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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2.09.06 새벽.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요한복음 4)


요0119to28 -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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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요한복음 1장 19-28절


잘 알려진 우화 중에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에 왕과 왕족은 주로 당나귀를 타고 다녔습니다. 하루는 왕이 당나귀를 타고 시찰을 나갔습니다. 왕이 타고 갈 당나귀이니 아주 멋있게 꾸몄겠죠? 그렇게 멋지게 꾸민 당나귀를 타고 왕이 길을 가자 모두들 왕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무릎을 꿇고 엎드렸습니다. 그러자, 당나귀는 그것을 보고 사람들이 자신이 멋있어서 자기에게 그러는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 당나귀는 그런 생각으로 한 참 가다 말고 길 가운데에 거만하게 섰습니다. 시종들이 아무리 끌고 가려고 해도 말을 듣지 않습니다. 고개를 빳빳히 세우고 눈을 지긋이 감고 거드름을 피울 뿐이었습니다. 이 당나귀의 운명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당나귀를 아름답게 꾸민 것은 그 위에 왕이 타야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당나귀에게 절을 한 것은 그 당나귀가 왕을 그 위에 태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나귀가 귀하게 여김을 받은 것은 모두 왕 때문이었고 당나귀가 받은 그 모든 귀한 대접들은 실은 모두가 다 왕과 연관되어 있는 것들인데 당나귀만 그 사실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우스운 이야기이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이런 사람을 정말 많이 만나게 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예수를 믿고 몸된 교회의 지체가 되면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소명을 주시고 그에 따른 직분을 주십니다. 그리고 때로 우리는 그 직분의 종류와 무게에 따라서 조금 다른 대접과 귀히 여김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직분이 우리에게 어떤 대우를 받게한 들, 우리는 그것이 나 자신이 원래 가지고 있는 귀중함 때문에 받는, 내가 다 받을만해서 받는 대접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 직분의 귀함, 그리고 그 직분을 가지고 있는 자들의 귀함은 다 그 직분을 맡기신 분이 귀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 역할이 왕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 역할을 통해서 온 우주의 왕이신 가장 높으신 하나님을 섬기고 있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약 우리가 내가 맡은 일로 인해서 스스로를 높이려 들거나, 지금 받고 있는 귀한 대접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거나 심지어 나를 높이 대우하지 않는다고 해서 마음이 상한다면 우리는 우화 속의 당나귀가 범한 우스꽝스러운 실수를 범하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그런 의미에서 우리에게 주님을 섬기는 것이 어떤 것인가 하는 모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정말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사람입니다. 그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수많은 사람들이 따라다녔고, 예수님보다도 훨씬 더 많은 제자들을 두고 있었습니다. 그가 회개를 외치면 수많은 사람들이 죄에서 돌이키고 그의 앞에 고개를 숙이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메시야라고 착각할 정도였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어느 정도로 크게 생각하고 있었는가 하는 것은 나중에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면서 죽은 세례 요한이 살아온 것이라고 까지 한 것을 보면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바리새인들이 보낸 사람들과 세례 요한의 대화가 나옵니다. 사람들이 묻습니다. 당신이 메시야냐고 묻습니다. 세례 요한은 아니라고 대답합니다. 네가 엘리야냐고 묻습니다. 엘리야는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최고의 선지자입니다. 엘리야는 메시야가 오기 전에 꼭 와야만 하는 선지자입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은 자신은 엘리야도 아니라고 대답합니다. 사람들은 그럼 누구냐고 대답하라고 따지고 듭니다. 그 때 세례 요한은 자신은 그저 소리라고 말합니다. 엘리야가 아니라, 그 엘리야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사실 세례 요한은 오기로 되어 있던 엘리야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 보다 먼저 가서 그 분을 위해 길을 준비하라고 보내신 사신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은 자신은 엘리야가 아니며 그저 선지자의 외치는 소리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그가 자신이 엘리야 인 것을 알지 못했을까요? 아닙니다. 알았습니다. 그것을 알았기에 너무나도 확실히 알았기에 그는 자신의 직분을 그렇게 정확하게 행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자신은 그저 소리일뿐이라고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그리스도의 영광을 가리우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좋은 종, 참된 종은 어떤 종입니까? 일을 잘하는 종도 좋은 종이지만, 그 주인의 영광을 높이는 종이 진짜 좋은 종입니다. 26절과 27절을 보시면, 세례 요한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이가 섰으니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라고 말합니다. 신들메는 샌달의 가죽끝을 말합니다. 이 끈을 푸는 것은 노예나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은 자신은 그런 일조차 감당하기에도 부족하고 벅차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그러한 위대한 사역과 수많은 사람들의 환호와 추종에도 불구하고 사진은 예수님의 종될 자격조차도 부족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사람들로 부터 받은 인기와 영광이 어떠했습니까? 요즘 말로 하면 그는 완전히 스타였습니다. 그것도 아주 큰 스타였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하나님 다음 가는 사람으로, 선지자로 심지어는 메시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을 가리켜서 자신은 그의 종이 될 자격도 없다고 한다면, 예수님의 영광은 어떠하다고 말하는 것이 됩니까? 그의 그 말 한마디 속에서 주님은 얼마나 높아지고 있습니까? 그는 참된 종이었습니다. 주인의 영광을 가장 크고 빛나게 드러낼 줄 아는 가장 충성스런 종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진실된 종이란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영광을 보잘 것 없게 여기는 사람,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자신의 영광을 기꺼이 내려놓을 수 있는 사람, 자신의 면류관을 던져서 주님께만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로 우리를 높이십니다. 아주 높이십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것은 바로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더욱 영광을 받으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영광을 보며 하나님께로 나아오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높여 주실 때, 그 때 우리가 세례 요한처럼 자신을 가장 낮추어야만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의 면류관을 그 분께 드릴 때 말입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그렇다고 우리가 낮아집니까? 진짜로 업신 여김을 받습니까?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당장은 진짜로 그런 낮아짐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낮아짐은 영원한 낮아짐이 아닙니다. 세례 요한은 이렇게 스스로 낮아졌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빛나게 하기 위해서 자신의 빛을 어둡게 하였지만,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빛나는 별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일컬어 “여자에게서 난 자 중에서 이보다 큰 자가 없다”고 평가해 주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세례 요한을 향한 평가였으며 또한 영원한 칭찬이었습니다. 


자신을 낮추는 것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서 어쩌면 마땅해 보이는 자신의 영광을 내려놓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나의 작은 영광이 그리스도의 그 무한한 영광을 더욱 더 빛나게 드러내는 도구가 된다면 피조물인 우리들에게 그것보다 큰 영광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인을 사랑하는 참된 종들에게는 이보다 기쁜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나를 낮춘만큼 그 만큼 하나님께서는 나를 칭찬해 주실 것이고, 그만큼 더 큰 하늘 영광을 나에게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높이려고 하는데, 하나님이 우리를 끌어내리시는 것보다는 우리는 스스로를 낮추려고 하는데 하나님이 우리를 높여주시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 훨씬 더 지혜롭고 유익한 것이라는 생각 말입니다. 


우리 모두 다 이러한 지혜로운 하나님의 종으로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더욱 높임을 받으시고, 그래서 사람들이 우리가 보는 하나님의 영광을 우리를 통해서 보게되며 하나님께로 나아오도록 하는 주님의 참된 종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 만나는 그 날 “착하고 신실된 종”이라는 주님의 그 영원한 칭찬과 영광을 상으로 얻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