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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2.09.04. 새벽 -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요한복음2)


요0101to18-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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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요한복음 1장 1-18절

여성들은 대개 보석을 참 좋아합니다. 그리고 그 보석 중에서도 다이아몬드를 가장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그 보석이 가장 변함이 없고 값이 비싸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제가 보니 다이아몬드가 반사하는 빛이 가장 아름답고 오묘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특히 다이아몬드는 방향에 따라서 발산하는 빛의 색이 달라집니다. 그 빛을 보고 있으면 정말 신비로울 정도입니다.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의 본문이라고 단 하나의 이야기만 전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가장 중요한 중심은 한 가지이지만, 그 속에는 놓치기 아깝고 또 그냥 넘어가기 아까운 값진 은혜와 교훈들이 서로 색깔을 달리하며 찬란하고 풍성한 빛을 발할 때가 많습니다. 


요한복음이 전체적으로 예수님을 말씀이 육신이 되신 하나님으로 소개하고 있다면, 예수님에 대한 또 하나의 설명은 그 분이 “빛”이시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한복음이 보여주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다이아몬드의 또 다른 빛깔의 찬란히 빛나는 광채입니다. 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의 빛이라” 그 분 안에만 생명이 있습니다.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그 분이 만드신 것입니다. 그 분으로부터 생명을 받은 것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다른 건 몰라도 생명만큼은 처음부터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우리들의 생명은 처음부터 우리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창조하셨고, 또 그 분으로부터 나누어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우리가 그 분으로부터 받았던, 생명이 사람들의 빛이라고 말합니다. 빛의 역할은 보게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빛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 것도 볼 수 없습니다. 빛이 있기 때문에 무엇을 볼 수 있고, 그것을 구별할 수 있으며 유익한 것은 반기며, 그렇지 않은 것은 거부할 수 있습니다. 빛이 없다면 이 모든 일은 불가능해 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이상한 사람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누가 보아도 그게 상식인데, 그게 옳은 것인데, 정반대의 선택을 해 놓고도, 남에게 정말 큰 상처를 입히고 아픔을 주는 일을 해 놓고도 그게 어디가 어떻게 잘못되었는지도 모를 뿐 아니라 심지어는 자랑하기까지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너무도 분명하게 잘못된 일들을 왜 그 사람만 그런 줄 모르고 있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의 설명에 의하면 그것은 그들에게 빛이 없기 때문입니다. 빛이 없으니 볼 수가 없고, 분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가치있는 것, 의미있는 것, 선한 것... 이런 것들을 알아보고 그런 것들을 선택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 안에 빛이 있어야 합니다. 물론 사람들 속에 있는 이 빛은 많이 어두워지기는 했어도 아직 남아있기는 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아직도 도덕이 있고 윤리가 있으며, 또 사람들의 양심이 남아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빛은 너무나 희미해서 진실로 참된 것을 분별할 수 없습니다. 진실로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원래 등대같은 빛이 있어야 하는데, 그게 정상인데 호롱불같은 희미한 빛만 남아있으니 세상이라는 어두운 망망대해에서 자신의 인생과 영혼의 바른 항로를 분별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갑자기 어두운 방에 들어가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어둡게만 여겨지죠.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우리의 눈이 그 어두움에 익숙해지면 그 때부터 하나씩 둘씩 물건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아직 방은 어둡지만 그래도 당장 크게 위험해 지는 일은 피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빛을 가지고는 모든 일을 다 할 수는 없습니다. 더듬거릴 수 있을 뿐이지 꼭 찾아야만 하는 것들을 찾기는 어렵습니다. 그 방이 낯선 방이라면 불을 켤 스위치도 찾을 수가 없겠죠. 그런데, 뒤에 들어오는 사람이 스위치를 켜면 어떻게 됩니까? 이론상으로는 더 잘보여야 하는데, 실제로는 더 안보입니다. 눈이 부셔서 눈을 감게 되고, 한동안은 아무 것도 볼 수 없습니다. 이제 진짜 찾아야 할 것을 찾을 수 있고, 또 진짜 해야할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는데, 오히려 눈이 부시다고 빨리 불을 끄라고 짜증을 내게 되기도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에 거의 모든 사람들이 처한 현실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죄로 인해서 원래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참된 생명을 잃어버렸고, 그래서 그의 속사람은 거의 빛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어둠 속에서 사는 일에 익숙해졌고, 그렇게 사는 것을 정상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더듬거리며 살면서도 아주 잘 살아가고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 희미한 빛으로는 진짜 찾아야 할 것을 찾지 못하고, 진짜 보아야 할 것을 볼 수 없었으며, 그래서 진짜로 해야할 일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빛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여겼지만 실은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며 영원한 낭떠러지를 향해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생명은 다시 주어져아만 했습니다. 생명이 있는 곳도 모르고, 그 생명을 만들어낼 능력도 없었기 때문에 그 생명은 그들의 밖으로 부터 안으로 주어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누군가 불꺼진 방에서 더듬거리며 살고 있는 그들을 위해서 영원히 꺼지지 않는 빛의 스위치를 올려주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그 일을 하셨습니다. 스스로 생명이시기 때문에 또 빛이신 그 분이 그 어두운 방, 칠흙같이 어두운 세상 속으로 들어오셨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화를 냅니다. 눈을 감아버립니다. 심지어는 그 불을 꺼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들 속에 있는 고질적인 어두움이 그들에게 주어진 생명을 거부하게 만들고 그래서 결국은 영원한 생명까지도 거부한 채로 죽음을 선택하게 만든 것입니다. 


희미한 빛에 적응되어 있는 사람에게 밝은 빛은 오히려 거북한 법입니다. 죄악의 어둠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들은 빛이고 생명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 분이 비춰주시는 빛을 거북해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 거북함 때문에 그 빛을 거부한다면 그는 영영 참된 것을 볼 수도 없고, 그것을 취할 수도 없으며, 그래서 그 참된 것만이 가져다 주는 유익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그 빛이 주는 가장 큰 유익이 영생이라면 심지어는 그 영생마저도 거부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진리는 좋은 것입니다. 너무 너무 좋은 것입니다. 가장 달콤하고 신선하며 그 누구의 영혼이라도 살릴만한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 유대인들은 저마다 진리를 알고 또 찾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육신이 되어 오셨을 때, 그를 알아보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 분을 죽이기까지 했던 것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들은 자신들이 익숙해져 있는 빛이 전부라고 여겼고, 그 빛이 아니면 빛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또 빛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지만, 그 밝은 빛이 어두움에 익숙해져 있는 그들의 눈에 비춰졌을 때, 그 눈부심이 주는 잠시의 불쾌함을 견디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완전한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도 저마다 아직은 죄성을 가지고 있고 그래서 평안함과 당장의 유익을 더 좋아하는 탐욕이 속에서 꿈틀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누구나 저마다 하나님께서 이 곳만은 건드리지 말았으면 하는 어두운 구석을 한 두군데 쯤은 다 가지고 있게 마련입니다. 여기에 칼날같은 말씀의 빛이 비춰지는 것은 당장은 불쾌하고 괴로운 일입니다. 그러나, 이런 불쾌함과 괴로움 때문에 눈을 감아버리거나 그 불을 꺼버리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그 부분만큼은 여전히 어두움 속에 남아있을 수 밖에 없고, 그 어두움이 우리가 온전한 빛 가운데로 나아가 그 빛이 주는 자유와 생명을 얻지 못하게 됩니다. 빛은, 우리가 익숙해져 있지 않은 강한 빛은 항상 우리 눈을 시리게 하게 마련입니다. 눈이 부시더라도 눈을 떠야 합니다. 불쾌해도 그 빛을 통해 나를, 그리고 세상을 보는 연습을 해야하며, 그 빛 속에 들어있는 참된 생명을 선택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주신 그 풍성함을 향해 한 걸음씩 내딛어야 합니다. 


5절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빛이 어두움에 비치더니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 “빛이 어두움에 비치더니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우리 삶 속에서는 이런 안타까운 일이 일어나서는 안될 것입니다. 더 이상 반복되어서는 안됩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아침에는 내 속에 나도 모르게 숨겨놓은 어두움은 없는지 한 번 정직하게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나도 모르게 밝은 빛이 비춰지는 것을 피하고 있는 그런 부분이 없는지 말입니다. 그리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빛 되신 주님 앞에 나의 어둠을 드러내기 싫지만 드러내게 해 달라고, 드러내고 주님의 비추심을 받게 해 달라고, 그래서 내가 온전히 빛의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 밝음과 풍성함 속에서 자유롭고 충만하게 살아가게 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우리가 그렇게 용기를 낸다면 주님께서는 우리의 어두운 부분을 가장 빛나는 부분으로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존재와 삶이 빛되신 주님의 비추시는 은혜 속에서 날마다 더욱 더 밝고 충만해 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