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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2.09.28. 새벽 - 증언을 받는 자는(요한복음 20)


요0331to36 - 그의 증언을 받는 자는.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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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요한복음 3장 31-36절

우리가 무언가를 간절히 원해도 그것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나 그것이 있는 장소를 모르면 결코 그것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또 진짜와 가짜를 구분할 수 있는 방법을 모르면 진짜를 눈 앞에 놓고도 진짜를 골라내어 가지고 갈 수가 없습니다. 요한복음 3장에는 두 개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니고데모와 요한의 제자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니고데모는 구원을 간절히 원했지만 그것을 어디서 얻어야 할지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모르면서도 계속해서 자기의 틀을 깨뜨리지 못했습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과 세례 요한의 차이점을 구분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자신들을 구원해 줄 메시아를 그토록 기다렸으면서도 자기 눈 앞에 있는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진짜가 아닌 것을 진짜라고 고집하느라고 진짜를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구원을 얻으려면 거듭나야만 하는데 그것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만 가능하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지 내가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해주었습니다. 그렇게 제자들에게 구원은 예수님에게만 있다는 것을 확정지어 준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은 이 두 가지 이야기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왜 예수님이 구원을 주시는 분이신지, 왜 그리스도일 수 밖에 없는지, 왜 우리는 그 분을 믿어야만 하는지를 아주 명확하게 이야기해 주고 있습니다. 먼저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그가 아무리 위대하고 훌륭하다고 하더라도 위로부터 그러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온 것이 아닙니다. 모두가 땅에 있는 부모를 통해서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철저히 땅에 속해있고 그들은 그 땅이라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때로는 세례 요한처럼 훌륭하고 탁월한 인물들이 나기는 하지만 그 역시 땅에서 태어나 땅에 속해 있으며 실은 땅의 일만을 말할 수 있을 뿐, 하늘의 일을 직접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위로부터 오시는 분은 그렇지 않습니다. 위로부터 오시는분, 그러니까 땅의 그 어떤 것과도 상관없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고 자신의 결정을 통해 이 땅에 오시는 이는 오히려 만물 위에 계십니다. 얼마나 차이가 많이 납니까? 모든 사람들은 땅에서 나서 땅에 속해있습니다. 그러나 위에서 오신 분은 그 땅이 아주 작은 일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만물 위에 계십니다. 사람이 그 만물 중의 극히 일부분이라면 그가 아무리 뛰어나다고 하더라도 위로 부터, 그러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오시는 분과는 결코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성경이 말하는 구원자가 되실 수 있는 첫번째 이유입니다. 

예수님께서 위에서 오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 분만이 특별하고 독특하게 할 수 있는 일, 다른 사람들은 전혀 할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보고 들은 것을 사람들에게 증언하는 일입니다. 이것은 이 세상의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에 그 분만이 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구원자가 되실 수 있는 두 번째 이유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땅에 속해 있으니, 너무 철저히 땅에 속해 있으니 하늘에 대한, 하나님에 대한 직접적인 증언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니고데모와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그랬습니다. 니고데모는 자기 지식과 사고방식에 붙들려 있었고,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자기들이 세례에 있어서는 예수님의 제자들보다 더 앞서있는 오리지날이라고 생각하는 그 생각에 붙들려 있었습니다. 그들은 세례 요한이라는 땅에 속한 틀을 벗어버리려고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땅에 속한 자들의 특징입니다. 땅에 속한 자들은 땅의 것을 버리고 떠나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늘의 것을 알려주어도 거기에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그게 지식이든 기득권이든 아니면 자기 자신의 취향이든 그 어떤 것이든 자신의 것을 하늘의 것보다 더 고집스럽게 붙듭니다. 그러느라고 진짜, 그러니까 하늘에 속한 것들을 놓쳐버리고 맙니다. 

우리들도 이런 어리석음에 빠질 수가 있습니다. 기존에 알고 있던 것들에 빠져서 진짜를 보여주어도 그것을 거부할 수 있습니다. 더 하늘에 가까운 것을 보여주어도 땅의 것을 고집하느라고 더 좋은 것, 더 온전한 것을 던져 버릴 수도 있습니다. 특히 우리는 우리에게 유리한 가르침을 좋아하는데, 이런 가르침을 붙드느라고 하늘에 가까운 것을 던져버리면 안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의 증언을 받는 자는 하나님이 참되시다는 것을 인쳤느니라” 예수님의 증언을 받아들이면 그것은 곧 하나님을 참되다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보고 들은 것을 가감없이 전하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분의 말씀이 참되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곧 하나님을 참된 분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33절은 그 이야기를 단순히 인정했다는 말이 아니라 ‘인쳤느니라’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하늘에 대한 증언을 받아들이는 일이 단순히 어떤 상식이나 지식을 배우고 받아들이는 일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일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인을 친다는 것은 자신의 이름을 걸고 어떤 것의 진정성을 보증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게 틀린다면 나의 모든 것을 걸고 책임지겠다는 뜻으로 하는 행동이 인을 치는 행동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의미를 가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수학을 배우면서 1+1=2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또 사용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우리가 일단 1+1=2라는 원리를 배우면 그 다음에 나오는 모든 셈에 이 원리를 사용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그것을 제대로 적용했을 때는 자신의 셈이 정확하고 틀림없다는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 그 확신을 가지고 선생님과 논쟁을 벌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바로 인을 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일을 통해서 하나님을 참된 분으로 인친다는 것은 그 말씀의 원리를 내가 생각하고 판단하고 살아가는 모든 일에 의심없이 확실하게 적용하고 그것에 대해서는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가지는 것을 말합니다. 기독교의 진리를 믿는 일이 무서운 것이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는 것은 그저 그것이 맞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서 출발해서 그 말씀을 자신의 삶의 전 영역에서 인쳐야 합니다. 항상 의심없이 사용하는 원리가 되게 해야 합니다. 내가 보증하는 것을 내가 따르지 않는다면 어찌 그것을 확실히 믿는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구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하심이라”라는 예수님의 증언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구원에 관한 한, 구원의 문제에 관한 한 이 원리가 절대로 변함없고 확실한 것임을 확신하고 항상 그것만을 구원의 원리로 적용해야 합니다. 누가 뭐래도 구원에 관한 한 다른 원리는 없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구원에 대한 유일한 사고방식이 되게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일을 직접 보고 듣고서 증언하시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우리는 그 분의 말씀을 믿고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을 참되신 분으로 인쳐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요한복음이 예수님의 증언이 왜 그렇게 진실되고 틀림이 없는가에 대한 답으로 내놓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성령을 한량없이 주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성령을 한량없이 보내신다는 것은 하나님과 예수님이 완전히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두 분은 다를 수가 없습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영이시고 또 그리스도의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영이 하나이니 두 분은 다를래야 다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하늘에 일들과 땅의 일들에 대한 증언을 의심없이 완전히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만이 하나님이 보내시는 그리스도이실 수 밖에 없는 세 번째 이유입니다.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들에게 순종하지 않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진노가 머물러 있게 됩니다. 왜냐하면 아들을 믿지 않고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곧 하나님을 그렇게 대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읽을 때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본문이 예수님을 믿고 영생을 얻는 일을 그 분의 증언, 그러니까 하늘의 일에 대한 그 분의 말씀을 믿는 일과 같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으면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긜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예수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영생이 주어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면 그 분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그 분에게 순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표현대로 하면 이런 사람에게는 영생이 없습니다. 


니고데모와 제자들의 경우처럼 때로 우리들도 우리의 취향이나 이기심, 그리고 입장이나 지식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믿고 순종하는 일에 실패할 때가 있습니다.  가장 필요한 것을 주어도, 가장 긴급한 질문에 대한 대답을 들어도 그것을 거부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당연한 것도 아니고, 그래도 괜챦은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영생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참되심을 인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그 분의 말씀이 참되다는 것을 보증하고 증명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미 우리에게는 그 길을 갈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참된 성도는 이미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죄가 용서되고 죄의 지배를 벗어났으며, 속 사람이 죄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할 수 있도록 완전히 새로워진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또 두 분의 영이신 성령님이 우리 속에서 끊임없이 예수님이 맞다고, 하나님이 맞다고 증거하시며, 믿는 자에게, 믿음대로 살려는 자에게는 기적같은 능력으로 도와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땅에 속해있는 다른 사람들과는 전혀 다릅니다. 예수님은 위로 부터 오신 만 물 위에 계신 분이십니다. 땅에 있는 그 누구와도,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 분은 직접 보고 들은 하늘의 일을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림자가 아니라 진짜를 전해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으로부터 보증까지 받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이 흔들리도록 그냥 내버려 두어서는 안됩니다. 그것을 생명처럼 여겨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이 이 믿음의 싸움이 되게 해야 합니다. 그러한 믿음의 싸움이 우리에게 영생을 가져다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항상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으로 확신있고 흔들리지 않은 삶을 살아서 영생을 얻는 복을 얻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