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2.09.12.새벽 -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요한복음 8)


20120912D.mp3.zip


요0143to51 -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1).pdf




     성경본문 : 요한복음 1장 43-51절


     어제에 이어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께서 예수님의 제자들을 불러 모으는 이야기가 계속됩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에서 제자로 삼으시는 사람은 두 사람인데, 한 사람은 빌립이고 다른 사람은 나다나엘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빌립은 아주 단순하게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합니다. 시몬에게 게바라는 이름을 붙여주신 그 이튿날 예수님께서 갈릴리로 나가시다가 빌립을 만났는데, 바로 그 자리에서 빌립에 예수를 따랐고, 그 때부터 에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빌립의 즉각적인 결단은 참 높이 사줄만하지만 정말 밋밋합니다. 무슨 체험이나 특별한 감동도 없이 그저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 반면에 나다나엘은 나주 특별한 체험을 하고서 예수님의 제자가 됩니다. 


     우리는 믿음생활을 하면서 특별한 체험이나 경험을 한 사람들을 보면 나도 그 경험을 하고 싶어서 굉장히 부러워하는 것같습니다. 나도 그런 체험을 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기도 하구요. 물론 그런 체험들이 우리의 신앙에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항상 그렇게 크게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죽다가 살아난 사람들 중에서도 나중에는 흐지부지한 신앙생활을 하고 심지어는 예수를 떠난 사람들도 굉장히 많으니까요. 그리고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큰  체험을 하고서야 비로소 예수를 믿는 사람들과 그저 순적하게 평범하게 들려오는 복음을 믿고 예수를 믿는 사람들과 누가 더 마음밭이 좋은 사람일까요? 일률적으로 평가하기는 힘들지 몰라도 해도 분명히 순적하게 예수님을 믿게 되는 사람들의 마음 밭이 더 좋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충격적인 경험을 하고서야 예수를 믿게되는 사람들은 그만큼 마음이 단단하거나 혹은 어딘가 깨어져야만 예수님께 마음을 열 수 있으니까 예수님께서 그런 특별한 체험을 하게 하는 것이지 그것이 꼭 그를 더 특별하게 사랑해서 그렇게 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떤 경험을 하고서 믿음을 갖게 되었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다음, 그렇게 예수를 믿은 다음 내가 얼마나 그 분께 더 가까이 다가갔느냐, 얼마나 더 그 분을 닮게 되었느냐, 얼마나 그 분의 제자다운 제자로 성숙해 갔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특별한 체험이 없다고 불안해 하시거나 부러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게 오히려 더 좋은 것입니다. 그게 가장 복된 것입니다. 좋은 마음밭으로 순적하게 예수님을 믿게 되었으니 그것보다 더 큰 복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특별하게 예수를 믿게되신 분들은 상처받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 분들 입장에서는 그게 또 특별한 은혜죠. 그 경험이 없었으면 예수님을 믿지 못했을지도 모르니까요. 그저 서로 비교하지 마시라고 드린 말씀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나에게 가장 적절한 은혜를 통해 예수를 알게 되었고 지금도 그런 은혜 속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내게 베풀어 주신 그 은혜가 가장 적절한 은혜라는 것에 감사하며 그저 신실하게 주님을 따르기만 하면 됩니다. 자랑할 필요도 없고, 기죽을 필요는 더더욱 없습니다. 이제는 누구 앞에서 내 경험을 자랑하지도 마시고, 또 누가 자랑할 때는 이렇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나는 당신과는 다른 경험을 통해 예수님을 믿게 되었지만 그 경험이 나에게는 가장 크고 놀라운 은혜다’라고 말입니다. 각자가 받은 하나님의 은혜는 서로 비교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먼저 빌립을 따랐던 나다나엘은 빌립의 이야기를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실제로는 전혀 믿지 않았죠. 왜냐하면 그가 알기에 이스라엘의 구원자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나게 되어있지 나사렛 출신일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친구가 하도 한 번 와 보라고 졸라대니 그저 마지 못해 빌립을 따라 나섰습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께 도착하자 마자 완전히 무장해제를 당하고 맙니다. 그의 모든 선입견과 생각은 여지 없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을 보자 마자 아주 기뻐하시며 이렇게 칭찬해 주셨습니다.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진짜 이스라엘 사람, 그 속에 간사한 것이라곤 없는, 자기 입장이나 유익을 위해서 거짓을 말하지 않는, 그만큼 쉽게 흔들리지 않는 신실한 진짜 이스라엘 사람! 이것이 예수님의 나다나엘에 대한 평가였고 또 칭찬이었습니다. 그러나 역시 나다나엘은 그 속에 간사한 것,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이 없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저 같으면 “허허, 그러십니다. 역시 사람 볼 줄 아십니다그려.”라고 너스레를 떨었겠지만, 나다나엘은 오히려 정색을 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성경이니 이렇게 점잖게 번역한 것이지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당신이 나에 대해서 뭘 안다고 그런 말을 합니까?”라는 정도의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나다나엘을 무너지게 만들었습니다. 

       바로 이 대답이었습니다.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무화과 나무 아래서 너를 보았다” 우리는 그가 무화가 나무 아래서 무엇을 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기록되어 있지 않으니까요. 그렇지만, 그가 예수님의 그 말씀에 그렇게 무너져 내린 것을 보면, 그 무화과 나무 아래라는 장소는 나다나엘에게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은밀한 장소였고, 또 자신을 투명하게 내어놓고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그런 자리였던 것 같습니다. 나다나엘은 거기서 자신을 보았다면, 그래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었다면, 그는 분명히 보통 인간은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하나님이나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소리치며 엎드립니다.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당신은 이스라엘의 왕이십니다. 우리가 기다리던 약속된 메시야이십니다.” 바로 그 다음부터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좇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나다나엘이 예수님의 제자가 된 이야기의 전말이지만, 우리는 오늘 이 이야기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제자가 된 우리에게 제자됨의 목표로 삼기를 원하시고, 또 될 수 있는대로 가까이 가기를 원하시는 하나의 목표지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을 보면서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진짜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당시에 자신을 이스라엘 그러니까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수없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중에서 참된 이스라엘 사람을 거의 찾아보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나다나엘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흥분하시게 하기에 충분했던 것입니다. 나다나엘이 참 이스라엘 사람인 이유는 아주 간단했습니다. 뭔가 대단한 일을 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단지 그가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는’ 그런 사람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비록 나다나엘 속에는 여전히 부족한 것이 많고 그래서 더 다듬어지고 빚어져 가야만 했지만 그의 간사하지 않은 됨됨이는 하나님을 기뻐하게 하기에 충분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진정으로 원하시는 신실함과 전혀 다른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을 참 이스라엘이라고 부르신 그 이유 속에서 그 분이 진정으로 원하는 참으로 중요한 한가지가 무엇인지를 보게 됩니다. 그 분이 원하시는 것, 그 분이 제자된 우리들에게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감춰지거나 숨겨진 의도 없이 하나님을 사랑하며 섬기는 사람, 결코 자기 입장이나 유익 때문에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태도를 바꾸지 않는 신실한 사람. 주님은 우리가 이런 사람, 이런 참 이스라엘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안에서 점점 커져가고 진해져가는 나다나엘의 그림을 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혼자 있을 때, 나만이 아는 무화과 나무 아래 있을 때, 진실하고 투명하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사람, 거기서 회복된 간사함 없는 신실함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그런 한 마음을 지닌 올곧은 사람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하면 하나님이 나를 기뻐하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대부분의 한국성도들의 사고방식입니다. 물론 주님은 우리 각자에게 우리가 감당해야 할 짐을 주셨고 우리는 그 짐을 열심히 지고 가야만 합니다.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우리 주님을 기뻐하시게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그 분을 기쁘게 해 드리려면, 그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나를 참 이스라엘 사람으로 빚어가시도록 내어 드려야 하며,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내 마음 속에 있는 간사한 것들과 싸워나가야 합니다. 나만의 무화과 나무 아래에서 아직도 남아있는 나의 간사함을 모두 드러내 놓고 하나님 앞에서 아픈 씨름을 계속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주님을 닮은 참 이스라엘이 되어져 갈 것이고, 주님은 우리 소겡서 점점 더 진해져 가는 나다나엘의 모습을 보며 기뻐하고 또 기뻐하실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은 우리에게 하루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조금 더 참 이스라엘로 빚어져 갈 수 있는, 우리 속의 간사함을 없앨 수 있는 영광스러운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렇게 피조물인 우리가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진실로 기쁘게 해 드릴 수 있는 귀한 기회를 주셨습니다. 하루를 사는 동안, 그 하루만큼 참 이스라엘로 빚어지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오늘 밤 잠자리에 들 때, 나를 향해 빙긋이 웃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기쁜 미소를 보는, 그 분의 그 기쁨을 맛보는 복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