 행한 악행보다도 더 저주스러운 결과를 가져왔다. 그 자리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죽기까지 순종하셨던 그 일을 비난하고 조롱하는 자리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또 한 사람의 십자가는 오히려 그에게는 가장 큰 영광의 십자가였고 또 가장 복된 십자가였다. 그 십자가에서 그는 참된 십자가를 보았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에게도 고난과 고통은 양면성을 지닌다. 그 양면성은 우리가 그 고난과 고통에 대해서 어떤 반응을 보이느냐에 따라 전적으로 달라진다. 그 고통과 고난이 더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고 그리스도를 밝히 바라보게 하며, 나아가서 하늘나라의 소망을 더욱 든든하고 확고하게 만들어 준다면 그 고통과 고난은 우리를 낙원으로 인도하는 가장 확실한 안내자가 될 것이다. 그러나 동일한 고난과 고통이라도 그것에 대해 원망과 악감, 그리고 불신앙으로 반응한다면 그 고난은 거꾸로 우리를 낙원에서 점점 더 멀어지게 하는 가장 큰 이유가 될 수도 있다. 

오늘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일이다. 어제나 오늘이나 그 언제나 꼭 같은 날이지만 특별한 절기는 그런 날들을 정신없이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큰 유익을 주기도 한다. 남은 시간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의 참된 의미를 다시 한 번 깊이있게 묵상해 보자. 그 분이 왜 그런 죽음을 죽으셨는지, 그래서 나에게 주어진 놀라운 은혜는 어떤 것들인지, 그 크기와 놀라움이 어떠한지를 헤아려보며 이미 나에게 주어진 은혜에 감사하며 그 십자가가 앞으로 나에게 가져다 줄 놀라운 은혜들을 묵상하며 그 은혜에 우리의 미래를 의탁해 보자.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나님, 오늘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께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써 우리에게 죄용서라는 헤아릴 길 없는 은혜의 길을 열어주신 날입니다. 항상 이 길 위에 머물게 하소서. 이 길에만 생명이 있고, 만족이 있으며, 또 영원한 영광이 있음을 잊지 말게 하시고 나로 하여금 이 길로 다니게 하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치루신 그 은혜로운 댓가들을 생각하게 하옵소서.  

  1. 이 표현은 이재철 목사님의 설교에서 차용한 표현입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