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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2.09.27.새벽 -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한복음 19)


요0322to30 -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pdf


20120927D (#1).mp3.zip




     성경본문 : 요한복음 3장 22-30절


     요즘 교계가 부자지간의 교회 세습문제로 시끄럽습니다. 그제 보니 감리교 쪽에서는 세습금지 법안을 통과시켜 이제 감리교단에서는 목회자가 자기 자녀나 사위에게 교회를 물려주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어떤 사람이 자신의 아버지가 장로로 있는 교회의 담임목회자가 되는 일도 금지되었다고 합니다. 


      애초에 교회세습이라는 것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한국의 대형교회에서는 아주 당연한 듯이 권력과 영향력을 악용해서 그렇게 해오고 있었던 것이죠. 그런데, 교회세습은 이 땅의 목회자들이 자기 자신의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를 몰라서 생겨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교회를 위한 어떤 자리로 부름받았음이 분명하지 않으니까 교회를 마치 목회자 자신의 것인양 생각하게 되고 마치 타던 자동차 물려주듯 교회 세습을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된 것입니다. 바라보는 사람들은 모두가 다 눈쌀을 찌뿌리고 있는데 자신들만 전혀 분별하지 못하고서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또 다시 세례 요한을 만납니다. 이제 하늘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도 바톤터치가 이루어져야할 때가 가까워졌습니다. 그런데, 다른 모든 일도 마찬가지이지만 예수님 앞서 세례 요한이 길을 닦아 놓으면 예수님께서 그 길을 이어받게 되어 있어서 그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두 분이 하시는 일이 겹치는 기간이 있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야 복음이 전해지는 일이 끊어지지 않고 계속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직 세례 요한이 잡히기 전이어서 요한은 해 오던 대로 애논에서 세례를 베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예수님도 유대 땅으로 가셔서 세례를 주시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사역이 겹치게 된 것이죠. 그런데, 아마도 이것 때문에 요한의 제자들과 한 유대인이 논쟁이 벌어진 것 같습니다. 아마도 그 유대인은 “너희 스승인 요한도 세례를 주고, 또 저기 저 예수도 세례를 주고 있는데, 저 세례는 뭐고, 너희 스승이 주는 세례는 뭐냐?”라고 의문을 제기했고, 요한의 제자들은 거기에 대해서 올바른 답을 알 수가 없었던 것같습니다. 또 그들은 자신들이 오리지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세례를 주시는 것이 못 마땅하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요한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전에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던 그 분이 세례를 주니까 사람들이 그리로 갑니다.” 요한은 제자들에게 처음에는 아주 상식적인 대답을 해 주었습니다.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이 말은 어떤 사람이 아무리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고 사람들이 거기 열광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만약 그가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이 아니라면 그 사람의 영향력이나 혹은 그 아래에서 열광하는 그 사람들이 누리고 있다고 여기는 것들도 다 아무 것도 아니라는 뜻이었습니다. 주는 것도 받는 것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니, 누가 어디서 세례를 주고 또 그 사람에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열광하던 너희는 그런 것에 신경쓰지 말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제자들의 흥분을 달래놓고 본론으로 들어갔습니다. 

    “너희들은 마치 내가 그리스도라도 되는 것처럼 떠들어 대는데, 막상 내가 그리스도가 아니고 그리스도 앞에 와서 그 분의 길을 준비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증언해야 할 사람들은 너희들이 아니냐? 내 기쁨은 결혼식날 신랑이 누리는 기쁨이 아니라 들러리가 누리는 기쁨이다. 나는 그 기쁨으로 족하다. 결혼식에서 신랑이 주인공이 되어야지 들러리가 주인공이 되어서는 안되지 않겠느냐? 그는 흥해야 하지만 나는 쇠해야만 한다.” 


      세례 요한은 그 어떤 순간에도 철저히 자기에게 주어신 소명을 잊지 않았고, 또 거기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이 아무리 자신에게 열광을 하고 또 자신을 마치 메시아처럼 대접해 주어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결코 자기 자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메시야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고, 또 자신이 신랑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그 메시야를 섬기는 종이며, 결혼식의 들러리라는 것을 결코 잊지 않았고, 또 그 자리를 절대로 이탈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세례 요한이 사람들의 열광 때문에, 그 달콤함에 취해서 소명을 잊고 자기 자리를 이탈했다면 예수님의 사역은 굉장히 큰 방해를 받았을 것입니다. 이 땅에서 3년 반이라는 시간 밖에 사용하실 수 없었던 예수님께 그 기간이 아무리 짧은 동안이라도 굉장히 큰 손해가 되었을 것이구요. 그러나, 세례 요한이 자기 자리를 알고,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은 더 효과적으로 그리고 더 영광스럽게 그 바톤을 물려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의 자리가 점점 더 흥해야 하는 자리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해서 점점 더 쇠해져 가야 하는 자리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는 그런 자리에 머무는 것이 자신의 소명 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거기에 자신을 순종시켰습니다. 결국 나중의 일이지만 그는 완전히 쇠하는 길을 택하고 그렇게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져 갔습니다.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그가 굉장한 각오와 희생을 했으며 그래서 그는 굉장히 고통스러운 길을 갔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그가 택한 길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택하는 길은 아니었고 오히려 기피하는 길이었습니다. 아마 그 길을 가는 것이 굉장히 어려웠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어떤 일이 어렵고 좁은 길이라고 해서 그 길을 가는 것이 항상 어떤 사람에게 고통과 희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게 오히려 기쁘고, 그게 오히려 행복하며 만족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세례 요한은 29절에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도다”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도다.” 세례 요한은 지금 쇠하는 길로 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길의 끝이 어떨지, 그 길의 끝에서 자신이 선택해야할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렇다고 해서 그가 지금 슬퍼하고 있습니까? 그가 지금 침울해 하고 억울해 하고 있습니까? 그가 지금 억지로 그 길로 끌려가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까? 아닙니다. 그는 “나는 기쁨으로 충만하도다”라고 말합니다. 그저 기쁜 정도가 아닙니다. 기뻐서 죽을 지경입니다. 기쁨이 밖으로 흘러넘치고 있습니다. 저 멀리서 들려오는 신랑의 기뻐하는 목소리를 들으니 들러리를 섰던 그의 마음 속에 기쁨이 솟구쳐 올라왔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누구이든지 간에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두 분의 영광을 흥하게 하기 위해 쇠하여야 하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혹시 이런 삶이 답답해 보이고 또 손해보고 힘들기만 한 짐처럼 여겨지십니까? 그렇지만 그것은 오해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분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에게 맡기신 소명은 항상 우리를 기쁨으로 충만하게 합니다. 그 영광을 위해서 내가 쇠하는 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기뻐하고 또 기뻐할 수 있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지금 부르심을 따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무언가 큰 것 하나가 빠져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길을 억지로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례 요한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쇠하는 자리에 있고, 또 그 자리를 지키며, 그런 자리를 택하면서도 기뻐하고 또 기뻐할 수 있는 비결을 배우게 됩니다. 그는 분명히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부를 맞이하는 사람은 신랑이나 서서 그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여러분, 결혼식에 참석한 친구라고 해서 신랑이 기뻐하는 음성을 듣고 모두 다 크게 기뻐하는 것이 아닙니다. 친구의 행복해 하는 음성을 듣고 자기 일보다 더 기쁘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려면 그 친구를 사랑해야 합니다. 정말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친구의 기쁨이 나의 기쁨이 되고, 내가 흥하는 것보다 그 친구가 흥하는 것을 더 기뻐할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인간적으로 사랑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를 정말 사랑했습니다. 그 분이 기뻐하시는 것을 보는 일을 자신에게 기쁜 일이 생겼을 때보다 더 기쁘게 바라볼 정도로 그 분을 사랑했습니다. 그것은 그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빛과 생명을 가져다 줄 분이심을 그가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런 그리스도를 위해서 들러리를 서고, 그런 그리스도를 영광스럽게 하기 위해서 자신이 쇠하는 자리를 선택하여 가는 길을 결코 힘겹거나 짐스럽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기쁨은 그가 맡은 소명 자체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의 기쁨은 그 소명을 주신 하나님께, 자신이 섬기는 그리스도께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 속에서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보았고 그래서 그 일이 요구하는 짐을 가볍고 기쁘게 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은 짐이 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그 분의 흥하심을 위해서 내가 쇠해지는 일은 억지춘향이 되고 맙니다. 그리고, 그 일에서 만족을 찾으려고 하게 되어 있고, 그 일을 마치 자신의 영광을 위한 일인양 착각하면서도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됩니다. 그러면 결국에는 하나님도 기쁘게 해 드리지 못하고 자신은 그 일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의 온전함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결론적인 이야기이지만, 세례 요한이 예수님의 흥하심을 위해서 쇠하는 길을 택했을 때, 예수님은 그를 가장 높은 자리로 올려주셨습니다. 그에게 “여자에게서 태어난 사람들 중에서 가장 큰 이”라고 불러주셨습니다. 온 인류 중에서 가장 큰 사람이라고 인정해 주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랑하는 그 분의 영광을 위해서 자신이 쇠하는 길을 선택했을 때, 우리가 누리게 될 영광입니다. 세상에서는 잠시 낮아질지 모르지만 하늘나라에서는 영원히 높여집니다 .


       주님을 사랑하십시오. 내가 섬기는 그 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시고 그 분을 사랑하는 사랑에 흠뻑 빠지십시오. 그러면 그 분의 영광을 위해서 쇠하는 일은 그렇게 지기 힘들기만 한 짐은 아니게 될 것입니다. 나에게 주어진 나의 자리가 그렇게 지키기 힘들기만 한 자리는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 짐은 더 이상 짐이 아니라 나를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의 기쁨으로 인도해 주는 안내자가 되어줄 것입니다. 


     언제나 주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하는 주님을 위해서 쇠하는 자리에 머물러서 주님께서 주시는 들러리의 기쁨으로 충만한 그런 주님의 친구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