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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2.09.26. 새벽 - 세상이 구원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한복음 18)


요0316to21 - 세상이 구원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pdf


20120926D (#1).mp3.zip




성경본문 : 요한복음 3장 16-21절


      ‘어떤 일의 명암’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밝은 부분이 있으면 어두운 부분이 있다는 뜻이죠. 안 그러면 좋겠는데 진짜 가치가 있는 일일수록 밝은 면이 밝은 만큼 어두운 면은 더 어둡습니다. 햇빛이 가장 강할 때 그 때 그림자는 가장 어둡게 마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에도 명암이 있습니다. 그 빛이 밝은만큼 그만큼 더 어두운 그림자가 있습니다. 아무튼 거듭난 사람에게는 하늘나라를 볼 수 있는 복이 주어지지만 그 반대로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하늘나라를 볼 수 없게되기 때문입니다. 또 예수님은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처럼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불뱀에 물렸을 때, 모세가 만들어서 장대꼭대기에 매달아 높이 들었던 놋뱀을 처다본 사람은 살았지만 끝까지 그 뱀을 쳐다보지 않은 사람은 결국 죽음을 맞이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 일에도 삶과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명암이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그 분이 나의 죄때문에 죽었고 또 나의 생명을 위해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는 사람은 영생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를 보며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거나 혹은 십자가가 말하는 사실을 믿지 않으면 그는 영원한 죽음을 당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항상 어떤 일의 밝은 부분은 좋아하지만 그 일의 어두운 부분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실제로는 굉장히 못마땅해 하죠. 구원이라는 사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거듭나고 십자가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 구원받는 사람들을 보면서 감사하고 기뻐해야 하는데, 그 반대의 감정을 더 강하게 갖습니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뭐고, 믿지 못하는 사람은 어떻게 되느냐고 묻습니다. 애초부터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지 않는 사람들은 버리시기로 작정하신게 아니냐고 항변합니다. 그 사실 때문에 화를 내기도 하고 실제로 그래서 자기는 하나님을 믿지 않겠다고 당당하게 불신앙의 이유를 밝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서 무지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질문이고 또 항변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었던 본문은 바로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주고 있습니다. 


       어제 본문 마지막 절이었던 15절은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습니다. 이것이 구원의 대원칙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해서 구원을 허락하셨지 그 반대가 아닙니다. 그래서 16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구원은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주어진 선물입니다. 요한은 분명히 말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많은 경우 이 구절에 나오는 세상이라는 말을 믿는 사람들이라고 해석하지만 그러면 이 이야기가 복잡해 집니다. 그런 해석이 나오는 이유는 자꾸 결론만 생각해서 입니다. 결국 믿는 자들만 구원을 얻게 되니 그러면 처음부터 하나님은 믿는 자들을 위해서 독생자를 주신 것이 아니냐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이 구절만 놓고 생각해서 그렇지 뒤에 이어지는 구절을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또 요한은 요한복음과 요한 1,2,3서에서 세상이라는 말을 한 번도 그렇게 사용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여기만 그렇게 해석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은 이 세상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 대적하는 사람들로 가득 찬 이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너무 너무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죽도록 내어주셨습니다. 그것은 그 사람들 중에서 누구든지 믿기만 하면 죽음에서 건지시고 영생을 주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세상을 위해서 내어주신 것은 절대로 이 세상을 심판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려면 아얘 가만히 계시다가 다 멸망으로 몰아넣으면 그 뿐이지 굳이 아들을 보내실 이유가 없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십자가를 사랑과 구원의 도구가 아니라 진노와 심판의 도구로 이해하는 것은 정말 말도 안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세상 모두를 위해서 독생자를 보내셨지만 그 세상 모두가 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끝까지 놋뱀을 거부하고 죽음을 택하는 사람이 있었던 것처럼 끝까지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지 않고 영원한 멸망을 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처음부터 멸망을 목적으로 아들을 보내셨기 때문이 아니라 이 세상에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사랑하신 이 세상에는 결코 아들을 믿지 않으려 하는 교만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이 아들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고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그렇지만 그래서 아들로 말미암지 않고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정반대의 원칙이 생겨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이 쪽에 속한 사람들은 그저 어쩔 수 없이 생겨나는 피해자들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멸망받을 수 밖에 없는 죄를 고집한 사람들이 됩니다.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빛으로 오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빛이 싫었습니다. 그 이유는 빛이 싫어서라기 보다는 자신이 어둠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 어둠을 떠나기 싫어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려면 악을 버리고 악을 떠나야 하는데, 빛으로 나아오려면 어둠과 어둠에 속한 것들을 떠나야 하는데, 자신이 어둠에 있다는 사실과 또 그 어둠을 떠나기가 싫어서 빛이신 예수님을 거절하고 거부하며, 오히려 그 빛을 꺼버리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빛을 거부하면 그는 빛만 거부하는 것이 아닙니다. 실은 그 일을 통해서 자신이 빛보다는 어둠을 좋아하고 거기 머무는 것을 더 좋아한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더 깊은 어둠, 더 이상 헤어나올 수 없는 어둠으로 몰아넣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지 않으면, 빛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이미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정확하게 말씀드리면 이미 자기가 자기 자신에게 영원한 죽음이라는 형벌을 선언한 셈이 되는 것입니다. 믿지 않을 때, 그는 스스로 자신의 죄를 확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너무 너무 사랑하셔서 이 세상을 위해 그 아들을 죽음에 내어주셨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모든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애초에 우리는 사랑하고 다른 사람들은 사랑하지 않으시고...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사랑하십니다. 그렇지만 하나님도 어쩔 수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이 빛보다는 어둠을 선택한 사람, 그래서 영생이 아닌 멸망을 선택한 사람들은 하나님도 구원하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보다도, 하나님의 그 지극한 사랑보다도 악을 선택하기 위해, 하나님의 가장 큰 사랑을, 그리고 그 사랑이 만들어 내는 완전한 의를 저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께 의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가 용납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멸망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 풍성한 사랑의 뒷면에는 언제나 그 분의 엄격한 공의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마음에 있는 사랑과 공의 중에서 하나만을 따라 행동할 때도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이 두 가지가 만족되는 일만 하십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은 하나님이 되실 수 없으시니까요. 구원도 이 틀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눈에 죄인들을 멸망 가운데 두시는 엄격한 하나님의 공의만 보인다고 해서 그 크신, 아들을 내어주신 사랑이 없는 것이 아니며, 우리의 눈에 한없는 사랑만 보인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공의를 포기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십가가는 그 완전한 증거입니다. 하나님이 사랑만 챙기셔도 되시는 분이시라면 굳이 우리 죄를 위해서 굳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희생제물로 삼으실  필요가 없으셨을 것입니다. 그냥 구원하시면 그만이니까요. 반대로 공의만 챙기셔도 되시는 분이시라면 그 분은 우리를 구원하실 이유가 없으셨을 것입니다. 죄인이 멸망당하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께는 가장 공의로운 일일 수 밖에 없으니까요. 


       그 분은 우리를 너무 사랑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길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죄가 걸렸고, 그래서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대가를 치르실 만한 가치가 있는 분이 죽음을 당하셔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가장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고 가장 영광스럽게 드러난 장소입니다. 그 지극한 사랑과 엄격한 공의가 한꺼번에 빛을 발한 곳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하나님의 가장 큰 지혜이기도 한 것입니다. 


      우리가 이 십자가를 바라본다는 것, 그리고 이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또 그 믿음으로 영생을 얻게되었다는 것은 또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그리스도를 본다는 것, 그 분의 십자가를 본다는 것은 그야 말로 은혜 위에 은혜라고 밖에 표현할 길이 없는 것 같습니다. 


     십자가의 지혜를 묵상하는 것은 우리의 영혼을 즐겁게 하고 또 만족하게 합니다. 우리는 거기서 도저히 함께 할 수 없는 사랑과 공의가 서로 어울려 춤추는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묵상하는 것은 우리의 영혼을 은혜로 가득차게 합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내어주신 하나님의 그 지극한 사랑을 만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항상 십자가를 더 많이 생각하시고, 또 더 많이 알아가셔서 십자가를 더 많이 사랑하게 되는 복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