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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2.09.13.새벽 -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2(요한복음 9)


20120913D (#1).mp3.zip


요0143to51 -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2).pdf


      


     성경본문 : 요한복음 1장 43-51절

     시몬도 하나님께서 그 이름을 바꿔주신 사람들 중의 하나이지만 구약에는 그 이름이 아주 극단적으로 바뀐 한 사람이 나옵니다. 그는 바로 야곱입니다. 야곱이라는 이름은 발꿈치라는 뜻이지만, 이 속에는 속이는 자, 그러니까 사기꾼이라는 의미가 들어있기도 합니다. 그런 야곱의 이름을 하나님께서 ‘하나님과 싸우는 자’ 혹은 ‘하나님과 싸워 이긴 자’라는 이름을 붙여 주셨으니 야곱만큼 그 이름이 극단적으로 바뀐 사람은 성경에 또다시 없을 것입니다. 야곱은 그야말로 그 이름답게 살아갔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인생은 거짓과 속임수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형을 속이고 아버지를 속이고, 삼촌을 속이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서도 다시 형을 속이고... 야곱은 말 그대로 간사함의 대명사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그를 단 한 번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용서하시고 또 용서하셨습니다. 그리고 아직 변화되지도 않은 그에게 “하나님과 싸우는 자”, “하나님과 싸워 이긴 자”라는 이름을 붙여 주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야곱 안에서 새롭게 태어날 참된 이스라엘을 기대하셨기 때문입니다. 야곱 안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할 참 이스라엘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전혀 이스라엘 다워지지 못했습니다. 천하에 간사한 자, 사기꾼의 자손들이 이스라엘이라는 영광스러운 이름을 얻었지만 여전히 야곱을 흉내내며 살았습니다. 전혀 신실하지 못하고 자신의 이익에 따라서 이리 저리 흔들리는, 하나님을 배반하는 일을 밥먹듯이 하는 그런 야곱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말씀이 육신이 되신 성자 하나님께서는 나다나엘 속에서 참 이스라엘을 보았습니다. 그 속에 간사함이 없는 사람, 신실하고 우직한 참된 이스라엘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기쁨이 어떠했겠습니까? 그 흥분이 어떠하셨겠습니까? 보자 마자 당사자를 앞에 놓고 “봐라, 응? 저 사람 좀 봐! 그 속에 간사함이 없다, 간사함이 없어!”라고 사탄 앞에서 자랑할만 하지 않겠습니까? 나다나엘은 얼마나 참된 이스라엘 사람인지 그런 칭찬을 듣고도 꿈쩍하지 않았습니다. 그 정도로 올곧은 사람이었습니다. 그 어떤 사람도, 그 어떤 칭찬도 이 사람을 흔들지는 못할 것입니다. 이런 그에게 예수님께서 드디어 직격탄을 날리셨습니다. “네가 무화과 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다” 그 말씀 앞에 예수님의 메시야되심을 받아들인 나다나엘에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무화가 나무 아래에서 보았다고 나를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나다나엘은 놀랐습니다. 그 놀라움 때문에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고 고백했습니다. 아직은 충분하지고 고쳐야 할 것도 많지만 그 믿음을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게 다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더 놀라운 일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이 열리고 천사가 인자, 그러니까 예수님 위에 오르락 내리락하는 그런 놀라운 광경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 그림은 우리가 어디서 많이 본 그림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야곱이 광야에서 돌을 베게 삼아 잠들었을 때, 꿈에서 본 환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꿈과 예수님의 말씀은 딱 한 군데가 다릅니다. 틀린 그림 찾기 한 번 해 볼까요? 어디가 다를까요? 그렇습니다. 야곱의 꿈 속에서는 천사가 사다리 위에서 오르락 내리락합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는 사다리가 아니라 인자, 그러니까 예수님 위에서 오르락 내리락 합니다. 그것이 다른 점입니다. 흔히들 구약을 신약의 그림자라고 말입니다. 그림자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림자만 보고는 그 그림자를 만들어 내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야곱이 본 하늘의 사다리도 실제로는 어떤 것의 그림자였습니다. 그것은 야곱을 향한 하나님의 복된 약속이었던 것만큼은 분명했고 그래서 야곱은 그 환상을 보며 많은 위로를 받았겠지만, 야곱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하게는 알지 못했습니다. 그렇기는 창세기에서 그 이야기를 읽는 우리도 마찬가지였구요. 그런데, 요한복음에서 그 실체가 드러납니다. 진짜 몸체가 무엇인지가 드러납니다. 사다리....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인간이 죄를 지은 후에 사람은 하늘과의 직접적인 통로가 모두 끊어지게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니 하늘로 부터, 하나님으로 부터 오는 가장 좋은 것들, 최고의 복들은 다 끊어지게 된 것이죠. 그래서 하늘에서 땅으로 좋은 것이 내려오기 위해서는 그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다리가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사다리가 필요하게 된 것입니다. 야곱은 사다리만 보았습니다. 그 사다리를 통해 오르락 내리락하는 천사들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복을 주시겠다는 사인이라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환상의 참된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 환상이 가리키는 진짜 복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비록 그가 이스라엘이라는 엄청난 이름을 얻었어도 그는 그 진짜 복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의 후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것은 그들도 자기 조상 야곱처럼 그 속에 여전히 간사함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의 후손 중에서 진짜 이스라엘 사람다운 이스라엘 사람,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는 사람 나다나엘이 나타났습니다. 이제야 비로소 보아야 할 것을 보게 될 사람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진짜 그림을 보여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그 가장 영광스럽고 가장 은혜로운 그림을 말입니다. 사다리는 그림자였습니다. 진짜는 예수 그리스도 였습니다. 야곱의 사다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바로 저 하늘과 이 땅을 잇는 유일하고도 참된 사다리임을 알려주는 표지판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조금 이상한 곳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에게 더 놀라운 것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해 놓고, 정작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실 때는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듣는 이들을 바꾸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처음 시작은 나다나엘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첫번째로 발견한 참 이스라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참 이스라엘 사람이 나다나엘 한 사람에게서 끝나지 않을 것을 아셨습니다. 비록 지금은 참 이스라엘 사람의 모습과 거리가 멀어도 제자들 역시 참 이스라엘 사람이 될 것을 내다보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나다나엘에게 주셨던 그 복된 약속을 예수님을 따르는 다른 제자들에게까지, 그리고 오늘날을 살아가는 제자들인 우리들에게까지 확장시키고 계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 눈 앞에는 더 이상 사다리가 놓여있지 않습니다. 더 이상 무엇인지도 모르는 것을 쳐다보면서 그것을 통해 선한 것, 좋은 것이 주어지기를 갈망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제 우리의 눈 앞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놓여있습니다. 있다가 없어지는 사다리가 아니라, 하늘과 땅을 영원히 이어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놓여있습니다. 그 십자가가 바로 우리를 위한 모든 참되고 좋은 것들의 유일하고도 확실한 통로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불안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더 이상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른 곳을 기웃거릴 필요는 더더욱 없습니다. 그게 영원한 것이든, 혹은 우리가 여기 이 땅 위에 사는 동안 필요한 일시적인 것이든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선한 것은 다 그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것을 믿고 여기 의지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믿음 안에서 우리의 삶은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주시는 선한 것들로 채워져 갈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미 그 분의 모든 것인, 가장 귀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그 십자가 위에서 우리에게 아낌없이 내어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너희가’ 그러니까 또 다른 나다나엘, 또 다른 참 이스라엘인 너희들이 이 약속의 주인공이 될 것이라고 철석같이 약속하셨습니다. 보증서까지 붙이셔서 “진실로 진실로”라는 도장을 찍어서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부르심은 언제나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응답했을 때에만 유효해 집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참 이스라엘에게 주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간사함이 없는 사람으로 부름받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그 부르심에 응답해야 합니다. 우리 속에 간사함이라는 쓴뿌리가 자라나고 있지는 않은지, 혹시 내가 나의 입장이나 이익 때문에 이리 저리 요동하고 있지는 않은지 정직하게 살피고 상황이 이렇든 저렇든, 지금 눈에 보이는 것이 있든 그렇지 않든 우직하고 신실하게 하나님이 부르신 참된 이스라엘의 자리를 지켜나가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를 이 시대의 나다나엘로 부르신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해야 합니다. 


      십자가는, 그 십자가의 참된 부요함은 아무에게나 그 참 모습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참 이스라엘에게만, 그 속에 간사함이 없는 자들에게만 그 참 모습을 드러내며, 우리 속에서 나다나엘의 모습이 뚜렷해지는 딱 그만큼만 그 부요함과 능력을 드러내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인자 위에 천사가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고, 너희가 그 영원하고 참된 주인공이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제 마음 속에서 간사한 것을 몰아냅시다. 아직도 이 세상과 하늘나라, 영원한 것과 일시적인 것, 보이지 않는 참된 것과 눈에 보이는 거짓된 것 사이를 왔다 갔다하는 간사함이 있다면 그것을 우리의 무화과 나무 아래로 가져갑니다. 가져가서 처리해 버립시다. 사랑하는 여러분을 권면합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참 이스라엘로 살기로 작정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올곧게 그길로 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 부요하고 영광스러운 십자가를 밝히 보여 주실 것입니다. 사다리 뒤에 숨겨진 그 넉넉하고 능력있는 십자가를 보고 또 누리게 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경험했던 그 어떤 일보다도 더 큰 일을 보는 기쁨을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가 이 시대의 나다나엘이 되어 변함없이 십자가를 바라봄으로 그 안에 있는 약속하신 참되고 풍성한 것들을 받아 누리며 살아가는 충만하고 능력있는 삶을 살게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